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100년의 사람들(이기붕)

오토산 2021. 4. 22. 08:23

?️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이기붕>
해마다 4월이 되고 라일락이 필 때면 나는 4.19를 생각하고 그때 목숨을 잃은 185명을 생각하며

수유리에 묻혀 있는 최정규와 고순자를 그리워하게 된다.

최정규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의예과에 다니고 있었고

고순자는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미대에 다니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왜 그런지 두 학생들의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이때가 되면 만송 이기붕과 그의 가족들의 참혹한 죽음이 연상되어 내 마음은 무척 괴롭다.

그 집안 식구들과 가까이 지낸 적은 없지만 만송은 물론 그의 부인 박마리아, 아들 강석과 강욱,

그리고 이화여중에 다니다 심장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그의 딸 강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강석은 육군사관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내가 가르칠 기회는 없었지만

강욱은 연세대에 다녔고 강희는 내가 대학교회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 내 반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잊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이기붕은 조선조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효령대군의 27대손이고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예조판서이던 이희정이었다.

그는 1896년에 태어나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퇴하였고

그 뒤에 선교사 무스의 주선으로 미국 아이오와주의 어느 호텔에서 일을 하면서

1923년 주립대학인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뒤에는 뉴욕에 가서 허정등과 함께〈삼일신보〉간행에 참여하다가 1934년에야 귀국하였다.

귀국한 뒤에 사업에 손을 댔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송이 빛을 보게 되는 날이 드디어 왔다.

그는 미군정청에 들어가 통역으로 활약하였고

해방과 더불어 이승만에게 발탁되어 그의 비서로 취직하였다.

 

이미 기독교청년회와 적십자사 이사로 사회적 발판을 마련한 그는

정부가 수립된 1948년부터 대통령의 비서로 일하면서

이승만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은 측근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봐도 그는 이승만 정권 2인자였다.

이듬해에는 서울시장에 임명되었고

전쟁 중이던 1951년 국방부장관에 취임 속칭〈방위군 사건을 잘 수습 하였다.

그 뒤로는 대통령 이승만의 손발이 되어 그를 보필하였으므로

우남은 만송 없이는 정치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승만의 그 사랑과 신뢰 때문에 그의 인생은 이승만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이 되었고

이승만이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이기붕의 맏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원한다는 뜻을 비쳤을 때

박마리아가 무척 망설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토록 헌신적인 보필자를 박정희도 가져 본 적이 없다.
이 나라에 어떤 대통령도 모시는 분을 위해서

늘 목숨을 버릴 용의가 있는 그런 충신을 가까이 거느리지 못했다.

3.15 부정 선거에 뒤이어 4.19가 터지고 1960년 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에 당선 되었지만

이기붕은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그 해 3월의 어느 날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한강변의 낚시터에 내가 갔던 적이 있다.

그 때 이기붕은 건강이 아주 나빠서 비서의 등에 업혀서야 화장실에도 가는 처지인 것을 보고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왜 저런 건강 상태에서 부통령이 되려고 선거에 입후보 하였을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유당정권은 무너지고 그에게 굽실거리던 군부대 장성들을 찾아갔으나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때 일가 집단 자살 결심을 이기붕이 먼저 굳혔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4월 28일 새벽 5시 경무대 관사 36호실에 네 식구를 모두 모이게 한 뒤 강석에게

“나부터 먼저 쏴라” 그렇게 당부 하였을 것이다.

그 다음은 그 두 아들의 어머니, 박마리아와 그다음 동생 강욱

그리고 마지막으로 맏아들은 자기 머리에 권총을 되고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이기붕은 이승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깨끗하게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 일가의 무덤이 망우리에 마련되어 있었고 강석이를 사랑한다고 알려졌던 한 젊은 여성이

그 무덤가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누군가가 목격하였다고 전해주었다.

3.15 부정 선거 관련되었다고 여겨지는 자유당의 모든 인사들이 재판을 받고

상당수가 옥중 생활을 해야 했고 그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판단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서대문감옥에서 사형 당했다.

 

최인규는 부정선거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서대문형무소 미루나무 가까이 마련되어 있었던 교수대에서 미련 없이 떠났다고

내게 전하여준 교도관이 있었다.

그 교도관의 말에 의하면 최인규는 감방에서 매일 성서만 읽었고

단 한 번도 교도관들에게 험한 표정을 보여 준 적이 없고 그들에게 나쁜 말을 던진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최인규의 마지막은 다른 어떤 사형수보다도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돌이켜보면 이승만에게는 이기붕이 있었고 최인규가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최후는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한시대가 그렇게 하여 저물었고 오늘 또 다시 험악한 정치적 기류가 감돌고 있다.

오늘의 이 불행한 상황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며, 제 2의 이기붕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의심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나를 괴롭힌 많은 정권의 지도자들을 되새겨 보면서
T. S. 엘리엇의 “가장 잔인한 달 4월”에 이기붕과 그의 가족들의 비극을 되새겨 본다.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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