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남산골 김국수

오토산 2021. 8. 30. 19:52

#조주청의사랑방야화
(115)남산골 김국수

 

한양 남산골에 국수가 살고 있었다.
당대의 세도가 김조순의 제종이자 천석꾼 부자인 김대감은

바둑에 관한 한 이길 자가 없어 사람들은 그를 국수라 불렀다.

그의 사랑방엔 천년 묵은 주목으로 만든 통바둑판에

상아로 만든 흰 돌과 흑요석으로 만든 검은 돌이 비치돼 있어

언제나 바둑을 두러 오는 기객들이 줄을 이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도 중국의 명국 기보를 펼치며 바둑 공부에 매달렸다.

김국수는 바둑을 이기고 나면 천하를 얻은 양 기뻐해,

바둑 이기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적지 않은 내기를 걸어 짭짤하게 재미를 보기도 한다.

강원도의 바둑신(神)이라는 오생원은 산삼 열뿌리를 김국수에게 빼앗겼고,

함경도 최참봉은 금 서른 돈을 잃었다.

녹음이 어우러진 초여름 어느 날,

백면서생 젊은이가 찾아와 김대감과 바둑 한수를 겨루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나는 민바둑은 안 두네.

조그만 거라도 내기를 걸어야 하네.”

“제가 타고 온 말과

말고삐를 잡고 온 하인을 걸겠습니다.”

젊은이는 서슴없이 말했고,

김국수는 남산골이 떠나갈 듯 껄껄 웃었다.

‘딱딱.’ 정적을 깨는 건 바둑돌 놓는 소리뿐이다.

젊은이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바둑돌 놓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결국 김국수의 호탕한 웃음으로 판이 끝났다.

젊은이는 목례를 올리고 싹싹하게 말과 하인을 넘기고 떠났다.
이레 후 그 젊은이가 또 찾아왔다. 김국수는 빙그레 웃었다.

“이번에 자네가 지면

무엇을 내놓을 건가?”

 

“제가 지면 제가 대감의 하인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대감이 지시면 지난번에 빼앗긴 말과 하인을 되돌려 주십시오.”
젊은이의 당돌한 말에 김국수는

“그거 나쁘지 않은 내기네”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놀러 왔던 국수의 친구들이 빙 둘러 병풍 치고

딱딱 바둑돌이 떨어질 적마다 웅성거렸다.

판세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김국수가 좌 하변의 전투에서 젊은이의 흑돌 여섯점을 포위하고

입이 벌어졌는데 수죄기를 하니 일일이 백돌을 놓고 흑돌을 잡았지만

어느새 바깥은 새까맣게 흑돌 철벽이 쌓인 것이다.

외세를 등에 업고 젊은이가 몰아붙이자

김국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결국 돌을 거뒀다.


“다시 한판 두세.

내가 지면 천냥을,

자네는 말과 하인을 다시 걸게.”
그 말에 아랑곳없이 젊은이는 일어섰다.


“진정한 고수는 내기를 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소인이 진 것은 이레 동안 한양에서 볼일 보는 데

거추장스러운 말과 하인을 대감댁에 맡겨 두기 위함이었습니다.”

대감이 어안이 벙벙해 젊은이를 쳐다보자

젊은이는 하던 말을 이어갔다.

“대감의 바둑은 저에게 여섯점 접바둑입니다.

그리고 내기 바둑에서 대감에게 지는 사람들은

모두가 대감에게 줄을 놓아 한자리해 보려는 아첨꾼들입니다.”
김대감은 작은 그릇이 아니다.

“내가 귀인을 만났도다.

여봐라,

바둑판과 바둑돌을 비단보자기에 싸서 저 젊은이의 말 등에 실으렷다.”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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