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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 서거 이야기(낙여)

오토산 2018. 8. 31. 23:50



이준 열사 서거 

               1907년 7월 14일  이준이라는 이름보다는 ‘이준 열사’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돌아오지 않는 밀사’ 이준.

그가 1907년 7월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죽었다.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비분을 안고서였다.


그가 죽은 직후 일본의 진서신문에는

 “안면에 종기가 나와서 절개했는데 절개한 곳에 단독(丹毒)이 침입하여

이틀 전에 사망하고 어제 장의를 집행했다.”고 보도했지만

러나 대한매일신보는 이준이 자결해 만국 사신 앞에서 피를 뿌렸다고

보도했으며 황성신문은 이준이 할복자살했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 후자의 할복자결설은 이후 항일감정 속에서 유구하게 계승되었고

어느 결에는 할복자결을 한 것이 명백한 사실인양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벌써 반 세기 전 1956년 국사편찬위는 이준 열사의 사인에 대해

면밀히 검토했고 거기서 할복 운운은 사실과 다름을 밝혔던 것이다.


하기사 정말 풍문대로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장 앞에서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던졌다면 거기에 넘쳐나던 각국 기자들이

그 참상을 보도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동료 밀사들도 그렇게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결국 이준 열사 할복설은 우리 백성들이 만들고 퍼뜨리고 공유했던

하나의 ‘항일 신화’였던 것이다.


이준 열사가 할복을 했건 병사를 했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최후까지 최선을 다해 조국의 불운한 운명을 세계에 알리고

침략자를 규탄하려 했던 대한제국의 충신이었으며

자신의 책임을 다한 관리였다는 것 이상의 중요한 사실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하나 더 알아 보자.

이준은 어떤 관직에 있었으며 왜 고종의 신임을 받아 밀사가 됐을까?

우선 그의 출신부터 보면 그는 함경도 북청 출신이다.


이시애의 난 이래 동북 지역 출신들은 거의 관리가 되는 길은 막혀 있엇고

가끔 과거급제자가 나오면 파천황(破天荒) 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준의 집안은 전주 이씨이기는 했다.

이성계의 사촌형 이원계의 16대손이라고 하는데

함경도 북청의 전주 이씨가 서울에서 그렇게 먹힐만한 가문은 아니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북청 물장수들과 어울려 지내기도 하고

세도가 김병시의 집에도 머물렀는데 하루는 담뱃대 문제로

김병시의 아들이 시비를 걸었다.


너같은 상민이 그런 장죽 쓰는 게 아니다....

이때 이준은 함경도 아바이 성깔을 그대로 드러낸다.


담뱃대를 작신 부러뜨리며

사람 있고 물건 있지 양반 담뱃대가 사람 위에 있음둥?” 일갈을 해 버린 것이다.

그만큼 그는 격정적이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함흥 순릉 참봉에 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다시 상경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 양성소에 들어간 것은 그에게는 천직을 제시한 셈이었다.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다가 투옥되기도 했고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무산시킨 보안회 활동에도 열심이었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중심으로 참가했던 그는 1906년 평리원 검사로 등용된다.


요즘의 검사와 같은 직책. 이준 검사는

‘검새’로 즐겨 비하되는 100년 후의 후배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관리였다.


그때는 검사동일체원칙같은 것 없었던 듯 상부의 부당한 명령에는 사사건건 항거했고

 황족에게도 10년 형을 구형하는 강심장이었으며 급기야 사면령을 둘러싼 시비 끝에

상관을 고발해 버리는 황망한 행동을 하는 돈키호테 검사였다.


그는 하극상 죄로 체포되는데 재판에서 이렇게 외친다.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간하고 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이 간하는 것인데

상관이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못함에 어찌 하관이 이를 논하여 책망하지 못한단 말인가.”

태형을 받긴 했지만 고종의 배려로 검사직은 유지한 이준은 석방된 후

 또 한 번 엄청난 일을 벌인다.


본인이 검사된 몸으로 국가의 막중한 형법을 사사로이 유린함을 보고 공분을 참을 수

없어 본부에 한 차례 기소하고 한 차례 청원하였으나 모두 수리하지 아니하고 (중략)

법부 대신 및 평리원 재판장 이하 제법을 모두 상주하여 면관하고

체포 징치케 하여 나라의 헌장을 바로잡고 국민의 분원을 풀어주시기 청원합니다.”


하늘같은 법부대신과 재판장 등을 모조리 고발하고 징치하여

법을 바로 세우고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청원서가 쓰여진 것은 1907년 3월 16일. 바로 그가 밀사로 헤이그에 가는 해였다.


고종 황제는 이 맹랑하지만 곧을대로 곧고 바를대로 바른 검사를 눈여겨 봤고

그에게 밀사의 중임을 맡긴 것이다.


헤이그 밀사로 갔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게 되면

어느 누가 청산에 와서 술잔 부어놓고 울어주려나

바람 눈 서리도 언 자리에서 내가 죽은 뒤에 누구라

장차 좋은 술 가져다가 청산에서 울어주려나

가을바람 쓸쓸한데 물조차 차구나

대장부 한번 가면 어찌 다시 돌아오리


이준 검사는 그렇게 시를 읊고 헤이그로 떠나갔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ㅡ From 후배 김형민PD  t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