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매화연을 선물받은 김삿갓

오토산 2020. 1. 8. 08:46

●방랑시인 김삿갓 02-(52)

*장인 정신으로 만든 수양매월 (首陽梅月) "하편"

 

 

 

"이것은 우수갯 소리이기는 합니다만, 지금으로 부터 14,5년 전에

한양 어느 대가 댁에서는 "수양매월"이라는 먹 때문에 노부부간에

 대단한 부부 싸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선생께서도 먹을 사가셨다가 내외간에 그런 불상사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서 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호기심이 솟았다.

 

"먹 때문에 부부 싸움이 일어나다뇨 ?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어째서 먹 때문에 부부 싸움을 하게 되었는지,

좀더 자세하게 말씀 해 주시죠."

 

 "선생도 부부 싸움을 피하시려면

그 애기를 한 번쯤 들어 두시는 것이 좋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묵당 노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지금으로 부터 14,5년 전의 일이다.

장모(張某)라는 양반이 황해 감사를 지내다가 한양으로 돌아갈 때,

 수양매월이라는 먹을 자그마치 30장이나 사가지고 돌아갔다.

 

그는 그 먹을 얼마나 아꼈는지,

 조카가 한 장만 달라고 애걸 하여도 끝내 나눠 주지 않았다.

이에 조카는 아저씨를 매우 괘씸하게 여겨,

골탕을 먹여 줄 생각에서 숙모에게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고자질 해 바쳤다.

 

 "숙모님 ! 아저씨께서 황해 감사로 내려가 계실 때 ,

수양매월이라는 기생에게 반해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시옵니다.

한양으로 올라 오실때에도 그 기생을 잊을 수 없어,

수양매월이라는 그 기생의 이름을 30장이나 되는 먹 속에 새겨 가지고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아저씨는 그 먹을 문갑 속에 소중히 간수해 오고 계시다고 하오니,

숙모님께서는 사랑방 문갑을 한번 뒤져 보도록 하십시요.

만약 문갑 속에서 수양매월이라는 먹이 나온다면,

아저씨는 아직도 그 기생을 오매불망으로 연연해 하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인은 그 길로 사랑방에 달려 나가 문갑을 뒤져 보니,

과연 문갑 속에서는 수양매월이라고 네글자로 새긴 먹이

자그마치 30장이나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놈의 영감탱이가 ! ..."

 

부인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즉석에서 마치 기생년을 두둘겨 패듯이

그 귀한 먹을 장도리로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 노부부간에는 대판 싸움이 벌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편이 아무리 변명을 하여도 그 변명은 절대로 통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묵당 노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혹시 선생한테도 누가 무슨 무고를 할지 모르니,

 미리부터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계셔야 합니다.

하하하." 하고

말하는 바람에 김삿갓도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묵당 노인은 비록 먹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만

해학을 아는 풍류객이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먹 값을 치루고 나서, 작별 인사를 겸해 이런 말로 물어 보았다.

 

"황해도에서는 먹 뿐만 아니라 벼루도 좋은 것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 "

묵당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웬걸요.

벼루라면 뭐니뭐니 해도 중국에서 나오는 단계 벼루를 당할 것이 없지요.

 

벼루를 만들려면 돌이 좋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연석(硯石)은 질이 좋지 않아 좋은 벼루를 만들 수가 없는걸요.

황해도의 옹진석(甕津石)과 평안도의 위원석(渭原石)이 그런대로 쓸 만하기도 하지만,

단계석(端溪石)에 비하면 문제가 안 되는걸요."

 

 묵당 노인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는지,

서랍 속에서 조그만 벼루를 하나 꺼내 보이며,

 

"나는 벼루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것은 옹진돌로 내가 장난삼아 만들어 본 벼루입니다.

선생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으니,

마음에 드시거든 가지고 가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 ?

노인장께서 손수 만드신 이 벼루를 저에게 주시겠다고요 ? "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

마음에 드시거든 받아 주세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삿갓이 벼루를 살펴보니,

 가장자리로 매화꽃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 솜씨가 절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귀물을 저한테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장난삼아 만들어 본 것인데,

귀하기는 뭐가 귀합니까.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매화꽃을 새겼기에,

매월먹(梅月墨)과 짝을 만들고 싶어

이름을 매화연(梅花硯)이라고 지었지요."

 

 김삿갓은 벼루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요모조모로 감상해 보았다.

보면 볼수록 정답게 느껴져서,

 

"제가 이 벼루를 두고 시 한 수를 지어 보겠습니다."하고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써 보였다.

 

 腹坦受磨額凹池<복탄수마액요지>             배는 평평하고 이마는 움푹

拔乎凡品不책奇<발호범품불책기>  뛰어난 돌의 품질 예삿돌이 아니로다

濃硏每値工精曰<농연매정공정왈>글씨를 쓰는 날은 먹을 짙게 갈아 놓고

寵任常從興逸時<총임상종흥일시>        항상 즐겁고 흥겨웁게 만나리라

 

楮老敷容知漸變<저노부용지점변>종이에 글씨 써서 그 모습 변해 갈 때면

毛公笑舌見頻滋<모공소설견빈자>    뾰족한 붓끝을 자주자주 적시게 되리

元來四友相須力<원래사우상수력>   원래 문방사우는 서로 돕게 마련인 것

圓會文房似影隨<원회문방사영수> 필요할 때 모여 옴이 그림자와 같도다.

 

 묵당 노인이 시를 대뜸 알아보고 무릎을 치며 감격한다.

 

"물필유주 (物必有主 :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 라더니,

이 벼루가 오늘에야 제 주인을 만난 셈이구려.

하하하."

 

 김삿갓은 본디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얼마 전에 양상문이라는 사람이 건네준 사례금도

엽전 한 닢만을 정표로 받았을 뿐이고 ,

무하향 주막에서 전대를 백종원이란자에게 도둑을 맞았을 때에도

표현히 돌아서, 잊은바 있지 않던가.

 

그러나 이날 묵당 노인이 주는 선물만은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손수 만든 벼루를 선물로 주는 것은 서로간에 마음이 통한 증거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더 큰 기쁨은 장인 정신의 묵당 노인이라는 참사람을 발견 하였기 때문이다.

묵당 노인과 작별한 김삿갓은 이날도 산속을 한없이 걸었다.

 

 ...계속 2-53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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