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조선 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낙여)

오토산 2018. 3. 1. 23:48




 

"조선의 선비 노블레스 오블리주"

 

‘행동하는 양심’ 안동 향산 이만도(李晩燾) 집안

"공동선 공동체와 운명 함께"…
모든 기득권 버리고 ‘항일운동 3대’

어느 사회나 그 사회를 이끌어갔던 주도계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도가 브라만, 영국이 신사(gentry), 일본이 사무라이였다면,

한국 조선은 선비가 있었다.

서민층에서는 지배계층의 문화나 언어 그리고 상징들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선비를 아무나 보고 ‘이 양반, 저 양반’이라고 부르게 된

관습은 바로 이런 관행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선비 양반이라는 호칭은 이처럼 대중화됐지만 정작 선비는 일제 강점기에

토색질이나 일삼는 착취계급으로 철저하게 매도됐다.

그 결과 선비계층이 지니고 있었던 ‘선비문화’라는

긍정적인 측면마저도 도매금으로 처리되어 버렸고,

‘선비정신’의 실종은 공동체 유지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도덕성의 실종으로 이어진 것 같다.

 

안동의 향산 이만도 (響山 李晩燾·1842~1910)집안은

구한말 공동체가 붕괴되는 위기를 맞자 3대에 걸쳐 목숨과

재산을 내놓은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보여준 선비 선비정신 양반 가문이다.

향산 이만도는 퇴계의 11대 후손이면서 3대에 걸쳐 내리 문과급제를 배출한 명문이었다.

향산의 조부는 글 잘하는 선비들이 가는 홍문관 응교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서울대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관 대사성을,

향산 본인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격인 동부승지를 지냈다.

 

조부대부터 향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급제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향산은 부귀를 겸비한 잘 나가는 양반 선비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자 그는 잘 나가는 양반을 버리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바뀌었다.

1896년에 봉기한 예안(禮安)의병대의 대장을 맡았고,

1910년 합방에 이르자 단식을 감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일본군에 의하여 안동시의 1천여호 가까운 민가가

불타면서 많은 사람이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하였고,

안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종택 마저 불타 버리는

참상을 겪으면서 그는 죽어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공동체가 절단난 상황에서 그 책임을 져야 할 선비의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현실을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던 것 같다.

죽는 방법은 단식이었다.
음독이나 할복에 비해 단식은 단번에 죽지 않고

오랫동안 시간을 끄는 방법이라서 실천에 옮기기가 가장 어려운 자살방법이라고 일컬어진다.

 

단식은 특히 주변 가족들이 어렵다.

당사자는 죽기 위해서 곡기를 일절 끊고 있는데,

가족들은 한쪽에서 음식 냄새를 풍기며 끼니를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향산의 단식 기간은 무려 24일이었다.

단식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나자 각지에서 친척, 제자, 동료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간곡하게 만류했지만, 향산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단식 5일째에는 집안의 손자들이 할아버지의 단식현장에 모였다.

그는 손자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 왼쪽 엄지손가락을 펴지 않고 오므리고 있었다.

과거에 급제할 때 까지 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가

과거에 급제한 후에야 비로서 엄지손가락을 폈다.

너희들도 촌음을 아껴서 열심히 공부를 하거라”는 당부를 남겼다.

죽어 가는 현장에서 그런 당부를 들었던 손자들은 과연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향산은 찾아오는 제자들과 경전들을 논하기도 했고,

친구들과는 일제의 야만성을 비판했다.

집안의 남자들에게는 자신의 장례 절차를 이렇게 하라고 유언하였고,

여자들에게는 부도(婦道)와 함께 집안 살림을 잘 이끌어 가라고 당부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담담하게 주변의 일들을 정리하면서,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명망가인 향산의 단식 소식을 입수한 일본 경찰은 현장에 찾아와

강제로 향산의 입에 미음을 집어 넣으려고 시도 하였다.

그러자 혼수상태인줄 알았던 향산이 벌떡 일어나

“누가 감히 나를 설득하고 협박하려 하느냐”고 호령했다.

향산은 단식 24일째인 1910년 9월 8일에 운명했다.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어른답게 최후를 마친 것이다.

 

▲ 안동시 안막동의 향산 고택 위치와 향산고택은 아래의 사진에 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던 선비의 죽음은 안동의 명문가 선비들에게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안동독립운동사에서 큰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김대락(金大洛·1845~1914)과

이상용(李相龍·1858~1932),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이 눈 내리는

엄동설한에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행렬을 이끌고 만주벌판으로 떠나게 된

계기는 바로 향산의 죽음이었다.

 

이 때의 만주행은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함을 의미한다.

향산의 죽음은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장남인 이중업(起巖 李中業·1863~1921)은 을미의병 때

이미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여했고,1917년에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이중업의 집에 은신해 있을 정도로 광복회 활동에 깊숙이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김창숙과 함께 주도적으로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이중업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남긴 시가 하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을 함께 하지 못할 이 아버지의 원수들과 어찌 한배를 타고

건너가랴. 생각 같아서는 이 강물을 떠다가 천만년의 치욕을 씻어 버리고 싶구나”
(不共戴天讐 何忍濟同舟 欲挽此江水 洗却萬古羞)

독립운동은 이 중업 대에서 끝나지 않고 손자대에까지 이어졌다.

이 중업의 아들인 이동흠(李棟欽·1889~1967)과 이종흠(李棕欽·1901~1975)

형제는 군자금모금 운동인 제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에 참여했다.

이때 각 문중을 순회하며 모은 군자금은 결국 상해의

김구선생에게 전해져 의열단원을 양성하는데 사용되었다.

1926년 나석주(羅錫疇) 열사가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외환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을 던지는데

사용된 자금은 이때 모은 군자금이었다.

 

2차 유림단 사건으로 인하여 동흠, 종흠 형제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다.

로마의 귀족들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었던 게 아니다.

조선의 선비들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들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 정신은 지금도 안동의 청년들에게 집안의 영광이자,

민족의 영광으로 자랑스럽게 이어져야만 한다.

 

☆ 향산 이만도의 며느리 金洛 ☆

삼천석 부호의 딸… 3.1만세 운동 참여, 고문으로 실명까지

그녀의 삶은 남자들 못지않은 가시밭길을 걸었다.

시아버지인 향산의 단식 현장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내방객들의 접대를 맡았던 며느리였다.

남편 기암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면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만 하였다.

아들 둘도 시아버지와 남편을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고초를 겪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봤다.

그녀 자신도 58세 때인 1919년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군경에 체포됐다.

극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양쪽 눈을 잃었고, 11년간 맹인으로 고통받다가 죽었다.

김락 여사의 친정인 안동 내앞의 의성 김씨 집안은

‘사람 천 석, 글 천 석, 밥 천 석’으로 유명했던 속칭 ‘삼천석 댁’이었다.

만삭의 임신부였던 손주 며느리와 손주 딸을 데리고

엄동설한인 12월에 만주로 간 백하 김대락이 바로 친정 오빠이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큰 형부였다.

학봉 김성일 집안의 종손이자 파락호로 소문났던 김용환은 그녀의 사위였는데,

김용환 역시 나중에 독립운동에 관계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그녀의 삶을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로 표현한 바 있다.

여성으로서는 그때 당시 안동에서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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