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학동과 머슴

오토산 2022. 4. 25. 06:43

사랑방 야화 (20)

학동과 머슴


유월 땡볕에 밭을 매다 점심을 먹고

다시 들로 일하러 가는 길에 서당 앞을 지나게 됐다.
선들바람이 부는 서당마루에서 학동들이 글을 읽고 있었다.
두 살 아래 도련님도 보였다.

 

훈장님의 선창에 합창하듯

학동들이 따라 읊는 소리는 숲 속의 산새들 울음소리보다 낭랑하다.
훅훅 달아오르는 지열 속에 땀방울을 비 오듯 쏟으며

콩밭을 매는 억쇠는 연방 한숨을 토했다.

 

“단 열흘만이라도 저 학동들처럼 신선놀음을 해봤으면

지금 죽어도 원이 없겠네,  아고 아고 내 팔자야.”


저녁을 먹고 제방에 벌러덩 누워

연초를 피워 물고 있는 억쇠에게 도련님이 찾아왔다.

 

“억쇠야,

나도 담배 한번 피워보자.”
억쇠는 눈을 크게 뜨고

 

“대감 나으리 알면 큰일 나요.”

 

두어 모금 빨다가 캘록캘록 거린 도련님은

이번엔 억쇠 따라 봉놋방에 가겠다고 떼를 썼다.
봉놋방 뒷전에 앉아 머슴들이 킬킬거리며 골패하는 걸 보다가

탁배기도 한잔 얻어 마시고 억쇠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도련님은 억쇠방에 앉아 방구들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억쇠야,

네 팔자가 부럽다.”
말문이 막힌 억쇠가 한참 만에

 

“도련님,

지금 나를 놀리는 거예요!?”

이튿날 아침,

대감이 억쇠와 도련님을 불렀다.

 

“서로 옷을 바꿔 입어라.”

 

둘이 영문도 모른 채 멀뚱하게 서 있자

대감은

 

“오늘부터 억쇠는 서당에 가고,

너는 들에 가 콩밭을 매렸다.”

 

지난 밤 억쇠방에서 억쇠와 도련님이 서로 신세타령하는 걸

문밖에서 대감이 몰래 들었던 것이다.
둘 다 신이 나서 서당으로, 들로 내달았다.

산들바람이 부는 시원한 마루에서

하늘천따지 천자문을 시작한 억쇠는 마침내 신선놀음을 하게 됐다.
밭을 매다가 개울에 풍덩 뛰어들어 멱을 감고

연초를 말아 담배를 피우며 도련님은 신바람이 났다.

 

서당마루에서 신선놀음(?)에 빠진 억쇠가 ‘악’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도 모르게 깜빡 졸다가 훈장님 회초리가 억쇠 머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훈장님,

다리가 저려서 못살겠어요,

다리 좀 펴면 안될까요?”

 

학동들이 까르르 웃고 훈장님의 회초리는

억쇠의 허벅지에 시퍼런 줄을 만들었다.

“한나절 동안 콩밭 한고랑도 다 못 맸으면

밥을 먹지 말아야지.”

 

어느새 콩밭에 온 대감이 산울림이 퍼지도록 목청을 돋웠다.
도련님은 땡볕이 이렇게 따가운지 이전엔 미처 몰랐다.
손바닥엔 물집이 잡히고 허리는 두동강이 나는 것 같다.

그날 밤,

등잔불 아래서 숙제를 하는 억쇠와

땡볕에 등허리 화상을 입어 물수건을 얹고 낑낑거리는 도련님이나

둘 다 죽을상이다.

 

“안되겠어.
내일부터 제자리로 바꿔.”
두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말이다.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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