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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기열전(2)

오토산 2026. 5. 6. 17:12

 대한민국 사기열전(2)

   1960년이 끝날 무렵에도 한국은 여전히 가난했다.

원조에 의존해야만 했고, 여전히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4월 19일 시민혁명이 일어났고(4.19혁명),

4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아를 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을 한다.

   하지만 씨앗은 뿌려져 있었다.

 

교육이라는 씨앗이 - -,

그리고 바로 그 다음 한국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1960년 8월13일 윤보선 정권이 들어섰고,

1961년 1월1일 한국의 당시 수출액은 3,290만 달러였고,

수입액은 3억4,300만 달러로 10배 이상의 차이였다.
   한국이 수출하던 것은 텅스텐 원석과 생선, 김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 해 7월 충격적인 정부의 선언이 나온다.

 

10년 안에 수출액 1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는 - - .

   계산기를 한 번 두들겨 보자.

3,29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이면 30배를 늘리겠다는 이야기이다.

그것도 10년 안에 - -, 과연 가능은 할까?

   이 무렵인 1961년 5월16일 박정희의 군사쿠테타가 있었고,

윤보선은 1962년 3월22일 사임하기에 이르는 일들이 일어났다.

  

1961년 9월, 영국 파이넨셜타임스가 이 소식을 듣고기사를 썼다.

“비현실적인 목표!, 한국정부는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원조가 없이는 생존하기도 어려운 나라가 수출 강국이 되겠다는 것은 환상이다.”
  

냉정한 평가였다.

실제로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한국에는 팔 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그냥 시작했다.

  

1962년 1월, 울산에 첫 공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어촌마을로, 그냥 바다와 모래사장 뿐인 곳에 말이다.

   1962년 5월, 미 월스트리트저널 특파원이 울산을 방문해서 쓴 기사다.

“황량한 해변에 공장을 짓고 있다. 인프라도 없고, 숙련노동자도 없다.

대체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맞다. 그랬다.

당시의 한국 사람들도 몰랐다. 뭘 만들어서 팔아야 할지를 - -,

그냥, 일단 공장부터 짓고 있었던 것이였다.

  

1963년 11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한국인 124명이 내렸다.

광부들이었다. 탄광에 일하러 온 젊은이들이다.

   1964년 12월에는 간호사 130명이 독일로 떠났다.

독일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버는 돈들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송금되어졌다.

  

1965년 1월, 독일 쇼피겔지가 한국인 광부들을 취재했다.

기사 내용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지하 1,000m 갱도에서 일한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는다.

모두 조국에 돈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땅밑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는 일로 독일사람들이 꺼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청년들은 그 일을 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라를 일으키기 휘해서 - - .

   1964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가 7,936명, 간호사가 1만1,057명으로,

그들이 보낸 돈이 무려 1억 달러가 넘었다.

그 돈을 공장 설립에 투자했다.

  

1965년 6월22일,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논란이 되었는지, 서울 거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왜? 하필이면 일본과 손을 잡느냐?’는 것이었다.

식민지 시절을 당했던 나라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과 손을 잡는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다.

하지만 정부는 밀어붙였다.

  

1965년 8월, 뉴욕타임스가 이렇게 썼다.

“한극은 실용주의를 택했다.

감정보다 경제를 택한 것이다.

과연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까?”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에서 기술과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 기술자들이 일본공장으로 연수를 가서 몇 달씩 기술을 배워왔다.

   1966년 3월, 일본 니케이신문이 한국 연수생들을 취재했다.

 

“한극인들은 메모를 엄청나게 한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퇴근 후에도 숙소에서 공부를 한다.

이런 열정은 전후일본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배우려는 열망이 대단했던 것이다.

일본 기술자들이 놀랄 젇도로 말이다.

  

1965년 10월,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이 일 또한 엄청난 논란을 불렀다.

전젱이 끝난지 겨우 12년만에 또 전쟁터로 가야 하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그 댓가로 받는 달러가 또 한국으로 들어왔다.

군인들 월급과 군수물자 조달 건설프로젝트까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서 벌어들이 돈이 10억 달러가 넘었다.

   1966년 8월, 워싱턴포스트 특파원이 서울을 방문해 전한 그가 느낀 분위기는 독특했다.

 

“한국사람들은 미친듯이 일한다.

공장은 밤낮없이 돌아가고,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일한다.”

  

과장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노동자들의 평균 근무시간은 주 60시간이 넘었다.

하루 12시간씩 일주일 내내 일했다.

  

1967년 4월1일, 포항에 제철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세계은행이 이 프로젝트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한국에는 철광석도 없고, 석탄도 없다.

제철소를 지어보았자 경쟁력이 없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투자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세계은행이 반대한 것이다.

경제성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한국은 어떻게 했을까?

일본에서 돈을 빌렸다.

그리고 그냥 지었다. 

  

1968년 2월1일,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km, 당시로서는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1968년 3월, 영국 로이터통신은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은 자동차도 별로 없는데, 왜 고속도로를 만드나?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다.“

   맞는 말이다.

 

1968년 한국의 자동차 등록 댓수는 2만7천여 대였다.

서울 인구가 300여만 명이 넘는데 자동차는 겨우 2만여 대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고속도로를 만든다?

   자동차가 없으니까 고속도로를 안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속도로가 있어야 자동차가 늘어난다는 논리로 대응했다.

  

1968년 5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 차이통 기자가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찾았다.

그가 본 광경이다.
  

”수천 명의 인부들이 삽과 곡괭이로 산을 깎는다.

대형 장비가 부족해 사람들 혼으로 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도 공사 속도는 놀랍도록 빠르다.“
  

1970년 7월7일에 경부고속도로는 완공되었다.

   세계 건설사에도 유래가 없는 기록적인 속도였다.

 

1969에 들어서면서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출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1969년 1월 한 달, 한국의 수출액이 5천만 달러를 돌파했다.

섬유와 가발, 전자제품들이 미국으로, 미국으로 쏟아져 나갔다.

  

1969년 11월30일,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한국의 영간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정화히 말하면 10억240만 달러였다.
  

1961년에 세우고 선언한 목표액 10억 달러를 정활히 8년만에 달성한 것이다.

   1969년 12월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1면 톱기사로 이렇게 실었다.

 

”우리가 틀렸다.

비현실적이라고 했던 그 목표를 한국은 8년만에 달성했다.

이것은 경제적 기적이다.“
 

  ‘비현실적‘이라로 했던 그 신문이 틀렸다고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한국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 (3부에서 계속)

 

<SNS에서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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