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쾌락 체감의 법칙

오토산 2022. 3. 17. 05:46

# 사랑방이야기(313) 쾌락 체감의 법칙


보부상 박 서방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문중산 응달의 초가삼간에 바글바글 처자식 넣어두고 무릎이 닳도록 걷고 또 걸었다.
보부상들은 고된 하루를 접고 주막에 들어가면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술판에 노름판에 들병이와 해우 판도 벌리건만,
박 서방은 대폿술 딱 한잔 마시고선 객방 구석에서 쪼그리고 잠만 잤다.
그렇게 소태처럼 짜게 모은 돈으로 겨울이면 한 뙈기 두 뙈기 논밭을 사 모았다.
박 서방 마누라도 지독한 또순이로 남의 큰일 집 일손을 도와주고 쉰밥도 가져와 죽을 쒀 먹었다.
회갑이 넘도록 산 넘고 물 건넌 박 서방은 기어코 무릎이 뭉개져 앉은뱅이가 됐지만 그 대신 땅 부자가 됐다.
딸 넷을 시집보내고 아들 하나는 장가가서 농사꾼이 됐다.


아들 박 생원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뼈저리게 겪어봤기에 살림살이가 헐겁지 않았다.
천석꾼 부자는 아니어도 몇 백 석은 하는 중농으로, 머슴 하나와 논밭의 반을 직접 짓고 나머지 반은 소작을 줬다.
박 생원은 부전자전, 제 아버지 못지않게 구두쇠였다.
입동이 지나면 두꺼비가 파리 잡아먹듯이 팔려고 내놓은 논밭을 널름널름 사 모았다.
곳간에 볏섬이 꽉꽉 차도 상 위의 밥그릇엔 흰 쌀밥보다 보리밥이 많았다.
박 생원은 천석꾼 부자가 됐지만 제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나갈 줄 몰랐다.


박 씨 집안은 아들 손이 귀해 박 생원도 딸만 다섯 낳다가 아들 하나를 얻어 ‘금봉’이라 이름 짓고
금이야 옥이야 온 식구들이 떠받들었다.
서당에 오갈 때도 남색 비단에 금박을 박은 전복을 입고 복건을 쓰고 하인을 데리고 다녔다.
금봉이 주머니엔 짤랑짤랑 엽전이 그득해 학동들이 그를 졸졸 따라다녔고,
서당을 마치면 저잣거리로 나가 온갖 주전부리를 다했다.


금봉이 열네 살 때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부엌데기 과부가 헛구역질해 집안의 어느 하인 놈이 저지레를 했는지 뒤집어봤더니 씨 뿌린 놈은 금봉이었다.
밤에 놀라게 하고 산에 가서 굴러 떨어뜨리고 숙지황을 먹여도 과부 배 속의 태아는 떨어지지 않아
돈 보따리를 안겨서 내쫓아버리고 부랴부랴 금봉의 혼처를 찾았다.


금봉은 강 건너 오 진사네 둘째딸과 혼례를 치렀다.
새색시 배가 불러오자 새신랑 금봉은 집을 겉돌았다.
저잣거리 건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너비아니집에서 소주를 마시던 입맛이 시들해지자 기생집에 들어가 춤사위 장구 장단에 청주를 마셨다.


배가 동산만 한 새색시 옆에서 자는 날보다 늙은 기생 품에 안겨 자는 날이 많았다.
금봉은 새파란 아이기생보다 서른이 넘어 능수능란한 행수기생을 좋아했다.
금봉이 열여덟 살이 됐을 때 새색시는 딸 둘을 낳았고,
아버지 박 생원은 병석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아 곳간 열쇠는 자연스럽게 금봉이 손에 넘어갔다.
명실 공히 박 씨 집안의 증손이자 가장으로 집안 살림을 잘해보자고 집사를 불러 치부책도 따져보고
촛불 아래서 책도 펼쳐보건만 귀에 들리는 건 두둥둥 장구 소리요, 아른거리는 건 행수기생의 젖무덤이다.
몽유병자처럼 자신도 모르게 금봉의 발걸음은 밤꽃들이 까르르 버선발로 뛰어나와 그의 사지를 끌어안는 기생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행수기생에게 싫증났다.
퍼질러 자는 얼굴을 자세히 보니 눈 밑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아이기생 머리를 얹어줬다.
천석꾼 부자 금봉이네 곳간은 화수분이다.
퍼내도 퍼내도 자꾸 채워진다.
행수기생에게 던져준 건 곳간에 표도 나지 않았고, 아이기생 머리 값은 약간 줄었지만 금방 보충됐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양귀비 같은 아이기생을 매일 밤 바꿔 자는 것도 시들해졌다.
유부녀, 주인 있는 여자와 간통하는 것도 일이년, 술과 계집 자체에 감흥이 없어진 것이다.


새롭게 금봉을 짜릿하게 만드는 일, 그것은 노름이었다.
새로운 세상, 골패판에 끼어들었다.
패를 받아 들고 하나씩 뒤집을 때의 그 흥분은 유부녀 고쟁이 벗길 때 가슴 뛰는 그 짜릿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떤 날 밤엔 몇 백 냥이 들어왔다가 재수 옴 붙은 날엔 몇 백 냥이 나갔다.
그런데 몇 백 냥은 성에 차지 않았다.
마작판으로 들어갔다.
하룻밤에 논문서 밭문서가 왔다 갔다 했다.
동동동 서서서 펑을 때릴 때의 그 감격은 부모상이 나도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새벽닭이 울 때 깜박 졸았는데 논 열두 마지기가 날아갔다.
노름판을 나와 서리가 앉는 밤거리를 지나 김이 하얗게 나오는 주막으로 들어갔다.
노름판에서 잔심부름하며 구겨져 있던 영감이 따라서 들어왔다.
“박 대인, 나는 문전옥답 삼백 마지기를 마작판에 처박았소.
패인은 체력이요!”
그 영감으로부터 아편을 사 먹기 시작했다.
밤새 노름해도 허리가 꼿꼿했고 첩과 잠자리를 해도 하룻밤에 세 번이나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박 씨네는 삼대 만에 망해갔다.


그 좋던 살림 다 털어버리고 몸은 망가져 삼십대 중반에 벌써 노인 몰골이 된 금봉을 보고 탁발 노스님이
“끌끌끌∼ 쾌락 체감의 법칙도 모르는 놈!”이라며 한마디 던졌다.

'시링빙야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하 호걸 장비  (0) 2022.04.07
대감과 종년  (0) 2022.03.20
양자  (0) 2022.03.13
음각치  (0) 2022.03.13
하늘의 뜻  (0) 2022.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