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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특례시 행주산성을 다녀와서(1)

오토산 2025. 5. 6. 22:01

고양특례시 행주산성을 다녀와서(1)

 

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5월의 첫 연휴(5월 3~6일)를 맞이하여

가족들과 서울에서 만나 고양특례시 행주산성으로 나들이를 하였다. 

5월 4일 아침 청담동을 출발하여 행주산성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난지매립장은 푸른수목원으로 변해 옛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행주산성을 들어서니 방문객들이 많아서

제1주차장이 만원이어서 우리는 제2주차장에 주차하고

친절하게 안내를 하여주시는 문화관광해설사님의 해설을 받으며

행주산성의 지형과 권율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답사를 하였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덕양산 정상 중심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둘레 약1㎞의 토성으로

남서쪽은 한강, 동남쪽은 창릉천(昌陵川)이 한강으로 돌아 흐르는

천연요새지로  인근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라순찰사이던 권율장군이 승군을 포함한 2,300여명으로

왜군 30,000명을 격파하여 진주대첩, 한산대첩와 함께

임진왜란 3대대첩으로 알려진 곳이며

1976년 행주산성정화사업으로 대첩기념관, 충훈정,

충의정, 권율도원수 동상 등을 정비하였다고 한다. 

 

권율(權慄 1537~1599)도원수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막내아들로 늦은 나이(46세)에 문과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의병 천명을 모아 전주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대파하여 이치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라도순찰사가 되어

다시 1만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겅기도 오산 독산성에서 승리하였다.

 

한양으로 진격하여 행주산성에서 왜군 3만명의 첨단무기에 대적하여

행주대첩에서 승리하여 조선의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으며

정유재란이 끝나고 1599년 63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사망하였고

영의정에 추증되어 선무공신(1등공신)으로 충장공 시호를 받았다. 

 

도원수의 동상 앞에서 행주산성과 임진왜란의 전황 등 설명과

포탄과 화살이 다 하고 돌마져 떨어져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줘 싸움을 계속하여 승리로 이끌수 있었고

부녀자들의 호국의지가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여

'행주치마'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권율도원수의 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내신 권철 정승이었고

사위가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 이라는 설명을 하시며

기념관으로 오르면서 흙과 돌로 쌓여진 행주산성과

 조경(趙儆 1541~1609)장군이 엄지손가락으로 바위를 들어

바위에 엄지손가락 자국이 있었다고 전하는 엄지바위,

조선의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오방기(중앙 黃龍, 동쪽 靑龍,

서쪽 白虎, 남쪽 朱雀, 북쪽 玄武)에 대한 설명과 

충장사 입구에서 홍살문에 대한 설명을 하시고

 

대첩기념관 앞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화살로

 100발의 화살이 귀신같이 빨리 날으는  신기전과

수레 위에 40발의 승차총통을 장착한 변이중 화차 등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첨단무기들을 설명하면서

해설을 마쳤다.

 

우리는 상세한 설명하여 주신 해설사님께 감사드리고

남산타워와 한강, 방화대교, 여의도가 내려다 보이며

덕양산 행주대첩비가 있는 광장으로 이동을 하였다.

 

<男兒는 感意氣요 功名을 誰復論하랴

남자는 오직 의와 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공적과 명예를 따지겠느냐? >

-1593년 행주대첩에 임하면서

권율 도원수가 장수와 군졸들에게 남기신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