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처서(處暑)와 처사(處士), 그리고 벼슬

오토산 2021. 10. 19. 19:54

▷처서(處暑)와 처사(處士), 그리고 벼슬◁

"처서 무렵에 철새들은 어두워지는 바다에서

울음으로 서로를 불러서 발진(發進)의 대오를 편성했다.

 

새들의 울음소리는

속이 비어 있었고 높이 떠서 멀리 나아갔는데,

갯벌이 비어서 아무 데도 닿지 않았다.

새들의 대오는 새벽 밀물에 반도를 이륙해서

대륙의 연안으로 북동진했다."

작가 김훈(1048~)은 소설 『공무도하가』(2009)에서

처서 무렵 철새의 이동을 이렇게 묘사했다(48쪽).

 

더위가 물러가는 한반도에서

철새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북쪽의 대륙으로 이동한다.

새들도 인간의 절기에 맞춰 그들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인간 역시 처서는 다가오는 겨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夕雨收殘暑 秋風進早涼 新衣誰與着 舊褐獨餘藏
蟬咽頻移樹 蛩音稍近床 今宵垂葉露 應帶月斜光

저녁 비에 남은 더위 가시고/가을바람 일찍 서늘해지네/

새 옷은 누가 주어 입으리오/옛 털옷 홀로 간직해 두었네/

매미 울음 자주 나무를 옮기고/벌레 소리 점차 침상에 다가오네/

오늘 밤 잎에 맺힌 이슬에/응당 비낀 달빛 비추리라 
-東州 李敏求(동주 이민구:1589~1670) ‘처서날’

오늘은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다. 

여기서 處는 물리친다는 뜻으로, 더위를 처치(處置)하는 것이다.

다음은 옛 문헌에 나오는 이에 대한 고찰이다.

"처서는 세 음(陰)이 내려와 땅 위가 모두 음이다. 

무더위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늘 陽을 보호하여 이름을 세우기 때문에

 음을 가지고 무더위를 물리친다고 말하지 않고

 陽이 해(害)를 피한다는 뜻에서 處暑라고 말하는데, 

 

처사(處士)라는 용법과 같고 陽이 스스로 들어가 쉰다는 뜻이다

(處暑 三陰降而地上皆陰 暑入處於地中也 每護陽以立名 

故不以陰攘暑爲言 而以陽之避害爲意曰處暑

 猶言處士也 謂陽之自入處也) " /

存齋 魏伯珪(존재 위백규:1727~98) 권12 雜著 ‘事物’

위백규는 처서를 풀이하면서‘處士’를 끌어 들었다.

둘 다 陽이 물러나 쉬는 것을 공통점으로 봤다.

알다시피 處士는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지칭한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출사(出仕) 어명 일곱 번을 거절한 처사의 상징이다.

 

위백규는

‘陽을 피한다는 것’을 벼슬을 사직하여 자신을 지키는 명철보신(明哲保身)으로 봤다.

선생은 벼슬이 지닌 양날의 칼을 인지했고, 진퇴의 처신을 늘 가슴에 지녔다.

오죽했으면 선인(先人)들은 벼슬길을 ‘큰 파도가 이는 바다’ 즉 ‘환해(宦海)’로 표현했을까?

茫茫宦海無津涯
험난한 바다처럼 가없이 망망한 벼슬길 /李穀(이곡)
宦海波濤深莫測 幾人安穩得收帆
환해 파도 깊이는 측량할 수 없구나/온전하게 배를 거둔 자 몇 사람인가. /

陸以湉(육이첨ㆍ淸) 『冷廬雜識냉려잡지』

마지막 구절은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벼슬, 즉 부귀가 주는 달콤함에 허우적대다보면 중심을 잃고 추락한다.

다음 시가 그것을 말해준다.

一朝富貴還自恣 長檠高張照珠翠
吁嗟世事無不然 牆角君看短檠棄

하루아침에 부귀를 얻으면 도리어 방자해져서/

긴 등잔대 높이 걸어 미인의 머리를 비추게 하네/

아 세상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나니/

담장 모퉁이에 버려진 짧은 등잔대를 그대여 보지 않았는가.

-韓愈(한유ㆍ唐:768~824) ‘短燈檠歌’

여기서 ‘긴 등잔대’는 벼슬한 후 새로 산 비싼 등잔대를,

‘짧은 등잔대’는 이름 없던 시절 공부에 몰두하던 보잘 것 없는 낡은 등잔대를 말한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그 자신보다 지위가 주는 환경 때문이다.

선비가 부단히 자신을 성찰하고 수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파도의 격랑을 두려워했고 삼갔다.

 

'처서엔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 라 하고,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을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처서에 비 내리면 독안의 쌀이 줄어든다'고 한다. 

가을의 기운이 올 때 햇살이 가득차야 벼가 잘 자라기 때문이다.

다음 시는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는 때를 잘 읊었다.

大暑去酷吏 淸風來故人
무더위는 혹독한 관리 떠나 듯 물러가고,

맑은 바람은 옛 친구 찾아오듯 불어오네. /

杜牧(두목ㆍ唐) ‘早秋’

무더위를 탐관오리,

맑은 바람을 옛 친구에 비유해 절묘한 대구를 이루었다.

 

처서를 맞이하여 여름내 나쁜 기운은 물러가고

가을 문턱에 맑은 바람타고 청신(淸新)한 기운의 선사를 빌어본다.

아울러 자신만이 삼가는 陽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도 의미있겠다.

 

바로 현재의 환해(宦海:높은 벼슬)에 계신 분들이

주의깊게 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sns에서>

'인문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들 이러십니까?  (0) 2021.11.04
타면자건 (唾面自乾)  (0) 2021.10.27
태음력기준  (0) 2021.06.26
21년 영양한시백일장 차상작  (0) 2021.06.12
제13회 도산별과 장원작  (0) 2021.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