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화순 적벽강을 찾은 김삿갓

오토산 2020. 4. 13. 08:10

■방랑시인 김삿갓 02-(149)


* 歸天 (귀천)

보은산은 남향이어서 산속이 유난히 따뜻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산속에서는 어느새 진달래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김삿갓은 진달래 꽃 봉오리가 터진 것을 발견하자,

오랫동안 몸 속에 잠재해 있던 방랑벽이 별안간 가슴이 설레도록 용솟음쳐 올라왔다.


(아아, 나도 모르게 어느새 대지에는 봄이 왔구나.

나도 이제는 방랑의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왔구나 ! )

김삿갓은 무의식중에 그런 충동이 느껴져, 진달래꽃을 그윽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안 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봄이 왔으니, 나도 이제는 길을 떠나야 하겠소이다."

그리고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작별시를 한 수 써 보였다.

...

먼 나그네 오랫동안 병을 빙자하여     遠客悠悠 任病身(원객유유 임병신)

댁에 폐를 끼치며 봄을 맞았소           君家蒙恩 且逢春(군가몽은 차봉춘)

봄이 와서 동서로 뿔뿔이 헤어지면      春來各自 東西去(춘래각자 동서거)

이곳 꽃 구경은 다른 사람과 할 것이오. 此地看花 是別人(차지간화 시별인)

...

김삿갓은 길 떠날 결심을 , 한 수의 시로써 안 진사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안 진사는 김삿갓의 시를 들여다 보고 크게 놀랐다.


"선생이 여기를 떠나시다니, 무슨 말씀이시오.

 건강이 쾌유하시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지금 길을 떠나시면 안 되시옵니다."안 진사는 기를 쓰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한번 결심한 이상, 누가 무슨 소리를 하거나

 그냥 눌러 있을 김삿갓은 아니었다.


"나는 워낙 방랑 생활을 끝없이 계속하다가,

언젠가는 길에서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타고난 운명대로 살아가려는 나를 굳이 붙잡지 말아 주세요."

김삿갓의 결심이 이렇다 보니, 안 진사는

 더 이상 김삿갓을 붙잡을 수가 없다고 느끼며,

"길을 떠나신다면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 " 하고 물었다.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웃어 보이며,

 "내가 언제는 갈 곳을 미리 정해 놓고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던가요.

봄을 따라 북상하면서,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보림사(寶林寺)와

용천사(龍泉寺)도 구경하고 싶고, 마음이 내키면 화순(和順) 동복(同福)에 있는

 적벽강(赤壁江)에도 한번 들러 볼 생각입니다."

안 진사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마침 잘되셨습니다.

 <동복>에는 신석우(申錫愚)라는 막역한 친구가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편지를 써드릴 테니, 동복에 가시거든 그 친구를 꼭 찾아 주십시오.

그 친구라면 선생에게 모든 편의를 정성껏 보아 드릴 것입니다."

이리하여 김삿갓은 신석우라는 사람에게 전해 줄 소개 편지 한 장만 받아 가지고,

기어코 강진 고을을 떠나고야 말았다.


김삿갓은 몸으로 봄을 느끼자 고집스럽게 방랑의 길에 오르기는 했으나,

먼 길을 걷기에는 몸이 너무도 쇠약해 있었다.

그러기에 강진에서 용천사를 거쳐 보림사까지

 2백 리도 채 못되는 거리를 보름 만에야 가까스로 도착하였다.


김삿갓이 진작부터 보고 싶었던 가지산 속의 명찰, 보림사를 구경하고

풀밭에 누워 피로를 풀며 자기 자신의 신세를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

잘살고 못사는것은 천명이라 마음대로 안되는것 窮達在天登豈易求 궁달재천등가역구)

나는 내 멋대로 자유롭게 살아왔노라 從吾所好 任悠悠 (종오소호 임유유 )

고향 하늘 바라보니 천리길 아득한데 家鄕北望 雲千里 (가향북망 운천리 )

남쪽에 헤매는 신세 물거품과 같구나. 身勢南遊 海一구 (신세남유 해일구)


술잔을 비로 삼아 시름을 쓸어 내고  掃去愁城 盃作추 (소거수성 배작추)

달을 낚시로 삼아 시를 낚아 오면서  釣來詩句 月爲鉤 (조래시구 월위구)

보림사 용천사를 두루 구경하고 나니 寶林看盡 龍泉又 (보림간진 용천우)

내 마음 욕심없이 스님과 다름없네.  物外閑跡 共比丘 (물외한적 공비구)

...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후, 화순 동복으로 신석우를 찾아갔을 때에는,

김삿갓은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정도로 극히 쇠약해 있었다.

50 고개를 바라보는 시골 선비 신석우는 안 진사의 소개 편지를 받아 보고,

김삿갓을 무척이나 측은히 여기며 말했다.


"선생께서 강진 고을에 와 계시다는 소식은 풍문으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집에까지 왕림해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행히 저희 집에는 조용한 초당이 있으니,

건강을 회복하실 때까지 푹 쉬시기 바랍니다."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주인 양반께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 "


"동복에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적벽강(赤壁江)과

같은 강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강은 이곳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 "


"적벽강은 여기서 불과 5 리 안쪽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선생이 적벽강을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조만간 따뜻한 날을 택해 제가 직접 모시고 가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적벽강을 꼭 한번 보고 싶어요.

그러나 나 혼자서 구경하고 싶지, 누구하고 함께 보고 싶지는 않아요.

매우 외람된 부탁이지만, 내일 아침에 저에게 배를

 한 척 빌려 주실 수 없으실까요 ? "

선비 신석우는 김삿갓의 무리한 부탁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불편하신 몸으로 배를 어떻게 혼자 타시옵니까.

적벽강은 내일중으로 기어이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직접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힘차게 내저었다.


"좋은 경치를 내 마음대로 즐기려면

 옆에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옛날 시에,

<꽃은 웃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花笑聲未聽)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보기 어렵다.>(鳥啼淚難看)

이라는 시가 있지요.


이처럼 홀로 ,자연과 동화된 시인은

꽃의 웃음과 새의 울음을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 합니다.

부디 그러한 느낌을 즐길 수 있도록 나에게 배 한 척만 알선해 주세요."

김삿갓이 이렇게도 고집을 부리니, 신석우로서는 더 이상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날은 적벽강 나루터까지 김삿갓을 모시고 가서,

혼자만 배를 타게 해주었다.

배는 조그만 놀잇배였다.

물 위에 둥둥 떠도는 배는 노를 젓지 않아도

흐름을 따라 조금씩 적벽강 아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솔솔 불어오는 강바람에 상쾌감을 느끼며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그윽히 바라보며, 여기가 바로 선경이 아닌가 싶었다.


이러한 천장지활 (天長地활)한 대자연 속에 일엽편주를 띄워 놓고

삼라만상을 허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제 부터는 밥을 빌어먹기 위해 남의 집 대문을 두두릴 필요도 없고,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헤매고 돌아다닐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아아, 여기가 바로 나의 안식처였구나 ! )

....

김삿갓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배 위에 편히 누워 저 멀리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넓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한가롭게 떠돌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어디선가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옛 시 한수를 연상하였다.

.....

구름은 넓고 넓은 데를 어디로 가는고 (雲山造造 何處歸 /운산조조 하처귀)

하늘가 아득히 난새소리 들려 오네. (但聞空際 綵鸞聲 /단문공제 채난성)

하얀 구름을 그윽히 바라보고 있자니, 눈꺼풀이 무겁게 감겨 왔다.

이제는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에 겨울 정도로 기진맥진했던 것이다.

눈을 감으니 난새 소리가 한결 분명하게 들려오는 것 같앗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음에 눈에는 하얀 구름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 보였다.

(아아, 나의 목숨은 저 하늘가에 떠 있는 한 조각 구름과 같은 것,

저 구름이 사라질 때면,나도 이 세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겠지....)


점점 몽롱해 오는 의식 속에서 문득 <귀천(歸天)>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귀천>이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이 죽는다는 소리다.

그러나 김삿갓은 <귀천>이라는 말을 떠올린 순간,

마음이 그렇게도 편안할 수가 없었다.

 

...계속 150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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