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사라진 옥관자

오토산 2022. 1. 23. 08:11

김삿갓 37 -
[사라진 옥관자]

원산을 거쳐 함흥으로 가는 길도 산길로 이어졌는데

날 또한 저물자 까마귀조차 극성스럽게 울부짖으며
자기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신안 마을 입구에서 만난 동리 사람을 붙잡고 물어 보았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황 별감 댁이 어디오?"

김삿갓이 이곳에 이르기 전에

바로 이곳 신안 마을에 황 별감 댁은 길가는 나그네를

소홀히 내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황 별감 댁은

저기 산 밑에 있는 기와집이라오."

 

동리사람은 팔을 들어 가르쳐준다.
황 별감 집은 산 밑에 있는 제법 큰 기와집이었다.
김삿갓이 문앞에 이르러  주인을 부르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왔다.

첫눈에 무척 인자해 보이는 후덕한 노인이었다.
김삿갓은 인사를 정중히 올리고 나서,

 

"지나는 과객이옵니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찾아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황 별감은 아주 민망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모처럼 내집을 찾아온 손님을 내쫒는 것 같아 미안하오.

우리 집에서는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손주 며느리가 몸을 풀어서

손님을 재워 드릴 수가 없구료. 

그러나 저녁만은 대접할 수 있으니 바깥 사랑에서 저녁만 드시고
잠자리는 다른 곳에서 구해 보도록 하시오."

그제야 깨닫고 보니

황 별감 댁 손주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는지 대문간에

빨간 고추가 달려 있던 인줄이 걸려 있었다.

"저녁만이라도 주시겠다니 고마운 말씀 입니다.

그러나 댁에 산모가 계시다면 저는 다른 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김삿갓은 발길을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황 별감은  부랴부랴 옷소매를 붙잡으며 만류한다.

"산모가 있기로서니

바깥 사랑채에서 저녁을 자시는 것 쯤이야 무슨 상관 있겠소.

잠자리까지 드리지는 못할 망정,

내집을 찾아 온 손님을 저녁대접도 하지 않고 돌아서게 하는 것은

인사가 아니니 들어 갑시다."

김삿갓은 황 별감의 호의가 하도 고마워,
저녁밥을 그 댁에서 얻어 먹기로 하였다.

이윽고 바깥 사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반찬도 여러 가지로 나와,
이건 가족들이 먹는 식탁이지,

낮선 과객에게 한 덩이 던져주는 밥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 별감조차 밥상머리에 지키고 앉아

많이 먹으라고 연신 권하는 것이 아닌가 ..?

"젊은 양반이 어디를 가는 길인데

길이 이렇게 늦으셨소?"

"네,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멀리 두만강까지 관북천리를 돌아 보고자 합니다."

"허어,

금강산 구경을 하셨다고요?
금강산이 그렇게나 좋다는데
나는 금강산 구경을 한 번도 못했다오."

"여기서 금강산이 그리 멀지도 않은데 한 번 다녀오시지요?
천하의 절경이 그곳에 모두 있습디다."

"내 나이 이미 칠십이라오.
이제 무슨 기력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겠소?
어디, 좋은 구경한 이야기나 한 번 들어 봅시다."

김삿갓은 황 별감의 말을 듣자,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진해 천하의 명산을 구경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은 아직 젊어 천하를 두루 유람할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밥상을 물린 김삿갓은 다녀온 금강산의 절경을 황 별감에게 들려 주면서
당시 자신이 지었던 절경을 담은 시를 읊어드렸다.

조등입석朝登立石 운생족雲生足"
아침에 바위를 밟고 서면 발아래 구름이 일고

모음황천暮飮黃泉 월괘순月掛脣
저녁에 황천물을 마시면 달이 입술에 걸린다.

수작은저水作銀杵 춘색벽春色壁
물은 은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운위옥척雲爲玉尺 도청산度靑山
구름은 옥자가 되어 청산을 가늠터라.

송송백백松松白白 암암회岩岩廻
소나무 잣나무 바위는 돌고돌아.

수수산산水水山山 처처기處處奇
물도 산도 곳곳이 기묘하도다.

"허어,

그렇게나 좋던가요 ? "

 

"제가 아직 죽어 무릉도원은 가본 바 없으나 천상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지상에는 금강산이 있을 것 입니다."

김삿갓은 그가  읊은 싯귀 한 소절 마다
감탄을 내지르는 황 별감에게 이 같이 말을 해 주었다.
삿갓은 밤이 으슥해서야  그 집을 나왔다.

황 별감이 일러 주는대로 동구밖에 있는 서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황 별감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문득 생각이 난 듯 김삿갓의 손을 잡으며 말을 했다.

"서당에서는 잠만 자고 내일 아침 식사는 우리 집에 와서 드시오.

내 집에 오신 손님을 쫒아내는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구료."

김삿갓은 남의 신세를 수없이 지며 이곳에 이르렀지만
황 별감처럼 따듯한 인정을 만나 보기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장께서 저를 쫒아내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저녁을 융숭하게 대접받은 것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사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아무리 산모가 있기로 바깥 사랑에서 아침을 자시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겠소?
조금도 거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침에 꼭 와주시오, 내가 기다리겠소."

"이렇듯 고마운 말씀을 하시니 내

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김삿갓은 손을 잡아 흔들며
간청하다시피 하는 황 별감의 요청에 그만 감격하여 

이렇듯 아침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고마운 노인이시군."

그리고 서당을 찾아 가려니 길이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황 별감 집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길을 찾다 보니  연자방앗간이 보였다.
그 연자방앗간 옆에는 광인듯 싶은 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올 바에야
구태여 서당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

김삿갓은 문득 그 같은 생각이 들자 방문을 열어 보았다.
방에는 새로 짠 듯한 빈 가마니들이 쌓여 있어서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였다.

김삿갓은 서슴치 않고 광 속으로 들어가
바닥에 깔린 볓짚 돗자리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웠다.

황 별감 집에서 밥도 든든히 먹었겠다.
잘 곳도 마련이 되었겠다.

아쉽다면 술 한잔이 없을 뿐인데 ..

오늘도 운이 좋아 하루를 힘들지 않게 보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아침이 환히 밝았다.

김삿갓은 연자방앗간 광 속에서 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부랴부랴 옷을 추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침을 얻어 먹으려고 황 별감 집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일러보여 황 별감 댁 바깥마당 부근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그때, 황 별감 집 대문이 열리며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손에는 구슬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얘야,

너 이 댁 아이냐?"

어린아이는 김삿갓의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하고

구슬을 가지고 이리저리 던지며 혼자서 장난을 치며 놀다가

별안간 

"어마 !

내 구슬 어디갔어 ? " 하고

울상을 지으며 대문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어린아이가 잃어버린 구슬을

찾아  주려고 이곳저곳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구슬은 눈에 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