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천하 호걸 장비

오토산 2022. 4. 7. 07:04

 사랑방이야기(323)

천하 호걸 장비

 

잠자던 마누라가 대문이 부서질 듯 쾅쾅거리는 소리에

종종걸음으로 눈발이 휘날리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자,

장비가 술 냄새를 풍기며 술집 작부를 옆에 끼고 와 안방 아랫목을 차지했다.

 

마누라 순덕이는 포대기에 남매를 싸안고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그 앞에서 쪼그리고 밤을 새웠다.

 

장비는 육척이 넘는 장신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허벅지가 일주문 기둥만 한 천하장사다.

왕년에 단옷날 씨름판에서 끌고 온 황소가 몇 마리였던가.

 

지금 장비는 토목공사업자다.

저잣거리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현청에서 발주하는 다리도 놓고

길도 닦고 저수지도 축조해 돈을 잘 버는 데다

돈까지 잘 써 천하의 호걸로 통한다.

 

‘장천석’이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건만

사람들은 그를 장비라 부르고 본인도 싫지 않아 그대로 ‘장비’가 되었다.

삼경이 넘은 심야에 술 취한 친구들, 후배들, 업자들을 데리고 집에 와

밤새도록 술상을 차리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은

마누라의 일상이 되어 그러려니 하고 사는데 이제는 작부까지 데려왔다.

 

장비가 호걸처럼 노는 데 반했던 마누라 순덕(順德)이는

이름처럼 어려서부터 부모 말 한 번도 거슬러본 적 없다.

무지막지한 놈한테 시집와 한 번도 보따리 싸서 친정에 가본 적도 없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왔다.

장비가 기생집 대문을 들어서면 기생들이

우르르 버선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장비에게 매달린다.

행수기생은 동기(童妓)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장비에게 바친다.

 

새봄에 들어온 열여섯 살 동기가 얼마나 예뻤던지 장비는 첫눈에 반해

그녀를 안고 말 등에 올라 평양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명사십리며 진달래가 불타는 금강산이며 좋은 곳은 다 들르고

한 달 반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동기를 기생집에 떨어트리고는

말고삐를 당겨 집으로 갔더니 잠겨 있는 대문에 ‘喪中(상중)’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 쌩쌩하던 장인이 죽었을 리는 없고 장모님이?

 

장비는 저잣거리 사무실로 갔다.

숙직하던 사동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마누라가 죽었다는 것이다.

 

말을 달려 고개 넘고 개울 건너 처가로 갔다.

외할머니 품에 안긴 남매는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장모는 고개를 돌려 흐느꼈다.

 

사랑방으로 갔더니

장인은 혼술을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엌으로 가 찬모로부터 전말을 들었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아픈 몸으로 친정에 오더니

이 약 저 약 써 봐도 차도가 없어 시름시름 앓다가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삼월 스무이레 밤에

속절없이 이승을 하직했다는 것이다.

장비의 황소 같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찬모가 안방에 들어가 장모가 간직하고 있던

편지를 가져다 장비에게 건네줬다.

 

“여보,

소첩은 이제 이승을 하직할 때가 된 것 같네요.

짧은 세월이었지만 당신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신혼 초 진달래가 만발한 산길을

남의 눈길을 피해서 당신의 등에 업혀갈 때

소첩은 두 팔로 당신의 목을 껴안고 당신은 두 손으로….”

 

거기까지 읽다 말고

“여보∼” 집이 떠나갈 듯이 고함을 치더니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했다.

 

찬모를 앞세워 뒷산에 올라 아직 봉분에

흙도 덜 마른 마누라의 무덤 앞에서 땅바닥을 치면서 목 놓아 울었다.

 

이튿날,

장비는 혼자 사는 고모를 집으로 모셔 놓고 처가에서 어린 남매를 데려왔다.

 

사무실 집사와 일꾼들을 데리고 선산으로 가 마누라 무덤 봉분을 왕릉처럼 올리고

무덤 둘레로 그녀가 좋아하던 진달래를 빼곡하게 심고 그 옆에 여막(廬幕)을 지었다.

솜씨 좋은 찬모를 구해다 놓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상을 차려 무덤 앞에 놓고 제를 지냈다.

 

“내가 마누라를 죽였어!

내가 순덕이를 죽였어.

으흐흐흑.”

 

울고 있는데 분간 없는 행수기생과 동기가

소문을 듣고 용봉탕을 싸 들고 왔다.

장비가 조조를 만난 듯 쟁반을 발로 걷어찼다.

 

탕국을 덮어쓴 두 기생년을 엎어놓고

죽장으로 얼마나 두드려 팼는지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갔다.

사나흘에 한 번씩 집에 가면 장비는 어린 남매를 안고 또 눈물바다를 이뤘다.

 

밤 깊은 처갓집 사랑방에서 장인과 밀담을 나누던 큰처남이

벌떡 일어나 다락문을 두드리며 “이만 끝내자”하자

다락문이 열리며 죽었다던 순덕이 배시시 웃으며 내려왔다.

 

한편 여막에서는 장비가 술 한 잔을 벌컥벌컥 마른 논에 물 대듯 마시고는

창밖의 둥근달을 보며 첫날밤을 떠올렸다.

 

땀에 젖은 순덕이를 껴안고 만월을 바라보며

“저 달 같은 아들딸 낳자”고 했었다.

 

그 생각에 눈물을 쏟으며

“순덕아∼” 울부짖는데

“예∼ 저를 불렀습니까?” 여막 문을 열고 순덕이가 들어왔다.

 

“귀신이냐,

순덕이냐?

귀신도 좋다.”

장비가 놀라지도 않고 귀신을 덥석 뼈가 부서져라 껴안았다.

 

“저승사자가 명부를 잘못 적었다고

염라대왕께서 저를 다시 내려보내 주셨습니다.”

 

순덕이가 속삭였다.

장비가 순덕이를 들쳐 업고 쿵쿵쿵 내달려 처가로 들어오며

 

“장모니∼임,

순덕이가 돌아왔어요.”

 

동네가 떠나갈 듯이 고함쳤다.

장모가 순덕이를 안고 흐느꼈다.

사건의 전말을 아는 사람은 딱 세 사람뿐, 순덕이의 친정어머니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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