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02-(34)
*또 다시 꿈틀거리는 방랑벽.
김삿갓과 수안댁의 결혼식은 뒷산에 있는 산신당 앞에서 냉수를 한 그릇 떠놓고,
대동계장 제제의 집전으로 20여 명의 친구들의 축복 속에 거행 되었다.
불교에서는 부부 관계를 삼생연분(三生緣分)이라고 한다.
부부란 아무렇게나 맺어지는 것이 아니고 , 전세(煎世),
금세(今世),내세(來世)에 걸쳐 ,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어야만 맺어진다는 소리다.
김삿갓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안댁과 자기는 삼세의 인연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삼생의 인연이 있고 없고는 별개 문제로,
많은 친구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니,
수안댁과 부부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김삿갓은 결혼식을 올리는 도중에 영월에 있는 본마누라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매우 삭막한 기분이 들었다.
(마누라는 언제 돌아 올지도 모르는 나를 지금도 날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텐데,
나는 마누라를 버려두고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
그러니 양심에 가책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수안댁이 기막히게 좋았던 것도 아니었고 ,
취중에 색정을 못이겨 어찌하다 한 번 건드렸을 뿐인데 ,
이것이 친구들에게 들통이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식을 올리게 된 것이 아닌가...
경과야 어찌 되었든, 여러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수안댁과 결혼식을 올렸으니
두 사람은 어엿한 부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결혼식을 올린 그날로 수안댁은 술장사를 그만두고,
두 사람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수안댁은 까닭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무척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부부가 된 것이
자네는 그렇게도 좋은가 ? "
"제가 좋아하는 삿갓 어른과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으니,
기쁠수 밖에요."
"허기는 20여 년을 독수공방으로 지내다가
알량하나마 서방이 생겼으니 기쁘기는 하겠지."
"알량하기는 왜 알량해요.
제게는 삿갓 어른처럼 훌륭한 분이 없는걸요."
"내가 훌륭한 사내로 보인다구 ?
하하하"
"이제부터는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내가
자네 집에 얹혀 지내게 되어 미안하기 그지없네."
"그런 생각은 잊어 버리세요.
당신은 당당한 우리 집 주인이시고
저는 당신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마누라인걸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더욱 고맙구먼"
수안댁은 결혼한 그날부터 남편 공대가 너무나도 지극했다.
김삿갓 역시도 오랫동안 방랑 생활을 계속 해오다가
새 살림을 시작하고 밤마다 살을 섞어 오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수안댁에게 정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어느날, 하는 일도 없이 공짜밥을 먹고 있기가 민망하던 김삿갓은,
"내가 언제까지나 놀고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니,
봄이 오거든 농사라도 지어 볼 참이라네." 하고
말했더니 수안댁이 펄쩍뛴다.
"선비는 농사를 짓는 법이 아니에요.
농사는 나 혼자 지을테니, 당신은 책이나 읽고 바둑이나 두세요."
"선비는 농사를 짓는 법이 아니라니 ?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옛날 어른들이 모두 그러시잖아요.
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을 농사꾼으로 만들 수는 없어요."
수안댁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남편에게 농사는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말까지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보니까 우리 할아버께서도 선비였기 때문에,
농사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마다 사랑방에서 글만 읽고 계시더라고요."
"선비라고 농사를 짓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누,
그런 고루한 생각 때문에,
우리네 백성들이 언제까지나 가난에 허덕이게 되는 거야."
"누가 뭐라든 간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당신이 농사짓는 것은 못 보아요.
그리고 생활의 걱정은 마세요.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것도 많이 있으니까요."
수안댁의 고집은 이만저만 센 것이 아니었다.
마누라가 그처럼 고집을 부리니, 김삿갓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따라서 밤이면 모임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잡답을 즐기거나 술을 마셨고 ,
낮이면 남의 집 사랑방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김삿갓이 나름, 요긴하게 쓰이는 일은 ,
마을에서 사람이 죽거나 제삿집이 있을 때면,
제문(祭文)을 지어 주고 만장(輓章)이나 써주는 일 뿐이었다.
이러니 천하의 방랑벽이 있는 김삿갓으로서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차츰 시간이 갈 수록 허망한 생각이 들던 김삿갓,
(명산대천을 행운유수처럼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던 내가,
계집 하나 때문에 이처럼 얽매어 지내야 하는가.)
그러나 이제와서 ,
한 번 맺어진 인연을 과감하게 박차고 뛰쳐 나간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의 생활 속에서 마음이 산란하던 김삿갓,
40평생 유리걸식을 해오다가 늦게 차린 살림으로 팔자는 매우 편해졌지만 ,
아무래도 그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닌것 같았다.
(아니다 !
나는 한평생을 거지처럼 떠돌아 다니며 살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난 몸이 아니던가.
나에게 정착된 생활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마침내 김삿갓은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갈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sns에서>
'방랑시인 김삿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안댁과 송편을 빚은 김삿갓 (0) | 2019.12.24 |
---|---|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집착 (0) | 2019.12.23 |
사고를 당한 김삿갓 (0) | 2019.12.22 |
수안댁과 연분을 맺은 김삿갓 (0) | 2019.12.20 |
수안댁의 고백을 들은 김삿갓 (0) | 2019.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