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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주당들의 이야기(낙여)

오토산 2018. 7. 12. 22:17



조선 주당들의 이야기 

       


안빈낙도의 표상 - 윤선도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시인으로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다.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으로 불린다.


윤선도는 조선 중기 정치 권력 면에서 약한 남인 출신이었다.

그래서 오랜 은거생활과 유배생활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기간을 통해 수많은 한시와 시조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그는 보길도에서 은거하며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술과 시로 세상을 살았다고 한다.

윤선도는 그가 지은 낙서재에서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마차에 가득 싣게 하고

기생들을 거느리고 나와 술을 한 잔 걸치고서는 어부사시사를 노래 부르게 했다.


또한 남쪽 산중턱에 있는 자연암석의 옥소대 위에서

채색옷을 입힌 기녀에게 풍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게 하여

연못에 그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감상하기도 했다.


유배생활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사치스러운 삶이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았던 탓인지, 그의 술사랑에는

기행이나 파격이 뒤따르지 않았다.


 


품격 높은 주당 - 송민고


송민고(宋民古, 1592~?) 는 조선 중기의 서화가로 호는 난곡(蘭谷)이다.

송민고는 삼절(三絶)로 불릴 정도로 글, 글씨, 그림이 뛰어났다고 하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에 「산수도(山水圖)가 있고 문집에 『난곡집(蘭谷集)』이 있다.


그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했다.

그 후 평생을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송민고는 혼란한 정치판에 뛰어 들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연에 은거하며 살았다.

그런 그의 벗이 되어 준 것이 바로 술이었다.


그 중 조속(趙涑, 1595~1668) 과의 일화가 야담에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강 조속이 전라북도 임피의 수령이 되어 부임하자,

난곡 송민고가 한산에서 조속을 찾아왔다.

조속은 그를 매우 반가워하며 술상을 차려 대접했다.

많은 술잔이 오고가고 송민고는 만취하여 쓰러져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조속은 즉시 관아에 있는 말에 태워 송민고를 서재로 보내고 그 뒤를 따라갔다.

송민고는 말에서 내려 서재에 쓰러져서는 눈을 부릅뜨고 조속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내 시를 다 지었네.” 하고는 낭랑하게 다음과 같이 읊었다.


무더위에 정신없이 흠뻑 취하니,/                    昏昏욕暑醉如泥

바람결에 송별가가 벽제관에 흩어지네./           送客風驪散碧蹄

관로의 역정이 꿈에서처럼 지나가니, /              官路驛亭如夢過

몸이 이미 작은 다리 서쪽에 이른 것도 몰랐네 / 不知身已小橋西


조선시대 사대부에게 시작(詩作)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대취한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시를 막힘없이 지을 수 있었던

송민고의 재능은 400여년이 지난 오늘도 빛나고 있다.


더욱이 술을 마음껏 즐기면서도 시인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은 그는,

술에 끌려 다니면서도 주당이라 자처하는 세인들에게

‘진정한 주당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반드시 취해야 붓을 잡는 화가 - 김명국


김명국(金明國, 1600∼?) 은 조선 중기의 화가로 일명 김명국(金鳴國),

김명국(金命國)으로도 알려져 있다. 호는 연담(蓮潭), 취옹(醉翁)이다.

김명국은 의기가 장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는 호방한 성격으로 해학에 능했다.

그의 호 가운데 하나가 취옹(醉翁: 취한 늙은이)일 만큼 술을 좋아했다.


주당으로 알려진 화가들이 그렇듯이, 그림을 그릴 때는 반드시 술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하면

술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따졌다고 한다.

그리고 술에 취한 후에야 그림그리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도 술에 취한 후 그림을 그려야만

그의 재능이 다 발휘 된다고 말했다.


어떤 역사학자는 “김명국은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질 않았고

또 술에 만취하면 만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취해야 그림을 그리고 또 너무 취해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명국이 그린 그림의 대부분은 술에 취하여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그림은 대부분 술에 취해 재빨리 그려낸 듯한,

굳세고 거친 필법으로 그려져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 민정중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노봉(老峯)이다.

인조 26년(1648)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직언을 잘 하여 사간원정언, 사간에 제수되었고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민정중은 그 아우인 민유중과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두 형제는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이에 아버지 민광훈이

그들에게 금주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에 관한 일화가 야담 『동패락송』 에 나와 있다.


민정중과 민유중 두 형제의 아버지가 강원도 관찰사로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민정중 형제도 근친(覲親: 멀리 있는 보모를 찾아가 뵘)을 하러 강원도에 와 있었는데,

거기 머물면서 형제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형인 민정중은 승지에 임명되었다는 어명을 받았고,

아우인 문유중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의 금주령도 그날만큼은 느슨해졌다.


형제는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술을 마셨고, 흠씬 취하게 됐다.

더는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연달아 술을 가져오라고 하자,

하인이 관찰사의 분부라면서 더는 가져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민정중이 취중에 크게 호통을 쳤다.


“너희 사또 나리의 접대가 어찌 이 모양이냐?”


사또라 하면, 곧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키는데,

민정중은 너무 취해 자신의 아버지를 험담한 꼴이 된 것이다.


후에, 술이 깬 두 형제는 실언을 한 것에 크게 놀라

문 밖에 거적 자리를 깔고 처벌을 기다렸다.

그러나 관찰사는 웃으며 꾸짖지 않았다고 한다.


 


달관에 이른 주당 - 김창업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로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노가재(老稼齋)이다.

숙종 7년(1681)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東郊) 송계(松溪)에 은거하며 전원생활을 하였다.


스스로를 노가재라 부르며 향리에서 거문고와 시 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다.

김창업이 술을 좋아하였다는 것은 그가 지은 시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벼슬을 저마다 하면 農夫(농부)하리 뉘 이시며

          醫員(의원)이 病(병) 다 고치면 北邙山(북망산)이 져려 하랴

         아히야 盞(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여러 번 벼슬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자연 속에 묻혀

살기를 원했던 김창업의 옆에는 항상 술이 있었다.

자신은 술을 먹으며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소박한 소망이 담겨 있다.

술에 관해서는 달관에 이른 듯한 김창업의 소견은 다음 시에서도 나타난다.



          거문고에 술대를 꽃아 놓고 호젓이 낮잠이 들었는데,

          삽작문 개 짖는 소리에 반가운 벗이 찾아오는구나.

           아이야! 점심 겸해서 마실 테니 외상으로 막걸리 상이나 차려오너라


이 시조 역시 자신을 찾아온 친구에게 술상을 대접하려는

김창업의 소박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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