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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과 기생 유지(관리번호 12)
李栗谷과 妓生 柳枝
이이李珥(1536, 중종 31∼1584, 선조 17)의 아명(兒名)은 견룡(見龍)이다. 자는 숙헌(淑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康平公 명신(明晨)의 5대손,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이다. 오만원권 지폐초상화다. 江陵에서 태어나 13세 때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 16세에 어머니를 잃고 3년喪이 지난 1554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했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1년 만에 집에 돌아와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몰두, 1558년 당시 이름을 떨치던 퇴계(李滉)을 찾아가 학문을 논의하니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했다. 그해 장원 급제하고 이후부터 과거 때마다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란 칭송을 받았다.
1564년 호조 좌랑(戶曹佐郎)이 된 것을 시초로 관계官界에 나서서 1568년(선조 1)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570년 해주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이듬해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었으나 학문 연구를 위해 다시 사직하고 파주(坡州)에 은퇴, 1574년에는 또 조정의 요구로 황해감사(黄海監司)로 약 반 년 간 재직했다. 그 후에도 조정과 고향에 자주 왕복하면서 대사간(大司諫)ㆍ대사헌(大司憲)ㆍ
호조판서ㆍ대제학(大提學)ㆍ이조판서ㆍ우찬성(右贊成)ㆍ병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583년에는 당쟁의 조정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율곡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23세 때 지은《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本體)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 심리 근본이 이와 기의 두 가지 근원에 있지 않고
일원적一元的이라 하여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을 배격했다. 이러한 주장은 서경덕(徐敬德)과 이황(퇴계)의 설을 절충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율곡은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朱子의 뜻에 어긋난다면 주자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율곡은 경세가經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작《동호문답東湖問答》ㆍ《성학집요聖學輯要》ㆍ《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ㆍ《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등은 임금의 도리와 시무(時務)를 논한 명저들로
정치에 대한 그의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堯舜) 시대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그 밖의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율곡은 사람파(士林派)에 속했고, 훈구파의 무위무책(無爲無策)을 비판하고 여러 건설적인 정책을 제기했다. 왜구의 침입을 예견하고 상비군 10만의 양성책, 해방책(海防策)을 죽기 직전까지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가 죽은 지 8년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율곡이 대동법(大同法) 실시와 사창(社創)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 사회 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했으며, 민중의 계몽을 위해《서원향약西原鄉約》ㆍ 《해주향약海州鄉約》ㆍ《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ㆍ《동거계사同居戒辭》ㆍ 《학교모범學校模範》ㆍ《해주은병적사학규海州隱屛積舍學規》ㆍ 《약속約束》ㆍ《문헌서원학규文憲書院學規》 등 규례規例를 많이 만들었다. 그는 제자들에 의하여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幾湖學派를 형성,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망 후 1682년에는 문묘文廟에 모셨고 황해도 배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다.
율곡의 여성관을 성리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 중종 30∼1598, 선조31)과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하루는 친구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생일잔치에 같이 가보니 기생이 끼어있었다. 우계가 “기생은 오늘 모임에 마땅치 않다”고 하자 율곡이 웃으면서,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나니 이 또한 하나의 도리요” 하며 설득하자
마침내 우계가 함께 자리에 참석했다고 한다.
서울 순화방(順和坊)(지금의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난 성혼은 경기도 파주 우계에
거주했다. 17세 때 감시(監試) 초시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과거를 단념,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했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우참찬에 올라 좌참찬(정2품)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났다. 율곡과 6년에 걸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성혼의 시조 ‘말없는 청산이요’는 유명하다.
<말없는 청산>
말 없는 청산(靑山)이요, 태(態)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분별(分別)없이 늙으리라.
황해도 황주에 유지(柳枝)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율곡을 무척이나 흠모했다. 용모가 예쁘고 행동이 민첩했으므로 율곡도 매우 그녀를 귀엽게 여겨 함께 놀기도 했지만, 유지와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을 보면, 여성에 대한 율곡의 태도가 담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거유(巨儒) 이율곡(李栗谷)과
동기(童妓) 유지(柳枝)와의 연정(戀情) 설화 이율곡은 말년에 황해 감사로 와 있을 때, 유지(柳枝)라는 동기(童妓)를 사랑한 일이 있었다, 유지는 열세살(13세)밖에 안 되는 동기(童伎)였지만, 그녀 역시 이율곡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그러나 이율곡은 몸이 몹시 쇠약한데다가, 유지(柳枝)의 나이가 너무도 어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몸은 범하지 않았다, 사랑하면서도 몸만은 범하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율곡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가, 율곡이 유지(柳枝)를 두고 읊은 시를 보면 제간(諸間)의 인간적인 심정을 족히 이해할 만하다,
“어린 몸 수줍은 듯 고개 수그려 추파를 보내도 받아들이지 못 하네 마음은 부질없이 설레 이건 만 운우(雲雨)의 정(情)은 풀지 못했소. “너는 자라면 이름을 떨칠 것이나 나는 너무도 늙어 사내가 아니로다. 미인에겐 고정된 임자가 없는 법 장래에는 영락(榮落)할 것이 가련(可憐)하구나, 노쇠한 선비와 앳된 동기와의 맺어 질 수 없는 사랑은 애간장이 타오르는 고민(苦悶) 이였을 것이다, 율곡은 유지를 두고 이렇게도 차탄(嗟歎)하였다.”
“타고난 그 자태 선녀처럼 아름다워 사귄 지 십 년에 사연도 많았노라 너도 나도 목석은 아니건만 다만 몸이 약해 사양했을 뿐이로다.”
유지를 사랑은 하면서도 몸이 약해 범하지 못한 것은 진정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비극이었던 것이다,
율곡이 유지에게 써준 친필 초고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율곡이 황해도 관찰사 재임 중이던 39세 때 알고 지낸 유지를, 48세 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율곡리와 해주를 다녀가다 다시 만났을 때 써준 시이다. (비교: 퇴계 이황은 48세에 단양 군수에 부임해서 관기(官妓) 두향(杜香 18세)을 만 18세 연하 기생과 22년을 사랑을 했다)
젊은 날 좋은 기약 다 놓치고서 이제 황혼(黃昏)의 나이에 와서야 다시 만났으니…, 내생(來生)이 있단 말씀이 빈 말이 아니라면, 가서 저 부용성芙蓉城(연꽃 핀 저승의 신선나라)에서 너를 다시 만나리. ~~~~~~~~~~~~~~~~~~~~~~~~~~~~~~~ 다시 통석(通釋)하면 다음과 같다. 이율곡(李栗谷)이 기생(妓生) 柳枝에게 지어준 시
연약한 체질에 머리를 살짝 숙이고도 눈짓을 보내지 않네. 허공에 들리는 건 파도소리요 운우(雲雨)(섹스)는 꿈이 아닌 것을 오로지 응하는 것은 너의 긴 이름(柳枝)으로 침방(寢房)은 열었으나 내가 쇠약한 것을 국향(國香:官妓)은 정해진 주인 없으나 시들어 (老妓)가는 것이 가련(可憐)키만 하다.
*이율곡이 행주관찰사로 황주를 순시하다 천침(薦枕:잠자리 시중 기생)을 한 유지(柳枝)에게 지어준 시이다
“아름답고 가냘픈 한 선녀 십년을 서로 알면서 의태(意態)도 많았던 것을 내 간장(肝臟)이 목석(木石)이 아닐세. 나이 많아 분화(芬華)를 사랑하는 것일세.”
그 뒤 율곡이 원접사(遠接使)로 황주에 왔으나 유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계미년에 일이 있어 다시 황주에 들르니 유지가 소사(蕭寺)에서 송별(送別)하였다. 율곡이 강촌(江村)으로 돌아오자 유지가 강촌으로 찾아왔다. 그를 위해 지은 시이다.
병신년 사월 스무아흐레 취람 여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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