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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의 삭개오집사

오토산 2020. 2. 23. 23:06

명부작성을 기념하고, 카톡방의 이기를 누리기 위해,

30년 전에 거창중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던 전성은 선생님의 특강을 듣고

 감동했던 청년이 가슴에 품고 있다가 쓴 실화를 띄웁니다.

 

삭개오 집사

 

30 대 중반의 한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치고 거창 읍네 거리를 쏘다녔다.

여인은 여자의 부끄러운 곳을 다 보이면서도, 얼굴엔 수심 하나 보이지 않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어느 날부터 그 여인은 거창 읍내의 명물이 되어버렸다.

심심하면 화제 거리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은근히 그 여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입가심으로 삼았다.

 

점잖은 사람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사람들은 "..허. 참.." 하고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았지만, 구잡스런 사내들은 오히려 즐기며,

천한 웃음을 흘리곤 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곤 여인에게 옷을 걸쳐 대충 가리고 그 녀를 집으로 데려갔는데

 바로 '삭개오' 집사였다.

 

삭개오 집사는 키가 매우 작았다. 뒤뚱 거리며 걷는 모습이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지만 아주 신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전해준 그의 속 이야기는 이러했다.

 

6.25 전쟁이 막 끝난 후 거창 읍내에는 아침마다 두 개의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로 오는 한 꼬마 거지가 나타났다.


삭풍이 부는 추운 겨울에 덜덜 떨면서 양 손에 두 개의 깡통을 들고

아침마다 나타났다.


동네 사람들은 이 불쌍한 전쟁 고아에게 저마다 인정과 동정을 베풀었는데,

 특히 거창교회의 김 장로와 그의 아내 박 권사는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다.

나이에 비해 키가 아주 작아 보이는 소년은 늘 두 개의 깡통을 들고 다녔다.

어느 날 김 장로는 이 거지 소년의 특이한 행동을 눈여겨 보았다.

 

처음엔 그저 깡통 하나론 부족해서 두 개를 가지고 다니는 거겠지 생각하였으나

 그게 아니었다.


 보통의 음식은 왼쪽에 담았으나 떡이나 고기 같은 맛있는 음식은 꼭 오른쪽에 담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김 장로는 어느 날 땅꼬마 거지의 뒤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땅꼬마 소년의 거처는 거창 읍내에서 조금 벗어난 냇가의 다리 밑이었다.


거적을 쳐서 허술하게 거처를 만들었는데, 뒤를 따라가 조금 열린 틈 사이로 보니

 놀라운 면이 펼쳐졌다.


 거기엔 그 꼬마보다 더 어린, 4~5 살쯤 돼 보이는 거지 아이가 하나 더 있었는데

동생이었다. 땅꼬마 거지는 어린 동생에게 동냥을 얻어다 먹이고 있었다.

 

아주 작은 꼬마가 자기보다 더 작은 어린 동생을 먹이는 모습에

 김 장로는 가슴이 찡한 감을 받았다.

한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짜 큰 감동은 조금 뒤에 있었다.

바로 두 개의 깡통이었다. 

  이 꼬마 거지는 맛 없는 깡통의 음식은 자기 자신이 먹고,

 맛 있는 깡통의 음식은 어린 동에게만 먹여 주는 것이었다..

 

한 번쯤은 자신도 맛 있는 깡통의 것을 먹겠지 하고 지켜봤지만,

단 한 숟갈도 자신은 먹지 않고 동생에게만 먹여 주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김 장로는 자기도 모르게 두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흘러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김 장로는 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였고,

이 후부터 동네 사람들은 꼬마 거지를 위해 음식 동냥을 두 가지로 준비해 주었다.


'이건 이쪽. 요건 저쪽..

'어떤 때는, '야야..맛있는 거 니도 묵어라.

 니 동생 줄 것은 따로 줄낑께. 걱정 말고..'

그리고 격려도 잊지 않았다.


"기특하데이.. 참말로 기특하데이.

 야야..배 고프면 언제든지 온나. 알았제이.

"어느 날 김 장로와 박 권사는 큰 결심을 하였다.

 이 꼬마 거지 형제를 데려다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하고,

자신의 가게에서 일을 돕도록 한 것이다.

 

김 장로는 당시 거창 읍내에서 "태백 산맥" 이라는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꼬마는 김 장로를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성장하여 결혼도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그는 신임을 받아,

김 장로는 그에게 가게 하나를 차려 독립시켜 주었다.


교회 성가대를 하기도 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별명을 하나 붙여 주었는데,

"삭개오 집사“였다.


성경에 나오는 키 작은 세리였던...

자기 동네에 오신 예수님을 보려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나무 위에 올라갔다던,

 그 세리장 삭개오의 이름을 딴 별명이었다.


삭개오 집사의 동생도 결혼하여 부산에서 살았다.

전쟁 고아였지만 두 형제는 부모를 잃은 아픔과 상처를 잊고,

둘 다 포목점을 운영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행복하기만 하던 삭개오 집사에게 큰 비극이 닥쳐왔다.

 당시는 전쟁 직후라 아직도 태백 산맥을 중심으로 소 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남아있던 북한 공산군 잔당과, 소위 빨치산이라고 부르는

남한 내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끝까지 저항하며 양민들을

약탈하거나 괴롭히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이었다.

'꽈광..꽝..' 포 소리가 나더니 국군과 빨치산 사이에 또 전투가 벌어졌다.

서로 간에 포격전을 시작한 것이다.

 집 안에 있던 삭개오 집사의 아내는 깜짝 놀라 집에서 튀어나와

바로 옆에 있는 보리 밭에 몸을 숨겼다.


이 때 포탄 한 발이 불행히도 삭개오 집사의 집에 떨어졌다.

"꽝.."소리와 함께 집은 박살이 나고, 집에 확 불이 붙었다.

그리곤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렸다.


이 장면을 보리 밭에 숨어서 지켜보던 그의 아내는 너무나 큰 충격에 정신을 잃었고,

 그 날로 부터 모든 기억을 잃고 백치가 되어버렸다.


삭개오 집사는 졸지에 집을 잃었고, 아내는 백치가 된 것이다.

그에게는 너무나 크고 엄청난시련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다니며 오직 신앙 하나로 이 모진 시련을 잘 이겨냈다.

 집은 다시 지었고, 백치가 된 아내는 전보다 더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돌봐 주었다.

그 여인의 얼굴이 그렇게 평화스러웠던 것은 바로 그 녀의 남편 삭개오 집사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 거창에 와 자취 방을 얻었을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고,

 얻은 자취 방이 바로 오 집사의 집이었다.


 나는 살면서 사람이 징그럽다고 느낀 것은 다름 아닌 내 아내에게서 였다.

결혼 3 년 차에 이미 우리는 파경에 이르고 있었다.

 중학교 영어 교사였던 나는 아내를 서울 처가에 남겨두고

홀로 거창중학교에 전근을 왔는데 사실은 전근이 아니라 도피였다.

 잠시라도 아내와 떨어져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별거를 시작한 것이었다.

 

아내를 만난 것은 서울의 영어 학원에서 였다.

당시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 학원의 수강생이었고, 미모의 부잣 집 외동 딸이었다.

영어 선생과 학생으로 만난 우리는 수업 시간에 뜨거운 눈길을 주고 받다가

 결국 사랑에 빠져버렸고, 결혼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서로를 당기고, 끌리는 아름다운 별들의 중력 같은 것이지만,

 결혼은 접착제의 귀찮은 끈적거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데

불과 3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매일 싸웠다. 

 성격이 서로 맞지 않았다.

아내는 외동딸로 자라서인지 자기중심적이고, 이해심이 없었다.

매사에 짜증이고, 불평이 많았다.

 

그 기분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소한일로도 충돌하곤 하던 우리는 이젠 다투고 화해 할

마지막 힘마저 남아있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저 없이 아내와 가정을 떠나와 버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사랑해 본 사람도 아내였고,

목을 졸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해 본 사람도 나의 아내였다.


따로 따로 각자를 뜯어보면 그렇게 사악하지 않았지만 서로 맞지 않아

고통스러워 하는 관계, 사소한 일이 세계 대전으로 치닫는 관계가

바로 부부라는 관계였다.

 언젠가 나는 성경 말씀을 읽다가 크게 은혜를 받고 위로를 받은 적이 있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천국에서는 부부로 살지 않는다..

천사 같이 형제 자매로 산다..

이 얼마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인가...

삭개오 집사는 바쁘게 장사를 하면서도..

점심 식사 후엔 꼭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가보았다.


 자신의 아내가 집에 잘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아내는 가끔 집을 나가 정처 없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거나,

옷을 훌훌 다 벗어버리고 동네 우물가에 나타나곤 하였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삭개오 집사에게 알려 주었고,

삭개오 집사는 얼른 달려와 자신의 아내를 집에 데리고 가곤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 때문에 긴 여행이나,

 단 하루라도 다른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온 적이 없었다.

부산에 사는 동생 집에 다녀올 때도 당일 치기로 다녀왔다.

아내 걱정 때문에 그럴 수가 없던 것이다.


삭개오 집사는 가끔씩 밤이 늦어지면 마당에 나와 

 "허흠..허흠" 큰 소리로 헛 기침을 하곤 하는데 바로 나에게 주는 사인이었다.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지금 제 아내를 목욕시키려고 합니다.

' 그는 마당에서 정성스레 백치 아내를 목욕도 시켜주고..

머리를 빗으로 빗어주기도 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사람들은 그에게 충고도 해봤다.


"백치 아내와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라고.."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는 아예 들을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아내와 전화로 큰 소리를 내며 다투었다.

늘 다투는 내용은 똑 같았다.

그날 밤 퇴근 길엔 술을 몽땅 마시고 들어왔다.

 당시 우리 부부 사이엔 자식도 없었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갈수록 출구가 없는 터널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어렵게 결단하였다. 

 

"이제 별거를 지나 이혼으로 가는 게 서로를 위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밤 늦게 술에 취해 비틀 거리며 집에 당도해 대문을 열었다.

 내 방에 들어 가려고 하는데 부엌에서 불 빛이 새어 나왔다.

다가가 문 틈으로 보니 삭개오집사가 부엌 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아마도 아내를 목욕시키려 목욕 물을 데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비틀 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술 기운에 몇 마디 말을 걸었다.


"삭개오 집사님 뭐하세요..?"

"예..물 데웁니다."

"아..네..아내 분 목욕시켜 드릴려구요..?"

"예.."

 

그런데 그 날 밤, 나는 술 기운에 그에게 해서는 안 될 말 하나를 뱉어 버렸다.

"그런데요..삭개오 집사님..내가 물어 볼게 하나 있습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무엇인지 말해보라는 눈치였는데 나는 무례하게 다짜고짜로 물었다.

 

"삭개오 집사님..

집사님은 왜 이혼하지 않고, 저런 아내하고 사십니까..?"

정말 두고 두고 후회스러웠던..

그러나 나의 삶을 완전히 뒤 바꿔버린 물음이었다.

삭개오 집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곤 잠시 후 계면 쩍은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부끄러운듯 한 마디를 내 뱉었다.


"겨..결혼식 날..

하나님 앞에서 한 그 놈의 서..서약 때문에.."

 

"뭐라고요..?

겨..결혼식 서..서약 때문이라고요..?" 나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불쌍하거나 사랑해서도 아니고..

서약 때문이라고요..?

'나는 술이 확 깨어 오는 것 같았다.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궁이 속에서 타오르는 불 꽃만 바라보았다.

그리곤 말없이 내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후 밖에서는 삭개오 집사가 그의 아내를 목욕시키는 물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결혼식 서약 때문이라..'나는 다음 날 일찍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거창으로 오늘 당장 내려와.."

"아니 무슨 일이야.. 이혼하자더니..“


아내는 까칠하게 전화를 받았지만 그 날 서울에서 내려왔고

우리는 언제냐 싶게 다시 결합했다.

내려온 아내는 까닭도 모르고 정복자처럼 굴었지만,

나는 그 날 이후 내 마음 속에 큰 결심 하나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 집 단칸 방에서 이제 딸 하나를 낳고

알콩달콩 가정이 무엇인지 깨달아 갈 무렵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급한 전화 한 통이 아내로부터 걸려왔다.

 

"여보..큰일났어요..빨리 좀 와보세요.."

"왜 무슨일인데..?"

"삭개오 집사님이 쓰러지셨어요. 연탄 가스 중독으로요.."

나는 부랴 부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는데 집에 도착하자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아내가 삭개오 집사의 안방으로 안내했다.


이미 삭개오 집사는 의식이 없었고,

의식이 없는 그를 나는 타고 왔던 택시에 싣고 병원 응급실로 갔지만 중태였다.

 

삭개오 집사는 벌써 며칠 째 의식이 깨어나지 않았다.

나와 아내,

그리고 교회 성도들은 정성스럽게 돌아가며 그를 돌봤고,

그의 백치 부인은 나의 아내가 먹이고 돌봐주었다.


그러나, 이를 어찌하랴..

입원한지 1 주일 만에 삭개오 집사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참으로 비극이었다.


 백치가 된 아내를 남겨두고 이 세상을 영영히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슬퍼하고 안타까워 하였다.

사실 거창읍민 거의 모두가 삭개오 집사 부부를 알고 있었다.


 삭개오 집사는 길 거리에선 이웃들에게 인사를 잘하고,

매사에 성실하던 선한 이웃이었고,

백치 아내에겐 그토록 헌신적이던 착한 남편이었다.

 

그의 싸늘한 시체를 안고 집에 돌아온 건 나였다.

장례를 치루기 위해 그를 집으로 모셔왔다.

키가 작고, 몸집이 작은 삭개오 집사의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두 손으로 안고

집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 때 그의 아내가 마루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밖에서부터 보였다.

 

백치 아내가 나의 손에 들려 있는 죽은 남편의 시체를 보자..

백치인 그 녀가 갑자기 어떤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흐..어흐..“

반가운 얼굴을 하며..

두 손을 저어대며.. 빨리 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시체를 마루에 올려놓자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시체를 여기 저기 만지기 시작하였다.

 

"어흐..어흐.."

옆에서 이를 보던 동네 사람들이 놀라 한 마디씩 하였다.


"아이고.저를 어쩌나..

쯔쯧..아무 것도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편이 죽은지는 아는 가베..“

모두의 눈 가에 물기가 촉촉히 적셨다.


삭개오 집사의 아내는 백치였다.

평상시 눈동자는 풀려 있었고..

거의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삭개오 집사의 장례는 거창교회의 온 성도들과 동네 주민들이 가슴 아파하며

슬퍼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그의 사연을 알고 있는 거창 읍내 사람들은 모두가 안타까이 여기며 슬퍼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사람들은 이제 삭개오 집사의 아내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아이구..남편은 좋은 곳에 갔겠지만..

이제 남은 백치 부인은 어떡하나.."

"친정에서 데려가겠지..뭐.."

"불쌍해서 우짜노."


그러나 모두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 녀에 대한 사람들의 염려를 그 녀 자신이 잘 알고 있기라도 하듯

장례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그 녀는 입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모든 음식 먹기를 거부하였고,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입에 강제로라도 먹이려 들면 이를 굳게 다물고 저항하며 거부하였다.

 

"으음..으음.."고개를 돌리며 뿌리치는

그 녀에게 아무 것도 도저히 먹일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열흘 째..아침에

나의 아내가 그 녀의 방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튀어 나왔다.

 

"여보..여보..빨리 이리 와보세요.."

나는 놀라 급히 그 녀의 안방으로 달려갔다.

그 녀는 잠자는 듯 누워 있었는데 호흡은 이미 정지되어 있었다.

남편을 보낸지 딱 열흘 만이었다.


 백치 부인은 남편의 뒤를 따라간 것이다.

그 녀의 죽은 얼굴은 평상시 살아있을 때와 달랐다.

참으로 근심이나 두려움 하나 없는 아주 평온한 얼굴이었고,

늘 보던 맹한 얼굴이 아니라 한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마치 우리 부부에게

"그 동안 고마웠어요.

저의 장례도 부탁해요.

 저는 사랑하는 남편의 뒤를 따라 갑니다.

 천국에서 다시뵈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그 녀의 장례도 치뤄 주었다.

그 날 거창 읍 내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희안한 것은 며칠간 한 겨울 강 추위가 극성을 부리다가

삭개오 집사의 백치 아내 장례식만큼은 이상하게 따뜻하였다.


계절은 바로 수 십년 전 땅꼬마 거지가

거창에 나타난 그 때와 같이 추운 한 겨울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눈보라 치고 맹렬히 추웠지만 그의 아내가 떠나던 날은

마치 봄 날 처럼 따뜻하였다.

 

그래서 누군가가 한 마디 하였다.

"참 날씨 좋데이~

아마 하늘에서 삭개오 집사가 지 각시를 불러 갈라꼬

 날씨를 이렇게 좋게 맹글었는가 보데이..“


한 두어 주간이 충격 속에 정신없이 지나갔다.

나는 장례가 끝난 후 그 집을 떠났다.

학교도 옮겨 서울로 왔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도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

 나의 아내는 불행히도 60이 넘어 중풍으로 쓰러졌다.

 

나의 인생도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아내는 결코 성품이 변하지 않았다.

늘 아내는 잔 소리로 나를 피곤하게 했고, 말에는 가시 돋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나는 삭개오 집사가 그날 밤 내 뱉었던 말을 떠올리곤 했다.

 

그가 그의 백치 아내를 목욕 시켜주는 장면도 떠 올렸다.

 그리고 그 옛날 거창에서 술 취해 귀가했던 그 어느 날 밤의 결심 이후로

 지금까지 난 내 아내와 단 한 번도 다투어 본 적이 없다.


이 글은 안동향교사회교육원 소학반 강사이신

권오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보내주신 글입니다.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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