지역문화

거경대학에서 큰맛질 미산고택을찾아서

오토산 2017. 9. 26. 16:40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0812

 

 

 

 

 

거경대학에서 큰맛질 미산고택을 찾아서

 

 

작은맛질에서 춘우재고택을 탐방하고 나서 건너편 큰맛질의 미산고택을 찾았다.

 

큰맛질 마을뒷산에서 흘러내리는 文溪川을 경계로 위쪽을 渚上, 아래쪽을

渚下마을로 나뉘고 예로부터 예천사람들의 의식속에서 '금당맛질은 반서울'

예천의 명문가 세거지로 서울에 버금가는 산수와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며 옛날 (藷)가 많이 생산되어 藷谷이라 하였다가

官街의 吳記하여 渚谷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큰맛질은 大渚里라 한다.

 

 

味山古宅은 용문면 대저리(큰맛질) 새날골 들머리에 서남향으로 위치하고

행정 박종린선생의 현손인 讀處齋 朴世柱선생이 1650년(효종 1) 금당실에서

 대저로 옮겨지은것을 그의 5세손 味山 朴得寧선생이 1825년(순조25) 원형대로

 이곳에 옮겨지었고 일제시대 김대락,이상룡,이중엽,김창숙,김형식등이

내왕하며 유림규합 항일의병을 도모한 유서깊은 곳이다

 

이곳에는 6대 140년에 걸쳐 쓰여진 총 20책으로 이루어진 渚上日月이나.

渚上日用, 羅巖隨錄을 비롯하여 唐詩鼓吹, 唐朝策林, 萬國全圖, 通監등

48권의 기록과 전적이 보관되어 왔다고 하고

 사랑채에 걸린 味山齋 현판은 대원군 필적이라 한다.

 

味山 朴得寧(1808~1886)선생은 본관 함양으로 어버지 農齋 朴漢光의

저상일월을 이었고 아들 박주대가 나암수록을 거쳐 손자 박면진, 증손 박희수,

현손 박영래가 계속 써오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대에 6대에 걸친

구한 일기가  끝났다.

 

조선 23대 순조 말년에 시작하여 헌종, 철종, 고종, 순종을 거쳐 일제 36년,

그리고 광복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시대상, 정치.경제.

문화상이 담겨있는 귀중한 자료로 보물 제1008호로 지정 받았다고 한다.

 

羅巖 朴周大(1836~1912)선생은 미산의 아들로 18세 진사시에 장원했으나

官界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은거하면서 한일합방이후 일본탄압인 百五人사건

으로 소란하고 거듭되는 조국의 운명을 개탄하면서 77세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나암수록에서 한말과 일제초기의 시대상을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산림청에서 근무하셨던 주손님의 집안 내력에 대한 설명과 박갑로회원님의

언론 보도를 통한 보충설명을 들은후 종택을 돌아보고 주손님께 감사를 드리고

우리는 예천진호양궁장을 찾아갔다.

 

세상사 한마디

5-3=2 오해를 타인의 입장에서 세번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

2+2=4               이해하고 이해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4+4=8                           사랑하고 사랑하면 팔자자 바뀐다

오늘도 재미있는 산수공부 하면서 즐거운 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