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민족정통사 수호와 계승 고성이씨

오토산 2025. 12. 25. 06:45
● 불원재 유교문화해설(175)
【민족정통사 수호와 계승 고성이씨】
 
이재명 대통령이 왜곡된 고대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바른소리 환빠를 거론했다,
식민사를 신봉하는 식민사관 관변학자를 식빠라 하고, 민간의 정통사를 주장하는 부류를 식빠들이 환단고기를 믿는다고
환빠라고 비하한다.
 
이 고대사 인식은 정치적으로 옳타, 그르다 재단할 문제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관심 가져야 한다.
근간 고구려사를 중국사(中國史)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역사 왜곡사건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정통성을 부정하는
역사침탈(歷史侵奪) 행위로서 정부는 강력한 대응과 함께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중국은 김정은사후 북한정권의 유동적 상황과 남북한의 점진적 교류를 통한 한반도 통일에 대비하여 중국은 동북지방의
조선족 문제와 일제(日帝)와 청(淸)나라간의 ‘간도협약’으로 중국영토로 귀속된 간도지역의 영토 분쟁을 우려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고구려사 역사왜곡 사건은 장차 한국과의 영토분쟁을 예상하여 국제법상 역사적 연고권을 선점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해석되고 있다.
 
흔히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자랑스러운 민족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우리민족의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바가 없지 않다.
한민족의 역사는 수많은 외침과 외적의 강압에 의하여 역사의 진실이 왜곡된 바가 적지 않다.
특히 근세 일제 강점기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역사의 조작(造作)과 폄훼(貶毁)가 적지 아니하였으나
해방후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훼손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고 역사의 완전독립을 이루지 못한체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끌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조상들이 남겨준 소중한 역사기록을 우리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침략세력에 동조한 사학자들에 의하여 왜곡 날조된 역사를 사실인양 배우고 있다.
 
일제(日帝)는 그들의 식민통치와 민족문화 말살을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두고 실증주의란 명분을 내세워 처음으로
「조선사」를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기존의 정통사(正統史)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민간사기(民間史記)를 근거로 허구의 신화로 조작하고 단군을 역사의 시발점으로 하여
단군이전 5천여년의 생생한 역사를 민족사에서 배제시켰다.
그러나 일제에 맞서 조국광복에 일생을 보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의 고성이씨(固城李氏) 문중(門中)은
민족의 정통사 보존과 전승을 위한 6백년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석주 이상룡선생의 21대조이자 고려말 대학자인 행촌(杏村) 이암(李嵒)선생이 저술한 단군세기(檀君世紀)는
고조선의 단군왕조 47대 2096년의 역사를 소상히 기술하고 있을뿐아니라
단군왕조 이전의 환웅(桓雄)시대 1565년과 환국(桓國)시대 3301년의 역사기록을 밝힌
우리나라 정통의 고대사로서 이를 바탕으로 그 후손들에 의해 계술(繼述)된 고대사가
일제 암흑기에도 비전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나
이 소중한 기록이 아직까지 학계에서 올바른 역사로 인식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 상고시대 역사기록
우리나라 역사는 일반적으로 왕조사와 민간에서 야사로 기록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전부인양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이전에 기술된 고대사(古代史)는 「단군기」, 「해동고기」,「先史」, 「古朝鮮祕記」등의
민족정통의 사기(史記)가 있지만 이들의 역사서는 일제(日帝)의 정통사 말살책에 의하여 없어지고
지금까지 비전으로 남아있는 정통사기는 「三聖紀」, 「檀君世紀」, 「北夫餘紀」, 「太白逸史」등이 있다.
한말사상가인 해학(海學) 이기(李沂)선생이 선대로부터 비전되어 소장하고 있던 「태백일사」와 상고사(上古史)를
그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가 집성하여환단고기(桓檀古記)로 편찬하였는데
유언으로 “1980년이 되거던 공개하라”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우리나라 고대사로서 「三聖紀上.下」, 「檀君世紀」,
「北夫餘紀」, 「太白逸史」로 편집된 정통사이지만 이 사기는 지금까지도 사학계(史學界)에서 수용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 책중에서 삼성기는 상하편으로 신라시대 10현의 한분인 안함(安含,?~640)노인이 기술한 상편과
고려시대 원동중이 기술한 삼성기 하편으로 우리민족 고대국가인 환인(桓因), 환웅(桓雄)시대의 역사를 기술한
민족의 상고사(上古史)로서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천제 환인(桓因,안파견)이 건국후 7세 3301년의 역사와
배달국 환웅천황(桓雄天皇)이 태백산 신시(神市)에 건국후 18세 1565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정통사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말의 대학자인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고기(古記)를 근거로 기술한 단군조선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고열가 임금까지 47대 2096년의 생생한 기록으로서 단군임금의 건국기사를
신화(神話)가 아닌 소상한 사실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온 국민들이 알고 있는 단군신화는 허구적인 내용으로 그 기록을 누구도 믿을수 없게 된다.
 
북부여기는 고려말의 고승 휴애거사(休崖居士) 법장(范樟)이 평북삭주 이동(梨洞)의 이형식(李亨栻)의 집에서 얻은
단군세기를 근거로 편찬한 단군47대 고열가(古列加) 이후의 역사 기록으로 북부여 해모수(解慕漱)로부터 고무서(高無胥)까지
6세 180년의 역사와 가섭원(迦葉原)부여의 시조 해부루(解夫婁)로부터 3세 대소(帶素)까지108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태백일사는 조선중기 학자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이 저술하고 해학(海學) 이기(李沂)가 소장하고 있던 사서(史書)로서
우리민족 상고시대 환국(桓國, 桓因7대 3301년)→신시(神市,桓雄18대 1565년) →고조선(古朝鮮, 단군47대 2096년)→북
부여(해모수6세180년)→가섭부여(해부루 3세108년)→마한(35세1968년), 번한(75세 2113년)의 역사와
고대 고구려(주몽개국 28대705년)→대진국(대조영개국14세230년)→고려(왕건개국 34대475년)간의 역사로서
민족의 정통성과 종교,철학을 기록하고 있는데 한글이전의 민족고유의 문자인 가림토문자도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등 상고사를 집성하여 해학 이기의 감수를 거쳐
1911년 운초 계연수가 필사본으로 편찬하였는데 비전(秘傳)하여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笠)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단일본을 다시 1949년에 정서(正書)한 뒤 1979년에 책자로 발간된 것이다.
 
■ 민족사 수호의 고성이씨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태백일사, 환단고기등의 고대사는 단군세기의 저술이 행촌 이암으로부터 비롯되어
금세까지 600여년 동안 고성이씨 후손에 의해 계술 비전되었다.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은 고성이씨로, 고려조 문신이며, 자는 고운(古雲), 철성부원군 문헌공 우(瑀)의 아들로서,
대제학 강(岡)의 아버지, 좌의정 용헌(容軒) 원(原)의 조부이며 안동입향의 귀래정 이굉(李浤)과, 임청각 이명(李洺)의
고조부가 된다.
충선왕 5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 재주를 아끼어 부인(符印)을 맡기고 비성교감에 임명하였다.
충혜왕 초에 감찰집의에 올랐으나 충숙왕이 복위하여 전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여 섬으로 유배되었다.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정당문학을 지냈고,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로 임명되어 정방제조가 되었지만
환관의 비행을 간언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충정왕이 즉위하고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
공민왕초 철원군에 봉해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에 들어갔다가 다시 문하시중에 제수되었다.
 
1361년홍건적을 피하여 왕을 따라 남행하였고 1363년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철성부원군에 봉하여지고 익조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의 조자앙으로 예서와 초서에 능하여 필법은 조맹부와 견주었다.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그는 서세(逝世) 전 해인 1363년(공민왕12년)에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문하시중의 최고의 자리에서 접한
많은 고서를 증거하여 단군세기를 기술하였다.
 
행촌 이암은 당시 국가최고의 관료이자 학자로서 단군세기의 저술은 객관적이고 확실한 사료를 근거로
민족의 정통사를 정리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한 것으로
그 이후 고성이씨의 세거지인 평북 삭주 이동(梨洞)의 이형식(李亨栻)의 집에서 이 책이 나왔다고 하며
이 책을 근거로 고려말 휴애거사 범장이 북부여기를 이어서 기술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후 조선초 사서수거령에도 기록이 비전하여 다시 조선중기의 학자 고성이씨 일십당 이맥(李陌)에게 전하여
이를 근거로 태백일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행촌 이암이 기술한 단군세기는 행촌의 아들 밀직부사 이강(李岡,1333~1368)을 거쳐
손자 용헌(容軒) 이원(李原.1368~1429)에게 전해 지게 되었을 것이며 비전되는 동안 여러 후손이 필사하여
간직하였던 것중의 하나가 삭주의 후손인 이형식에게 전해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상할 수가 있다.
삭주이동 이형식(李亨栻)의 소장본에서 휴애거사 범장이 북부여기를 기술하게 되었는데
이는 다시 일십당 이맥(李陌)으로 이어진 것을 추상하면 행촌의 손자인 용헌(容軒) 이원(李原)에게 비전된 기록이
다시 용헌의 손자인 일십당 이맥(李陌)으로 비전 계승되었을 것으로 추상할 수가 있으며
이맥은 비전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를 바탕으로 그 이후의 역사를 계술하고 태백일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일십당 이맥(李陌,1455~1528)은 고성이씨이며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정부(井父)이며 임청각 이명과는 사촌지간이 된다.
그는 1498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당시 연산군의 후궁 장숙용(張淑容)이 임금의 은총을 기화로 축재에 광분함을 보고 수차례 탄핵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괴산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사헌부 장령이 되어 관기확립에 힘썼다.
벼슬이 동지돈령부사에 이르렀고 강직하고 매사에 공정하였다고 한다.
그 후 태백일사는 한말까지 비전하여 공교롭게도 후손인 해학(海學) 이기(李沂)가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해학 이기(1848-1909)는 전북 김제출신 고성이씨로 한말 사상가이며 항일 애국운동가이다.
그는 국운이 기운 조선조말엽 경세구국의 큰 뜻을 세워 전봉준에게 위정척사를 위한 의거를 제의하였고
위암 장지연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였다.
또한 유가(儒家)의 상고천금(尙古賤今)의 누습에서 탈피하고 시무.진취에 사상적 초점을 두고
민권과 법치 공화제를 찬양한 선각자였다.
그의 국사관은 기존 유학자들의 사대주의적 사관을 탈피하고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자주적으로 정당하게 인식하려 하였으며
기존학자들의 기자주봉설(箕子周封說)을 비전(秘傳)의 고기를 근거로 철저하게 부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국제(國制), 관제, 전형제, 지방제, 전제, 호역제, 잡세제, 학제등 여덟가지 제도를 긴급개혁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진취적 사상과 계몽적 역할, 그리고 개혁의 주장을 통하여 조선후기 기우러져 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한 선각자이며 끝내 한일합방의 국치를 당하자 일제에 항거하여 단식 순국한 독립지사였다.
 
해학 이기의 감수를 받아 환단고기를 편집한 운초 계연수(?~1923)는 황해도 선천출신으로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선생의 휘하에서 활약한 독립지사로 고성이씨인 석주 이상룡선생과 무관하지 않을것으로 추상된다.
운초 계연수는 ‘역사와 민족정신의 회복이 나라의 독립이다’라고 하면서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하였고
1980년이 되거던 공개하라고 유언하였다고 하며 1923년 일본 헌병에 의해 피살된 독립운동가이다.
당시 필사본으로 편집된 환단고기는 비전되어 역시 고성이씨인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笠, 1907~1986)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책이 1979년에 번역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필자가 소장하고 있다.
 
한암당 이유립선생은 평북 삭주출신으로 아버지는 단해 이관집이며 단해 이관집은 운초 계연수와 함께
석주 이상룡선생의 휘하에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였던 사이로 이유립은 운초 계연수의 문인이 되어
조선독립소년단 단장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선대 해학 이기선생의 뜻을 펼치기 위한 산육사(三育社)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 하였을뿐만 아니라 신풍학원설립, 신사참배기피, 창씨개명반대, 조선사교육, 무궁화심기등
항일활동을 펼친 민족운동가였다.
 
■ 우리나라 역사왜곡 사례
1989년에 발간된 이병도(李丙燾) 최태영(崔泰榮) 공저의‘ 한국상고사입문’에 의하면
“우리 한민족 본래의 역사는 일찍이 전화(戰禍)와 외적의 강압, 내부 사대주의자들 그리고 폭력으로 정권을 쟁취한 자들의
자기 비리를 합리화 하기 위한 기만책으로 인하여 위조, 피탈된바가 적지 않았다.
거기에다 근대에 제국(침략)주의 일본의 한국 강점이후 민족 말살정책으로 한국역사 위조의 강행이 주효하여
유구한 역사의 위로 반절과 넓은 판도(版圖)의 대부분의 절단이라는 세상에 유례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잃어버린 수천년의 연대사(年代史)와 반도의 일부로 구축된 민족 분포지역을 실상대로 회복하여
아직까지도 진행중인 역사의 왜곡을 바로잡고 선천적으로 미개하고 무능한 종족이라고 선전되는 모욕을 면해야 할
시급한 책무가 한민족에게 지워져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역사 왜곡의 주역이라고 말하는 이병도씨의 유언적 호소이며
평생을 학계에 몸 담았던 최태영박사의 애국충정의 한마다라고 할 수있다.
 
앞에 이분들이 지적한 중요한 역사왜곡의 내용을 요약하면
1.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神話)로 꾸미고 그 이전의 5천년 역사를 말살해 버렸다.
2.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야사를 근거로 기술되어 “환인은 하느님을 가르킨다”라든가
“단군왕검은 1500여년간 조선을 다스리다가 주무오항(周武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封)함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이다”라고 믿을수 없는 기록을 하고 있으며
고대사를 단군, 기자, 위만, 고조선의 역사로 기술하여 한민족(韓民族)은 중국한족(中國漢族)의 지배를 받은 역사로 만들었다.
3. 한민족의 영역을 개국때부터 조상들이 살던 드넓은 대륙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한반도 이내로 축소시켜 버렸다.
 
4. 우리민족은 부패하고 무능하며 계속해서 타민족의 침공만 받아온 약소 민족이라고 비하하였다.
이러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이 여러 사서(史書)에 의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으며 특히 고구려,백제,신라가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것이 천문학과 기상학에서 까지 입증되었을뿐만 아니라 정통 고대사의 기록과
중국내의 유적이 일치됨을 실증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 檀君世紀序/단군세기서
爲國之道 莫先於士氣 莫急於史學何也 史學不明則 士氣不振 士氣不振則 國本搖矣 政法岐矣. 蓋史學之法 可貶者貶 可褒者褒 衡量人物 論診時像 莫非標準萬世者也.
斯民之生 旣惟久矣 創世條序 亦加訂證 國與史竝存 人與政俱舉 皆自我所先所重者也
나라를 위하는 길에는 선비의 기개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역사를 아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선비의 기개가 떨치지 못하고, 선비의 기개가 떨치지 못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고르지 못하게 된다.
대개 올바른 역사는 나쁜 것은 폄하하고 기릴 것은 칭찬하여 사람을 저울질하여 평가하고 시대의 모습을 논하여 진단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만세의 표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민족이 살아온 것은 참으로 오래 되었으니, 창세의 법도와 맥락을 세운 내용을 증거하고 바로 잡아서
나라와 역사는 함께 존재하고, 사람과 정사도 함께 거론되니 이 모두(國.史.人.政)가 나보다 우선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바이다.
 
嗚呼 政猶器人猶道 器可離道而存乎 國猶形史猶魂 形可失魂而保乎 竝修道器者我也 俱衍形魂者 亦我也 故天下萬事 先在知我也 然則其欲知我 自何而始乎 夫三神一體之道 在大圓一之義 造化之神 降爲我性 教化之神 降爲我命 治化之神 降爲我精 故惟人 爲最貴最尊於萬物者也.
오호라! 정치는 그릇과 같은 것이요, 사람은 도와 같은 것이니, 그릇이 어찌 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라는 형상이요 역사는 혼과 같을진데, 어찌 형상이 혼을 잃고도 보존될 수가 있겠는가?
도와 그릇을 함께 닦는 것도 나 자신이며, 형상과 혼을 함께 갖추어 펴는 것도 역시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천하만사는 먼저 나 자신을 아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즉 나 자신을 알려고 한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대저 ‘삼신일체’의 도는 천.지.인이 무한히 크고 둥글고 하나라는 ‘대원일’의 뜻에 있으니,
조화의 신은 내려와 나의 성품이 되고, 교화의 신은 내려와 나의 생명이 되고, 치화의 신은 내려와 나의 정기를 이루게 되니,
그런고로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존엄하게 되는 것이다.
 
夫性者神之根也 神本於性而性未是神也 氣之炯炯不昧者 乃眞性也 是以 神不離氣 氣不離神吾身之神 與氣合而後 吾身之性與命 可見矣 性不離命 命不離性 吾身之性 與命合而後 吾身未始神之性 未始氣之命 可見矣.
대저 사람의 본성은 정신의 뿌리로, 정신은 성에 근본하지만 성은 곧 신명이 아니요,
기가 환하게 밝게 빛나 어둡지 아니한 것이 비로소 참된 본성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정신은 기를 떠날 수 없고, 기 또한 정신을 떠날 수 없으니, 내 몸의 정신이 기와 합하여진 후에라야
내 몸의 본성은 생명과 더불어 함께함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본성은 생명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생명 또한 본성을 떠나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내 몸의 본성이 생명과 더불어 합하여진 후에라야,
내 몸이 신명 이전의 성과 기와 합하기 전의 생명의 조화를 볼 수 있는 것이다.
 
故其性之靈覺也 與天神同其源 其命之現生也 與山川同其氣 其精之永續也 與蒼生同其業也
乃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者 是也 故定心不變 謂之眞我 神通萬變을 謂之一神 眞我 一神攸居之宮也 知此眞源 依法修行 吉祥自臻 光明恒照 此乃天人相與之際 緣執三神戒盟而始能歸于一者也
그런고로 그 본성의 신령한 지각의 능력은 하늘과 더불어 근원을 같이 하고, 그 생명이 현재 살아있게 되는 것은
산천 자연과 더불어 그 기운을 같이하고, 그 정기가 영원히 이어지게 되는 것은 모든 생명체와 하늘이 부여한 과업을
함께 하게 때문인 것이다.
이에 하나의 우주가 천지인 셋을 품고 있고. 이 셋이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가 이것이다.
그런고로 하늘이 정한 마음이 변치 아니함을 참 나(진아)라 하고, 신명이 통하여 만가지 변화를 되게 하는 것을
일신(하늘)이라 하니, 참 나는 곧 일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이 참된 진리의 근원을 알고 법에 따라 수행하면 좋고 상서로운 기운이 저절로 이르고, 밝은 빛이 항상 비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늘과 하나 되고자 할 때에 진실로 삼신의 계율을 굳게 잡아 지킬 것을 맹세함으로서 ,
비로소 능히 하늘과 하나됨의 경지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性命精之無機 三神一體之上帝也 與宇宙萬物 混然同體 與心氣身 無跡而長存 感息觸之無機 恒因主祖也 與世界萬邦 一施而同樂 與天地人 無爲而自化也 是故 其欲立敎者 須先立自我 革形者 須先革無形 此乃知我求獨之一道也 嗚呼痛矣 夫餘 無夫餘之道然後 漢人 入夫餘也 高麗 無高麗之道然後 蒙古入高麗也
따라서 성.명.정의 기틀이 없는 삼신과 한 몸인 상제님은 우주만물과 더불어 혼연히 한 몸이 되고,
마음과 기와 몸을 함께하면서 자취가 없이 영원히 존재하고, 호흡과 촉감을 느끼며 기틀이 없지만
환인 주조님은 항상 함께하게 된다.
환인주조님은 세계만방에 한결같이 덕화를 베풀어 즐거움을 함께 누리시며,
천.지.인과 더불어 함이 없이 저절로 조화를 이루신다.
이런고로 가르침을 바르게 세우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아를 바르게 세우고, 형체를 혁신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무형의 정신을 고쳐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을 바르게 알아 홀로 자립을 구하는 유일한 방도이다.
오호라 슬프다! 고조선 이후의 부여에는 부여의 도(精神)가 없어진 후에 한인(漢人)이 부여에 들어왔으며,
고려에는 고려의 도가 없어진 후에 몽고(元)가 고려에 쳐들어 왔다.
 
若其時之制先 而夫餘 有夫餘之道則 漢人歸其漢也며 高麗 有高麗之道則 蒙古歸蒙古也
嗚呼痛矣 向年潛淸輩之邪論 陰與百鬼夜行 以男生發岐之逆心 相應而合勢 爲國者抑 何自安於道器兩喪 形魂全滅之時乎 今外人干涉之政 去蓋滋甚 讓位重祚 任渠弄壇 如我大臣者 徒束手而無策何也 國無史而形失魂之故也
만약 그 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에 부여의 도(精神)가 있었다면 한인(漢人)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며,
고려에 고려의 도가 있었다면 몽고 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다.
오호 통탄스럽도다!
얼마 전에는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같은 간신배들의 사악한 말들이 은밀히 백귀(百鬼)와 더불어 야행하고,
고구려 역신 남생(男生)과 발기(發岐)의 반역하는 마음이 상응 합세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억압하니,
나라의 도와 그릇이 함께 없어지고 형체와 혼이 모두 사라진 때에 어찌하여 그들 자신만 편하고자 할 수 있겠는가?
지금에 외인(元)들이 정사를 간섭함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임금이 물러나고 바꾸는 것을
자기네 마음대로 농단해도 한갓 우리 대신들은 속수무책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나라에 역사가 없고 형체가 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一大臣之能 姑無可救之爲言 而乃擧國之人 皆救國自期 而救其所以 爲有益於救國然後 方可得以言救國也 然則救國何在哉 向所謂國有史而形有魂也 神市開天 自有其統 國因統而立 民因統而興 史學豈不重歟 書此樂爲檀君世紀序.
上之十二年 癸卯十月三日 紅杏村叟書于江都之海雲堂
대신 한사람의 능력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나라 구하기를 스스로 기약하고, 나라를 구함에 유익하게 되는 바를
구한 연후라야 바야흐로 나라를 구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라에 역사가 있고, 형체에 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시(神市)에 나라를 연 이후로 그 국통(國統)이 비롯되었고, 나라는 이 국통으로 인하여 세워지고
백성은 국통에 따라 흥성하였으니, 역사를 배움이 어찌 소중하지 않을 것인가!
이 글을 기쁜 마음으로 써서 단군세기의 서문으로 삼는다.
효경대왕((고려31대 공민왕) 12년 계묘(AD1363) 10월 3일
홍행촌의 늙은이가 강도(江華島))의 해운당(海運堂)에서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