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길안면 유래

오토산 2012. 5. 16. 02:34

 

 

 

 

吉 安 面  現 況

 

 

 길안면은 안동시 남동쪽에 위치한다.

 2002년 기준으로 면적은 199.7㎢이고 세대수는 1,647가구, 주민수는 4,118명이며 면소재지는 천지리이다.

 길안면은 고려시대 초기에 길안부곡(吉安部曲)이었다가 충선왕(忠宣王) 때 길안현(吉安縣)이 되었다.

 길안현은 조선시대 숙종(肅宗) 때 안동군으로 속하여 길안이 되었고 1904년 길안면과 임남면으로 분리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길안면과 임남면이 재통합하여 안동군 길안면으로 되었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지례리 일부와 임하면 현하리를 통합하였다.

 1992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지례리는 없어졌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의 통합으로 안동시 길안면이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면의 대부분이 높은 산지로 이루어졌는데 와룡산(臥龍山, 489m), 화부산(花釜山, 626m), 사일산(士日山, 649m), 금학산(金鶴山, 577m) 등과 남부경계에는 연점산(鉛店山, 871m), 산지봉(産芝峰, 890m), 황학산(黃鶴山, 782m) 등이 있다.

 또 면의 북부산지에는 반변천이 심한 곡류를 이루고 흐르며 그 지류인 길안천이 면의 대부분을 경유하면서 흐른다.

 이 외의 지방하천으로 일락천, 용계천(龍溪川), 백자천(柏子川), 송계천(松溪川) 등이 있다. 길안면과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는 의성군과 청송군이 있으며 이 지역들과 연결되는 국도와 지방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용담사, 용계 은행나무, 송사 소태나무 등의 문화재가 있다.

 길안면에는 천지1·2·3리, 만음1·2리, 백자리, 금곡리, 송사1·2리, 대사1·2리, 고란리, 묵계1·2리, 구수1·2리, 배방리, 용계리, 대곡1·2리, 현하1·2·3리 등 13개 법정리와 23개 행정리가 있다.

 

천지리 새마을 공원

 

 ★ 泉  旨  里 ★

 

  천지리는 길안면의 면사무소가 있는 소재지이다. 안동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1리와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다. 면의 중심부에 해당되는 것만큼 번화가라고 할 수 있다. 자연마을도 장터 위주로 발달하였으며 2002년 11월 30일 기준으로 445가구에 1,249명이 거주하고 있다.

천지리는 성제(城堤), 샘나루, 천지(泉旨)라고 한다.

  마을을 개척할 당시 샘물이 솟아나는 큰 웅덩이가 있었는데, 샘물의 맛이 좋다고 하여 샘나루, 천지라고 하였다. 한편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족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피난올 것이라 하여 성을 쌓았다가 왕이 오지 않고 현재의 예천군 하리면으로 가버렸으므로 성(城)을 완성하지 않고 철거한 흔적이 있어 성제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①천지1리에 신기(새터), 장터(아랫장터,웃장터), ②천지2리에 창리(창마), 산하리(산다리), ③천지3리에 장터(웃장터, 아랫장터)가 있다.

 

새터·신기(新基)
  이 마을은 천지사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바로 나타나는 천지리의 입구 마을이다.  이 마을은 약 170년 전 탁씨(卓氏)라는 노인이 동금장사를 하면서 다니다가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개척한 것이다.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 마을은 천지1리에 속하며 현재 80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창마·창리(倉里)
   이 마을은 천지리의 동남쪽에 있으며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으로 들어가 면 나타난다.  이 마을은 약 200년 전에 한씨(韓氏)라는 사람이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길안현의 창고가 여기 있었다 하여 창리, 창마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창마는 천지2리에 속하며 현재 5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삼 거 리:길안면사무소 앞에 있는 사거리이다. 현재 사거리이지만 1990년대 전에는 삼거리 였다. 장터에 외곽도로가 생기면서 사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잉어배미:창마 서쪽에 있는 논이다. 네 마지기가 되는데 예전에는 길안천이 이곳으로 흘러서 못이 되어 잉어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용소(龍沼):창마의 동남쪽에 있다. 예전에는 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메꾸어졌다고 한다. 여기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옛날 안동군 길안면 산달리에 사는 성주이씨 가문에는 온 집안이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는 이 아기는 아주 신통한 힘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은 장사가 태어났다고 수군거렸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이도 나고 걷기도 하며 젖보 다도 밥을 먹었다. 아직 첫돌도 지나지 않은 어느날 어머니가 시장에 갔다오니 놀랍게도 시렁 위에 올라가 흰 이를 보이며 씩 웃는데 가만히 보니 겨드랑이에 날개까지 돋아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장사가 나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역적이 된다고 하여 그 집안을 멸족시키는 국법이 있어 소문이 자꾸 퍼지면 아들은 물론 친척까지도 모두 화를 입게 될 처지였다. 이에 당황한 성주이씨 일가는 장사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여러가지 방법을 썼지만 어린 장사는 힘에 지혜까지 있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내 낮잠을 곤히 자는 장사 위에 큰 널판을 덮고 떡메로 쳐 죽여 버렸다. 장사가 숨을 거두자 건너편 산기슭에 장차 용이 날 곳이라 하여 용바위라 칭하던바로 그 곳에 용마가 한 마리 나타나 큰 소리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더니 곤두박질치며 산기슭 아래 큰 못 속 에 빠져 죽었다. 그 용마는 장사가 타는 말로서 장사가 태어나면 하늘에서 점지된 용마도 동시에 태어나 어떤시기에 그들이 만나게 되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용마가 빠져 죽은 물 은 하루에도 세번씩이나 색깔이 변해 마을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자 이 못을 없애려고 흙 으로 메웠으나 번번이 큰 홍수가 나 다시 못이 이루어지자 포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용마가 빠져 죽었다는 그 물은 용소(龍沼)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다리·산달리·산하리(山下里)
  이 마을은 천지리의 동북쪽에 있으며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구수리로 가는 방면에 있다. 마을 명칭은 산 아래에 큰 마을이 있다고 하여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천지2리에 속하며 현재 5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웃장터
   이 마을은 천지리에서 먼저 형성된 장터이다. 그리고 아래장터에 비해 윗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와 가까이 있다. 현재 5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아래장터·장터
  이 마을은 웃장터가 옮겨서 형성된 것으로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아래장터라고 하며  주민들은 장터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현재 10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장터와 아래장터는 중앙에 난 도로를 경계로 하여 도로 동남쪽은 천지1리이고, 동북쪽은 천지3리이다.

 

★ 晩  陰  里 ★

 

  만음리는 길안면의 남쪽에 있으며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다. 면사무소 앞에 있는 사거리에서 영천, 포항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1.7km 정도 가면 왼쪽에 만음2리를 나타내는 입석이 있다. 여기서 700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에 만음1리를 가리키는 입석이 나타난다. 만음리는 현재 원만음, 개곡, 서당리, 명곡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전에는 각기 행적구역상 분리된 마을이었다. 만음리에는 현재 121가구에 291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①원만음(마름), 개곡(갯골), ②서당마, 명덕(와덕,누래기)가 있다

마름·만음(晩陰)·원만음
  원만음은 약 400년 전에 영양남씨(英陽南氏)와 의령옥씨들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 명칭은 마름, 만음, 원만음이라고 하는데 두리봉(斗里峯)의 응달에 마을이 있다고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만음리라는 행정명칭이 이 마을의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만음리의 본동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오장군(吳將軍) 묘라고 하는 묘소가 마을 뒷산에 있는데 오장군(吳將軍)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싸우다가 전사하여 이곳에 안치되었다고 하며, 후손은 없으나 음력 팔월 초하룻날 제일 먼저 장군묘소(將軍墓所)에 벌초를 하는 사람이 아들을 낳고 운수가 좋다고 하여 매년 묘소 주위가 깨끗이 벌초된다고 한다. 국도에서 마을로 난 길을 따라 들어오는 왼편 과수원의 초입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상여를 보관하는 곳집이 있다. 주민들은 고사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도로에 바로 붙여있다. 보통 곳집이라는 것은 마을의 구석에 주로 위치하는데 이 마을에서는 도로가에 두었다. 마을에서 개곡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성진개골이 터져 있어 마을이 번성치 못한다고 하여 이것을 막기 위하여 액막이로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남쪽과 북쪽 끝에는 바람을 막기 위하여 90여 년 전에 조성한 소나무숲이 있어 풍광을 보기 좋게 한다. 원만음은 음지마, 양지마, 아래마 등 3개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현재 5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음지마는 원만음의 동쪽에 있으며 양지마는 서쪽에 있다. 이 두 개의 마을은 백자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주민들은 백자천을 앞거랭이라고 부른다. 아랫마는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다. 양지마에는 수령이 300여 년으로 추정하는 늙은 느티나무가 있으며 음지마에는 원만음의 동제당이 있다.

  성진개골, 성진골:성진도사라는 분이 공부하면서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 서쪽에 있으며 이 고개 뒤쪽에 오장군의 묘소가 있다.

건능간, 골능간:마을에서 동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두리봉이란 산 아래에 있 다. 주위에 묘소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장기판, 장기판암:마을의 북쪽에 있다. 바위 수평면에 종횡으로 선이 그어져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장기판데미:장기판암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장기판암 뒤쪽에 있다.

장기판소:장기판암 앞쪽에 있는 것이다.

용 소:장기판암의 북쪽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무기가 살고 있어 물빛이 조석(朝夕)으 로 변한다고 하며 마을에 가뭄이 심하면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물이 메말라 있으나 앞거랭이에 물이 많이 흐를 때는 물이 찬다고 한다.
앞거랭이:백자리에서부터 내려오는 하천으로 공식적인 명칭은 백자천이나 주민들은 앞거랭 이라고 한다. 마을 앞으로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만 음 들:원만음 동쪽에 있는 넓은 들이다. 만음 앞에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갯골·개곡(開谷)
   이 마을은 원만음에서 성진개골을 넘어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입을 벌리고 있는 늙은 호랑이 앞에 개가 있는 형국인 노호포구(老虎捕狗)라 하여 갯골이라고 불렀으며, 창원황씨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개곡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여기에는 3가구가 살고 있다.

버마골, 비성골:개곡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노호포구인 마을의 앞쪽에 있다고 하여 버마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성골이란 명칭은 여기에 묘소의 비석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누래기·명덕·와덕(臥德)
  명덕은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1.7km 정도 떨어진 곳의 국도변 왼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만음2리에 속하며 약 200년 전 밀양박씨(密陽朴氏)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뒷산의 형국이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라 하여 누래기라 불렀으나, 이름이 좋지않다고 하여 명덕(明德)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에 우물을 파며 마을에 좋지 않는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하여 우물은 파지 않고 샘물을 길러 먹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마을 북쪽에는 늙은 회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가 명덕의 동신을 모신 동수이다. 매년 정월에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서당말·서당마을·서당촌(書堂村)
  서당마을은 길안면의 남쪽에 있는 것으로 만음2리에 속한다. 만음2리의 명덕과는 행정구역이 같으나 실질적인 거리로는 만음1리인 원만음과 더 가깝다. 원만음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가면 있다. 원만음 앞에 흐르는 백자천에 세워진 만음교만 넘으면 곧 바로 서당마을인 것이다. 이 마을은 약 200년 전에 일직손씨(一直孫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 명칭은 안동김씨, 옥씨, 의성김씨가 사용하던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현재 서당의 건물은 없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섰다. 마을 중앙의 당나무가 있는데서 동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이 옛날 서당터라고 한다. 당나무는 현재 옻나무인데 그 전에는 오래된 소나무였으나 그것이 말라죽자 옻나무를 당나무로 하였다고 하며 현재도 매년 정월에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 군 바 우:서당마을에서 국도 건너에 있는 산의 절벽이다. 절벽의 모양이 군사가 나열해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만음리 명덕보위 길안천 광경 

 

 

★ 栢  子  里 ★

백자리는 길안면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만음리로 접어들어 서쪽으로 3km 정도 가면 나타난다. 백자리는 처음부터 길안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전의곡, 우음산, 신방동을 합하여 백자동이라고 하면서 현재로 이어져 왔다. 현재 백자리에는 67가구에 156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원백자, 섬배이, 푸입, 두음산(상두음산, 하두음산), 전의실(상전의실, 하전의실)이 있다.

잣나무골·원백자(元栢子)
  이 마을은 백자리의 동쪽에 있으며 가장 큰 자연마을이다. 마을 명칭은 약 400년 전 선방재 아래에 마을을 개척할 당시 잣나무가 많아서 백자라 하였다고 하며 또 백자리(栢子里)의 주된 마을이라 하여 원백자라 한다. 백자리의 행정명칭도 이 마을에서 따 온 것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3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마을을 처음 개척한 성씨는 배씨이며 그 후에 창령성씨(昌寧成氏)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 가메골:원백자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다 한다.

 ◇ 선 방 재:원백자의 서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원백자에서 듬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면 오른쪽에 산등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서 가면 선방재가 나타나는 데 마을의 명칭이자 고개의 명칭이다.
 ◇ 집뒷개골:원백자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민가의 뒤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임

 

푸입·푸으미·초입(草入)
  이 마을은 원백자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만음리에서 백자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풀이 많다고 하여 푸입, 푸으미, 초입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3가구가 거주한다.
 ◇ 금 광 굴:푸입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일제강점기 때까지 여기에 금을 캐는 광산이 있었다.

 ◇ 넙씽잇골:푸입 뒤쪽의 띳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는 바깥 입구 쪽은 좁고 안쪽 은 넓게 되어있다.

전의실·전의곡(全義谷)
   전의실은 백자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듬산에서는 동쪽으로 위치한다. 이 마을은 상전의실, 하전의실 2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었다. 상전의실은 북쪽에 하전의실은 남쪽에 있는데 두 마을의 거리는 1km 정도이다. 현재 마을에는 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듬산, 두음산(斗音山)
  듬산은 백자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전의실과는 1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마을 역시 전의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상듬산은 동쪽에 있고 하듬산은 맞은편인 서쪽에 있다. 현재 마을에는 9가구가 살고 있다. 
 ◇ 참새미골:듬산의 뒷산인 황학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에 찬물이 솟는 샘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듬 산 골:듬산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듬산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백자리 황학산 정상의 고랭지 채소밭 

 

★ 金  谷  里 ★

 금곡리는 길안면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길안면의 백자리와 고란리, 송사리 그리고 의성의 옥산면과 접하고 있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9k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작은 도로가 나오는데 이 길이 금곡리로 가는 길이다. 금곡이라는 명칭은 쇠가 많이 나는 골짜기라 하여 붙인 것이다. 금곡리는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미천리와 묵계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금곡리라는 행정명칭을 사용하였으며 현재 71가구에 179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미천, 고마실, 신기, 소일, 적산, 하갈현, 상갈현이 있다

미내·웃미내·미천(眉川)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9k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작은 길이 나타 나는데 이 길을 따라 가면 미천이 나타난다. 마을 앞에 있는 냇가의 흐름이 마을을 돌아가는 형국이어서 흡사 사람의 눈썹같이 생겼다고 하여 미천(眉川)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현재 이 마을에는 15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 솔매기:미천에서 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미천과 소일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며 산의 좁은 협곡에 위치해 있어서 붙인 명칭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아무 도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용담사(龍潭寺):미천에서 1.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사찰이다.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 4 년(664)에 화엄화상(華嚴和尙)이 창건하고 선조(宣祖) 7년(1574)에 혜증법사(惠證法師)가 중 건하였다. 번성기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쌀 씻는 물이 절 앞으로 흐르는 개울 따라 묵계까지 흐를 정도로 수도승과 불자가 많았으며 부속암자도 극락암과 학소암, 금정암 등 3개나 되었다. 그러나 극락암과 학소암은 없어지고 현재 용담사의 남쪽 금학산 8부 능선에 위치한 금정암만 남아있다. 극락암은 10여년 전에 뜯어다가 요사채로 사용하고 학소암은 60여 년 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무량전, 요사채, 선원 등 4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 온다. 용담사를 창건할 당시 여기를 지나던 지사(地師)가 지세를 살피고는 이 절에는 쇠삿갓을 쓰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흥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되니 조심하라고 일러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기이하게 여긴 승려들은 항상 경계하여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그런데 어느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는데 아이를 업은 여인이 솥뚜껑을 머리에 쓰고 비를 피하며 절에 먹을 것을 구하러 들어 왔다. 그 후로는 수백명이나 되던 승려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신도들도 하나둘씩 발길이 뜸해져 사찰이 쇠퇴하였다. 현재 조계종 16교구 고운사의 말사이다.

 

새뜸·신기(新基)
  이 마을은 미천에서 서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이 새로 생겨서 새뜸이라 부르다가 근래에 와서는 신기라고 부른다. 현재 이 마을에는 9가구가 모여 산다. 신기에는 수령이 500년 정도 되는 느티나무가 있다. 이것이 신기의 당나무인데 금곡리에서 유일하게 신기에만 당나무가 있으며 신기 주민들이 매년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소일·쇠일
  소일은 미천에서 서쪽으로 5km 정도 들어가면 나타난다. 금곡리에서는 서쪽으로 위치한다. 이 마을은 서향으로 위치하고 있어 해가 넘어가는 광경을 보기 때문에 소일(消日)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일은 임진왜란 때에 달성판공을 지낸 경주이씨의 한 선비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현재 이 마을에는 경주이씨, 경주최씨, 동래정씨, 의성김씨 등 여러 성씨 15여 가구가 살고 있다.
 ◇ 부시봉:소일의 남쪽에 있으며 소일과 송사리의 송제와 경계지점이다. 산이 남쪽에 있어서 음지가 많고 햇볕이 잘 들지 않아서 산불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산의 명칭은 부시돌처럼 뾰족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구정골:부시봉에 있는 골짜기이다. 소일의 남서쪽에 있으며 골짜기의 골이 3km 정도 되는 긴 골짜기이다.
 ◇ 바른골:구정골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골이 곧게 뻗어 있어서 붙인 명칭이다. 바른골이라는 골짜기는 하나 더 있는데 텃골에 있는 작은 골짜기가 그것이다.

 ◇ 물푸레박골:구정골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물푸레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

 ◇ 대평밭골:구정골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를 위에서 내려다 보면 매우 넓고 평평 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텃   골:소일 서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의 터가 넓고 평평하다고 하여 명칭이 유래한다.

 ◇ 도장골:텃골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형이 뒤주처럼 오목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큰늘골:텃골에 있는 골짜기로 늘이라는 풀이 많아서 붙여진 명칭이다. 큰늘골 옆에는 작은 늘골이 있다.

 ◇ 장   골:소일과 송사 사이에 있는 골짜기인데 길이가 길다.

망고지·망골·적산·신곡(新谷)
  이 마을은 소일에서 북서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마을은 금곡리의 끝자락으로 의성의 옥산면과 접하고 있다. 마을이 큰 산골에 있으며 여기에 풀이 많이 우거져 있어 망곡(芒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옛날 신혼 초행길을 갈 때 망골이라고 하는 지명 때문에 이 마을로는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적산이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의 산이 이 마을에 있어서 적의 산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해방이 된 후 적산이라는 명칭에서 신곡이라고 변경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갈고개·웃갈고개·갈현·상갈현(上葛峴)
  이 마을 역시 금곡리의 끝자락에 있는 것으로 의성군 옥산면과 접하고 있다. 옛날 이곳에 칡덩굴이 많이 엉켜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로 갈려면 만음리에서 백자리를 거쳐 5km 정도 가야하며 또 미천을 통해서 갈 수 있으나 미천에서 가는 길은 자동차가 다니지 못한다.

중갈현, 아랫갈현, 아릇갈고개

  상갈현의 북쪽 아래에 1km 정도 떨어져 있는 것으로 갈고개의 아래쪽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6 가구가 살고 있다.

 ◇ 밤상골:상갈현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 밤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인 명칭이다.
 ◇ 버무골:상갈현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이 깊고 범이 있었다고 하여 붙인 명칭이다.

 ◇ 약물래:상갈현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에 바위산이 있는데 여기에 큰 굴이 있 으며 이 굴에서 물이 솟아난다. 이것으로 인하여 명칭이 유래되었다.

고마실·고마곡(叩馬谷)
  이 마을은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8km 정도 가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나타난다. 미천으로 가는 길 아래쪽에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한 장군이 여기에 몸을 숨기다가 말을 버리고 떠나게 되었는데, 왜적이 들어와 그 말을 타려 하니 말은 왜적을 태우지 않고 바위에 머리를 들이받아 의롭게 죽었다. 그 뒤로부터 동민들은 그 의마(義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당(堂)을 짓고 고사(告祠)를 올리니 그로부터 이 마을은 고마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그 당집에는 쇠붙이로 만든 두 필의 말이 안치되어 동리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금곡리 용담사 계곡


 

 ★ 松  仕  里 ★

 송사리는 길안면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12km 정도 가면 송사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송사리인데 왼쪽으로 들어가면 대사리로 가는 길이다. 현재 1리와 2리로 구별되어있는 송사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편에 의하여 안동군 길안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송제동, 마사리, 대사동의 일부를 통합하여 송사리가 되었는데 이것은 송제와 마사의 명칭을 따서 만든 명칭이다. 현재 송사리에는 154가구에 370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①송사1리에 송제, 둔전, ②송사2리에 재일, 명곡, 유곡, 계두리, 마사리가 있다.

 

송제역말·송제(松堤)
  이 마을은 송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송제역(松蹄驛)이 있었다고 하여 송제역말이라고 불렀으나 역촌의 자리는 현재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8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150여 년 전 무과(武科)에 급제한 김중진(金仲鎭) 선생이 현재 마을 위치에 입거(入居)하게 되자 차츰 인가가 늘고 역촌에 살던 사람들도 점차 옮기게 되어 한말에 원래의 역말은 없어지고 현재의 자리에 새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송제란 지명은 마을 뒷쪽의 산에 솔이 울창했었다는 데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6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당모테, 당몰, 당촌(堂村):송제의 남쪽에 있다. 길송분교장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송제의 당 나무인 소태나무가 있어서 붙인 명칭이다. 송제의 소태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나무의 공식적인 명칭은 송사동 소태나무이다. 이 나무는 지상 1.3m에서 분리된 2지 목(枝木)으로 높이는 약 37m이고 나무의 둘레는 4.7m, 수령은 약 700년 정도로 추정되며 우 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소태나무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소태나무는 소태과에 속 하는 낙엽 작은 키나무로, 전체에 매우 쓴맛이 있으며 잎은 긴 알 모양이고 7∼20㎝ 크기이다. 노란 연두빛의 작은 꽃이 암수 따로 여름철에 잎 겨드랑이에 핀다. 분포지는 한국의 전역과 일본 류우쥬우 열도, 타이완, 인도, 중국 등인데 한방에서는 가을에 나무와 열매를 채취하여 햇볕 에 말려서 건위제로 사용한다. 이 소태나무는 예부터 마을 사람들이 동신목(洞神木)으로 수호 하고 있으며 지금은 길송분교장 교사 뒤에 회나무 등과 함께 숲을 이루고 있으며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마을의 동제는 정월 보름날 나무 아래에 당(堂)을 마련하고 행하여지는데 제관을 뽑고 온갖 정성을 들이는 것은 다른 곳과 동일하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제물을 그 자리에서 장만하 여 서쪽에 있는 소태나무에 먼저 지내고 다음은 동쪽에 있는 회나무에도 제를 지내고 있는 것 이다. 소태나무 주변에는 회나무를 비롯하여 10여 그루의 거목이 숲을 이루어 수백명의 학생이  자연학습을 즐길 수 있어 야외학교로서 큰 몫을 하고 있다. 해마다 나무를 뚫는 딱다구리과 의 새가 날아와 서식하므로 수십 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밤이나 조용할 때에는 나무를 뚫 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린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도 이 나무에 해를 가하면 반드시 좋지 않는 일 이 생긴다고 하여 보호하고 있다.

 ◇ 천지갑산(天地甲山):송제 뒤쪽에 있는 산이다. 산에 기묘한 바위가 많고 산수가 수려하다. 김중진 선생이 이 산에서 공부를 하면서 산의 경치가 좋다고 하여 천지간에 제일 좋은 산이라 는 의미로 붙인 명칭이라고 한다.

 ◇ 관고개:송제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벼슬아치들이 많이 다녀서 붙여진 명칭이다.
 ◇ 관득골:벼슬을 얻는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송제 동남쪽에 있다.

 ◇ 사   재:송제의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선비들이 많이 넘는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
 ◇ 가사거랑, 가새거랑:마사에서 흘려오는 하천이 송제로 와서 길안천과 합류되는 지점이다. 2개의 하천이 합해지는 모습이 가위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

 ◇광산재:길송분교장 앞에 있는 낮은 산이다. 여기에 광물은 캐는 광산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독 점:송제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여기에 질그릇을 굽는 굴이 있었다 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바랑골:송제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산의 지형이 승려가 지는 바랑같아서 붙여진 명칭이다.
 ◇ 조갑지소:길송분교장 동쪽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조개가 많이 났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장      골:송제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길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 새     들:송제의 남쪽에 있는 들판이다. 새로 형성된 들판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

 ◇ 창     터:송제 가운데에 있는 공터이다. 옛날 병기창고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전에는 7년간 시장터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 고방비리:금곡리 미천까지 이어지는 절벽이다. 고방(庫房)으로 들어가는 벼랑길이 라는 뜻에 서 유래한다.

 

둔전·둔전리(屯田里)
  이 마을은 송제에서 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15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송제와 함께 송사1리에 속한다. 고려조 당시 송천읍(松川邑)이 있을 때 읍에서 2㎞ 정도에 위치한 이 지역토지에서 군량미 조달을 하게 되어 둔전(屯田)이라 하였다고 하며 또 역마의 말을 키우는 곳이라서 말구유가 많아 붙여진 명칭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리고 말먹이가 되는 초지(草地)가 있어서 붙인 명칭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재일(才日)
    재일은 송제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재일부터 송사2리 지역에 들어간다. 마을 명칭은 이 마을을 개척한 선비가 처음 들어와서 살 때 재동(才童)이 많이 나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5여 가구가 살고 있다.

 

홈다리·명곡(椧谷)
    이 마을은 송제에서 남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명칭은 나무로 만든 홈(논에 물을 댈 때 이용하는 것)으로 사람이 계곡을 건너 다녀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5가구가 살고 있다.

 

느릅실·유곡(楡谷)
    이 마을은 산에 느릅나무가 많이 있어서 느릅실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1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송제에서 남쪽으로 4km 정도 가다가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2km 정도 가면 나타난다.

 

달구머리·계두리(鷄頭里)
    이 마을은 송제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산의 모양이 닭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달구머리라 칭하게 되었다. 마을의 개척은 화전민들이  한 두 집씩 모여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7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마사리·마사리촌(麻仕里村)
    마사리는 송사리의 끝자락 마을이자 길안면의 최남단에 있다. 마을 끝에 있는 마사터널을 넘으면 청송과 영천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마을 명칭은 마을에 화주대(급제 이상의 벼슬을 하게 되면 세우는 나무가 삼 서듯 많이 서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현재 15가구 정도 살고 있다.

 

송사리 천지갑산의 가을 

 

★ 大  寺  里 ★

 대사리는 길안면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12km 정도 가면 왼쪽에 대사리로 들어가는 작은 도로가 나타난다. 이 도로로 접어들어서 2km 정도 가면 대사리가 나타난다. 대사리는 청송군과 인접하고 있는 지역으로 1리와 2리로 되어있다. 자연마을은 공수, 토일, 사곡, 한절골, 아랫한절골, 오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대사리에는 89가구에 216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대사리는 원래 임하현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길안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송군 현북면의 대사동을 병합하였다. 이때의 구역이 거의 변함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부락으로 ①대사1리에 공수,토일,사곡  ②대사2리에 중사,상사,오마이가 있다

공시골·공수·공수번촌·공수촌
   이 마을은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소도로를 따라 오면 제일 처음 맞이하는 마을이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산의 형국이 공자(公字)모양이라는 데서 마을 이름이 연유되었다고 한다. 또 고려시대에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다고 해서 공수골이라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토일(吐日)
    이 마을은 공수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안동권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아침해가 마을 뒷산에서 토하는 것 같다고 하여 토일(吐日)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길안천(吉安川)이 흐르고 있다.

 ◇ 한밤들:토일 앞에 있는 넓은 들이다. 한자로는 대률평(大栗坪), 대야평(大夜坪)이라고 하는 데 이는 한밤의 '밤'자가 음으로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한자로 표기 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고 한다. 또 주위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거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토지를 가리키는 단위의 '한뱀'이 발음상 변하여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시무네:토일의 동남쪽에 있는 들판이다. 한자로는 이십천(二十川) 또는 입천(立川)이라고도 한다.

 ◇ 쇠재, 세재:토일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한밤들과 시무네 사이에 있는데 이 고개를 통하면 송 사리의 송제마을로 넘어갈 수 있다.
 ◇ 하사리(下寺里):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전쟁지도에 잘못표기되었던 마을로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다. 당시 여기에 3가구가 살고 있었어 그런 오기가 났을 거라고 한다. 여기에는 옛날 옹기를 굽는 굴이 있었다고 한다.

 ◇ 학소대(鶴巢臺):토일 동쪽에 있는 바위이다. 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있는 바위이다.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터인지 흑학(黑鶴) 한 쌍과 백학(白鶴) 한 쌍이 매년 5월에 와서 새 끼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지서를 지키고 있는 경비요원이 총질를 하여 달아난 후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한다. 학소대는 한절팔경 중에 하나이다.
 

사실뱅이·예사슬방·사슬방(沙瑟坊)·사곡(寺谷)
    이 마을은 토일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앞에 낙동강 상류인 길안천이 흐르고 있는데 사금이 났다는 데서 연유하여 마을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냇가에 모래가 많아서 사곡(沙谷)이라고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마을 주위에 절이 많았다고 하여 사곡(寺谷)이라고도 한다. 현재 사슬방의 동쪽 1km 정도 떨어진 골짜기에는 예사슬방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는 사슬방 보다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사슬방에는 16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 연정산:사곡 뒷쪽에 있는 산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아연을 캐는 광산이 있어서 붙인 명칭이다.
 ◇ 병풍산:연정산에 옆에 있는 작은 산으로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붙인 명칭이라고 한다.

 ◇ 천상바우:사곡의 서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또 상(床)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 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탕건바우:사곡의 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한절골과 인접해 있으며 한절골에서는 남쪽에 있고 천상바우에서 길안천을 건너 맞은 편에 있다. 바위의 형상이 탕건 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촛대바우:탕건바우와 붙여있다. 바위의 모양이 촛대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신선바우:탕건바우와 붙여있다. 이 바위 위에서 신선들이 장기를 두고 놀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신선바우는 천상바우, 탕건바우, 촛대바우 등과 함께 한절팔경에 속하기도 한다.


 ▶ 한절골·대사리·대사동(大寺里)·중사(中寺)
    한절골은 사곡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현재의 송제(松堤) 마을을 중심으로 이 일대가 송천읍(松川邑)에 속해 있던 고려조 당시 이곳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지금도 그 옛터에는 기와 조각이 많다. 한절골은 단양우씨가 먼저 입향하여 마을 개척하였으며 그 후 밀양박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2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벼락바우:한절골 남쪽 길안천 건너편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에 벼락이 떨어져서 붙인 명칭으로 낙뢰암(落雷岩)이라고도 한다.

 ◇ 머리바우:한절골 남쪽 벼락바우와 인접해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형상이 사람이 머리를 내민 것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흰바우:한절골 남쪽 벼락바우, 머리바우 등과 인접하여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희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옥류포:한절골 북쪽에 있는 폭포이다. 냇가가 폭포를 이루면서 흐르는데 그 폭포수의 물방울 이 구슬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붙인 명칭이다. 옥류포는 벼락바우,머리바우. 흰바우와 함께 한절팔경 중 하나이다.

웃한절골·상사리(上寺里)
    이 마을은 한절골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명칭은 한절골에서 약 2㎞ 북쪽 산골짜기에 올라가면 윗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또 한절골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마을은 경주김씨가 350여년 전에 입향하였으며 그 후 옥천유씨, 박씨 등이 들어와서 살았다고 한다. 현재 여기에는 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한절골의 중사라는 명칭과 웃한절골의 상사라는 명칭은 한국전쟁 때에 미군이 전쟁지도를 표기할 때에 하사와 함께 지은 명칭이라고 한다.

 ◇ 쌍바윗골:쌍바윗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에 커다란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어서 쌍바위라고 한다.
  항가릿골:웃한절골 북쪽 쌍바윗골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웃한절골의 북쪽에 두 갈래로 뻗은 골짜기가 있는데 하나는 쌍바윗골이고 하나는 항가릿골이다. 항가릿골이라는 명칭은 그 중에 한 갈래를 차지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 지 장 재:고개가 길어서 붙인 명칭이다. 웃한절골의 뒤쪽에 있는 산등성이다.
 ◇ 탑     등:산등성이다. 탑이 있어서 붙인 명칭이라고 한다. 현재는 탑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지장재와 인접해 있다.


오만리(梧晩里)
    오만은 웃한절골에서 북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산 중턱에 올라가면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 마을에 오동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또 한자로 다섯 오자(五字)를 써서 오만(五晩)이라고 하여 마을에 다섯 가구가 넘지 않는다고 붙여진 명칭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마을은 100여 년 전에 개척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3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대사리 학소대 광경(길안천변에 있다)

 

★ 古  蘭  里 ★

 

  고란리는 길안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7km 정도를 가서 왼쪽에 난 작은 도로를 따라 가면 나타난다. 이 길의 입구에서 1km 정도 들어가면 마을이 있다. 마을 뒤쪽에는 계명산이 있는데 요즘 여기에 자연휴양림이 개발되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란리는 원해 임하현의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고종 32년에 길안면으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대사리, 미산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고란리에는 57가구에 136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원고란, 모칙골, 안모칙골, 넓은등, 미천이 있다.

골안·고란(古蘭)·원고란
    이 마을은 고란리의 자연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다. 국도에서 고란리로 접어드는 도로를 따라 1km 정도 들어가면 나타난다. 주위에는 높은 산으로 둘러져 있어서 분지형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은 14세기 경에 개척되었는데 입향시조는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후손이라고 한다. 보백당 선생도 한 때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마을을 개척할 때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골안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안동김씨가 주성을 이루면서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중미고개:원고란에서 아랫미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중메고개라고도 하는데 마을과 마을 의 중간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사랫골:현재 휴양림이 있는 골짜기이다. 싸리골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싸리나무가 많이 난 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용 소:원고란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여울이다. 여울 위에 바위가 있는 데 이 바위가 용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 용바 위를 내리치면 비가 온다고 하여 바위를 많이 쳤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용의 턱 부분이 깨어 져 나갔다고 한다.

 ◇ 행정골:원고란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원고란에서 모치골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너븐등 입구에 해당되기도 한다.
 

모치골·모치곡(茅治谷)
    고란리의 남쪽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 원고란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을 개척할 때 잔디가 우거진 곳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모치곡(茅治谷)이라고 한다. 또 모치새가 많이 있다고 하여 모치골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이 마을에는 12가구가 살고 있으며 곡부공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 기장재:모치골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능선이 길어서 붙인 명칭으로 예전에는 이 길을 통하 여 대사리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 고개를 제당재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모치골의 동제당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 모치골 주민들이 매년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 잠뱅이재:모치골에서 구수리의 잠뱅이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잠뱅이 마을로 통하는 고 개라고 하여 붙인 명칭이다.

 

너븐등·넓은등·광등(廣嶝)
    이 마을은 원고란과 모치골 사이에 있다. 이 마을은 1965년 각처의 도시 근교 노동자들이 화전(火田)을 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한 것이다. 마을 명칭은 산등(山嶝)이 넓은 곳에 위치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주민들이 떠나고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아랫미내·하미천(下眉川)
    이 마을은 원고란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금곡리(金谷里)의 미천 아래 쪽이 된다. 냇물이 눈썹처럼 반월형(半月形)으로 흐르는 모양에서 미천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금곡리 미천의 아래에 있다고 하여 하미천, 아랫미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하미천에는 묵계(默溪)와 송사(松仕)를 잇는 도로가 있다. 이 도로 옆에 비스듬히 돌출한 웅장한 모습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오뉘바위라 한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어느 옛날 이 바위 옆을 지나던 오누이가 있었다. 이들은 멀리 사는 친척집을 다니러 집을 나섰는데 이곳을 지날 때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워낙 세차게 내리는 소낙비여서 앞뒤를 분간 할 수 없는데 다가 인가도 없는 외딴 산골이라 오누이는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산비탈의 바위굴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비는 멈추지 않고 날은 어두워져서 오누이는 바위굴 속에서 옷이 젖은 채로 웅크리고 앉아 밤을 새우게 되었는데 두려움과 추위로 떨다가 그만 이성을 잃고 불륜을 저지르려는 그 순간 하늘이 노했는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굴의 천장이 무너져 내려 앉으면서 큰 바윗덩어리가 오누이를 덮쳐 그들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뒤로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오뉘바위라 불렀다고 전하며 오뉘바위에는 한쪽이 무너져 내려앉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고 큰 바윗덩어리에는 핏자국이 얼룩져 있는 모습 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곳 사람들은 오뉘바위를 '신명(神明)이 지켜준 천륜(天倫)의 성역(聖域)'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 장수궁디바우:오뉘바우가 있었던 자리에서 건너편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움푹들어 갔는 데 이것은 장수가 엉덩이를 박았다고 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명칭이 유 래한다. 또 이것을 쌀개바우라고도 하는데 바위의 모양이 방아의 쌀개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졌다.
 ◇ 미천들:미내 앞에 있는 넓은 들판으로 미내들이라고도 한다. 이 들판에는 약수터가 있었는데 길안천에 보가 설치되어 없어졌다.

 

 계명산자연휴양림광경 

 

★ 默  溪  里 ★

  묵계는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5km 정도 가면 나타난다. 옛날부터 길안현에 속하여 오다가 1914년 오락을 병합하여 현재의 묵계리의 모습을 갖췄다. 현재 1리와 2리로 구분되며 1리에는 선항, 상리, 하리, 새마을, 국만 등 5개의 자연마을이 있고 2리에는 오락 1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묵계리에는 현재 149가구에 355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거묵역(居墨驛)이라 하다가 조선 연산군 6년에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선생이 여기로 우거(遇居)하면서 그 다음 해에 묵촌(默村)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송암폭포(松岩瀑布)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건립하면서 그 정자 앞 냇물이 잠잠히 흐르는 모습을 보고 다시 묵계(默溪)라 칭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①묵계1리에 선항리, 국만리, 신기, 상리, 하리, ②묵계2리에 오락이 있다 

서낭댕이·선항당(仙巷塘)·선항리(仙巷里)
    이 마을은 묵계리의 북동쪽에 있으면서 남향을 하고 있다. 마을은 작은 언덕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여 이주한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종택인 보백당이 있다. 그리고 보백당의 동쪽에는 묵계서원(默溪書院)이 있다. 마을의 명칭은 지형이 기지절묘(基地絶妙)하여 신선(神仙)의 터가 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또 서낭당이 있다고 하여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선항리에는 4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보 백 당:안동김씨 묵계종택 내에 있는 것으로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호(號)를 따서 지은 건물이다.

 ◇ 묵계서원:숙종 32년(1706)에 건립된 것으로 보백당 김계행 선생과 응계(凝溪) 옥고 (玉沽)선생을 배향하였다. 그후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 의하여 고종7년(1870)에 훼철되었다. 그 후 조정의 칙령으로복설령이 내려졌으나 복원되지 못하다가 1998년 완전히 복설되어 두선생의 위패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 구 들:선항리와 오락 사이에 있는 들판이다. 상리의 새들에 비해 먼저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새마을
    새마을은 선항리와 국도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민가도 없는 들판이었으나 안동댐이 건설된 후 그 지역에 있던 수몰민들이 이건하여 1974년에 형성한 마을이다. 새로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2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웃마·상리(上里)
    상리는 새마을에서 남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옛날 묵계에서 줄다리기나 횃불놀이 등 민속놀이를 할 때에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웃마, 상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현재 여러 성씨 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새 들:상리의 앞쪽에 있는 넓은 들판이다. 선항에 있는 구들에 비해 늦게 생겼다고 하여 붙 여진 명칭이다.

 ◇ 제잉골, 재궁골:상리의 뒷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 안동김씨 재사(齋舍)인 달수재(達壽 齋)가 있다. 이것으로 인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안룻마·아랫마·하리(下里)
    하리는 새마을에서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민속놀이로 줄다리기나 햇불놀이 등을 할 때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 마을 뒷산에는 보백당 김계행 선생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었다가 풀려 묵계로 이주하면서 지은 만휴정(晩休亭)이 있다. 현재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가구는 20여 가구이다.

 ◇ 송암동:하리 뒤쪽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나무와 바위가 많아서 붙여진 명칭이다.  여기에 만휴정이 있다.
 ◇ 아랫골, 정자골:송암동에 있는 골짜기이다. 하리에 있다고 하여 아랫골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 골짜기에 만휴정이 있어서 정자골이라고도 한다.

 ◇ 용 추:만휴정 아래에 있는 여울이다. 아래와 위 2단으로 되어 있어서 호로병처럼 보이는데 폭포를 이루고 있다.
 ◇ 송암폭포:만휴정의 용추에 있는 폭포이다. 송암동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

 ◇ 만휴정:보백당 김계행 선생이 16세기 초에 건립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팔 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자 앞 용추 가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고 새 긴 바위가 있다.

구마닛골·구마이·구만(九滿)·국만리(菊晩里)
    국만리는 구마이, 구마닛골이라고도 불러졌는데 옛날에 도사(道師)가 지나다가 이 마을에 9가구만 살면 잘 산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 후 조선 말기에 한 선비가 늦도록 국화꽃이 피는 따스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국만리(菊晩里)라 개칭 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라기·오락(五樂)
    오락은 묵계2리에 속하며 묵계의 북동쪽에 위치한 넓은 마을이다. 조선조 선조(宣朝) 때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김진(金鎭) 선생이 입향하여 개척하였으며 선생의 자제인 김인보(金仁輔) 선생이 크게 터전을 넓히고 다시 그의 자제인 오락당(五樂堂) 김정호(金廷豪) 선생이 이 마을에는 다섯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하여 오락(五樂)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오락(五樂)이란 산, 물, 나무, 물고기, 복숭아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락은 영천방면의 국도변에 있는 마을인데 국도에서 오락으로 접어들면 입구에 마을의 입향시조인 돈수 김인보 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는 350여년 전에 수구로 조성한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안동김씨 감찰공파 종택인 돈수재와 돈목당(敦睦堂) 등의 고가옥이 있다. 또 마을 북쪽 끝자락 봉월산 아래에는 낙빈정(洛濱亭)이라는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낙빈정에서 마을 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오락의 당집이 있다. 이 마을에는 안동김씨를 비롯한 여러 성씨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봉 월 산:마을 북쪽에 있는 산이다. 산의 모양이 벌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이 산 에 김진 선생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 쉰골, 수일동:봉월산에 있는 긴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길어서 쉬어간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 라 한다.
 ◇ 불 미 골:쉰골에 붙은 작은 골짜기이다. 옛날 여기에 묘소를 쓰기 위하여 땅을 팠는데 바위가 많이 나와서 이것을 깨기 위한 정을 만드는 풀무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무쇠점골:마을에서 동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 쇠를 녹이고 연장을 만드는 대장간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사 기 점:마을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 사기그릇을 만들고 파는 가게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묵계리 만휴정 광경 

 

 ★ 九  水  里 ★

  구수리는 길안면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청송방면의 도로를 따라 6km 정도 가면 구수리의 원구수가 나타난다. 원구수에서 직진을 하면 대곡리와 배방리 그리고 청송군으로 갈 수 있으며 좌회전을 하면 구수2리와 용계리로 가는 길이다. 구수리 동쪽에는 사일산이 있는데 구수리 주민들은 새알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에 봉우리가 2개 솟아있다. 이것이 새의 날개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구수리에는 원구수를 포함하여 송산, 오름실, 남촌 등 4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그리고 세덕사, 갈암신도비, 송정 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현재 120가구에 289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구수리는 한말(韓末)에 임남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계동, 용계동 일부를 병합하여 길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 ①구수1리에  귀현(원구수), 송산, ②구수2리에 남촌, 오름실이 있다
구영·구수(九水)·귀현(龜峴)
    구수란 불미, 사당, 큰질, 골마, 사태, 는, 연암, 양정, 소마골 등 9개의 소지명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며 또 약 300년 전부터 귀현(龜峴)이라고 써 왔으나, 70년 전 일본인이 거북 구(龜)자가 쓰기 어려워 구수(九水), 즉 아홉 구(九)자를 썼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이곳은 9곳에서 물이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위치는 천지리에서 동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넓은 들판도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구수리라는 행정명칭도 이 마을에서 따 온 것이며 구수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이다.
 ◇ 양곡재:천지리에서 구수리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양쪽에 골짜기를 두고 고개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고개는 상당히 길고 높은 것으로 이 고개를 통하면 청송으로 갈 수 있다.

 ◇ 장승백이:원구수의 동쪽 끝자락 도로에 있는 들판이다. 옛날 청송에 살던 한 선비가 의성으 로 갈려고 할 때 여기를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마을 좌수를 지내는 어른이 살고 있 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예절 바른 이 선비는 감히 말을 타고 지나지 못하고 읍을 하고 있었는 데 이 모양이 마치 장승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 와우혈:구수리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누워있는 소의 머리에 해당되는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가메혈:양곡재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형이 다리가 3개인 가마솥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 칭이다.

송산(松山)·송토산(松土山)·양정리(兩井里)
    이 마을은 원구수에서 동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원래 송씨가 터 잡아 살던 곳이라 하여 송산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또 양정리라고 한 것은 우물이 두 개이고 양 골짜기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은 원구수와 함께 구수1리에 속하며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오름실·오음실(梧陰實)
    이 마을은 원구수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에 큰 오동나무가  있었다 하여 오름실이라 한다. 오름실은 구수2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표은(瓢隱) 김시온 선생의 숭정처사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와 송정(松亭)이 있고 임진왜란 당시 훈련대장을 지낸 탁순창(卓順昌) 선생이 낙향하여 건립한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그리고 오름실 입구에는 구수리 전체에서 유일한 당나무가 있다. 당나무는 느티나무와 참나무로 되었으며 현재 오름실 마을 주민들이 매년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 골 마:오름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 1가구가 살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 하였던 마을로서 골에 있다고 하여 골마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또 뒷골 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뒤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절 터:오름실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현재는 절이 없다고 한다.

 ◇ 움 골:오름실 서쪽 세덕사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움폭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여 진 명칭이다.

 ◇ 시리봉:오름실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봉우리이다. 봉우리의 지형이 독수리 날개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미륵바우:오름실 앞으로 흐르는 용계천에 있는 바위이다. 원래 2개가 있었으나 하나는 소실 되고 현재 1개만 남아 있다. 이 바위의 형상은 마치 용이 입을 벌리고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 안외골:오름실 뒷산이다. 마을 밖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칼바우:안외골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크고 삐죽하게 생겼어 붙여진 명칭이다.

 ◇ 배박골:오름실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정골이라고도 하는데 성지도사가 의성 김씨의 부탁을 받고 어떤 터를 잡아주었는데 이 터가 후손들이 번성한다는 잔배 형국이라고 한다. 의성 김씨들이 다시 성지도사를 모시고 이곳을 지나다가 여기서 잔배형국 보다 더 좋은 청실 배형국의 터를 묻자 성지 도지사가 이곳과 가까운 곳을 가리키려고 손짓을 하다가 눈이 멀어졌다 고 한다. 사람들은 잔배형국도 좋은 터인데 욕심을 내어서 청실배형국을 가르쳐 주다가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 후 이곳을 배박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 두리봉:오름실의 남쪽 2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산이다. 산의 지형이 둥그스름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불미골:오름실의 동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토일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소죽통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점두들:두리봉에 있는 들이다. 풀덤, 물덤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풀이 많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와촌(臥村)·오계(梧溪)·구수(龜水·龜首)·남촌(南村)
    이 마을은 구수리와 용계리의 경계지역에 있다. 마을은 탁순창 선생의 후손이 개척  하였으며 와룡산 근처에 위치한다고 하여 와촌이라 하였고, 또 지형이 거북머리와 같이 생겨 구수라 하다가 남씨(南氏)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남촌이라고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구수보건진료소 

 

★ 杯  芳  里 ★

  배방리는 길안면의 동쪽 끝자락에 있다. 동쪽으로는 청송군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의성군과 경계를 하고 있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청송방면의 도로를 따라 8.5km 정도 가면 배방리가 나타난다. 현재 이 마을에는 65가구에 144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배방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안동군 임남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구수리 일부를 통합하여 배방리라고 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잔배이(내배), 텃골(신기),모듬이(외배), 비석거리, 고무실골이 있다
잔배이·잔배이골·내배(內杯)
    이 마을은 배방리의 자연마을 중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외배에서 남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현재 16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 명칭은 주민들이 술을 즐겨 마셨다 하여 잔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선비들이 마을을 개척한 후 풍류시를 읊으며 술잔을 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내배라는 말은 배방리의 안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텃골·점터·기곡(基谷)
    이 마을은 외배에서 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본래는 잔배이의 동구에 해당하는 마을로 지금도 마을 앞 당나무에 두 마을이 같이 동제를 지내고 있다. 잔배이 마을에 인가가 줄어지면서 따로 떨어진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점터(솟점)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지금도 간혹 흙과 돌이 엉긴 것이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8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모드미·새마을·외배(外杯)·신리(新里)
    모드미는 청송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명칭은 잔배이와 비석거리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합수되는 지점이라 하여 모드미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또 잔배이와 비석거리 주민들의 회합이 있을 때는 여기서 모인다 하여 모드미라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마을이 없던 곳에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하여 새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리고 바깥 쪽에 있다고 하여 외배라고도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6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 범 굴:모드미 뒤쪽 산에 있는 굴이다. 여기에 범이 드나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

 

 ▶ 비석거리·비석걸·장승배기·팽나무재이·신기(新基)
    이 마을은 외배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의 옛 지명은 팽나무재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동네 입구에 큰 팽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원래  안동과 청송의 경계에 있는 마을로 옛길의 길가에 장승이 있어 장승배기라고 불리어 지기도 한다. 또 샛길을 내면서 경상도 도백이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이 세워진 이후 마을 이름을 비석거리라고도 붙여졌다 한다.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비석의 뒷면에 가경(嘉慶) 5년(1800)이라 새겨져 있다.
 

새텃골·신기(新基)·신기리(新基里)
    이 마을이 생긴 것은 19세기 초 이씨와 유씨가 모여 살게 되면서이다. 비석거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1㎞ 정도 떨어진 청송군 파천면 땅에 예텃골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에 비해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텃골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하며  예텃골 마을은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6가구가 살고 있다.


 ▶ 고무시골·고목동(古木洞)·고무실곡(古無室谷)
    이 마을은 안동과 청송군 파천면의 경계지역에 있는 것으로 두 개의 시·군에 걸쳐져 있다. 옛날에는 집이 없는 마을이란 뜻으로 고무실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하기도 하고 동네 앞에 큰 고목나무가 있어 고목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이 마을에 40여 가구의 인가가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때도 있었으나 현재 안동지역의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며 청송지역에는 몇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의 행정구역  이 이렇게 갈라지게 된 것은 마을 가운데 개울이 흐르는데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을 정하면서 이 개울을 중심으로 안동군과 청송군으로 갈라 놓았다고 한다.

 

 ★ 龍  溪  里 ★

 용계리는 길안면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 검박골과 교회마 등 2개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그전에는 원용계를 비롯하여 도랫마, 도연, 길목 등의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모두 수몰되어 사라지고 현재의 마을들이 새로 형성된 것이다. 용계리는 원래 안동군 임남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전동, 하국동의 일부를 통합하여 길안면에 편입되면서 용계리라고 하였다. 현재 용계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용계은행나무가 보호되고 있으며 18가구에 48명이 거주하고 있다. 용계라는 명칭은 약계(藥溪) 권순기(權舜紀) 선생이 마을 뒷산을 보고 용이 누운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검박골, 교회마, 도연으로 되어 있으며, 옛날 원용계, 도림마, 도연, 길목은 수몰로 없어졌다

검박골
    이 마을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원용계에 살던 주민들이 그 위에 있던 골짜기인 이곳으로 이전하여 만든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안동권씨이며 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약계 권순기 선생의 정자인 약계정(藥溪亭)이 있다. 약계정은 원래 반변천가에 있었는데 수해로 유실되어 1897년에 이건하였으며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검박골로 가는 길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길안면에서 청송방면의 도로를 따라 1km 정도 가다가 왼쪽에 난 작은 길을 따라 4km 정도 들어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구수리를 통하여 용계은행나무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용계은행나무로 가는 길은 물이 차면 자동차는 들어가지 못한다. 
 ◇ 용계은행나무:용계리에 자리잡고 있는 이 나무는 천연 기념물 제175호로 지정되어있다. 높이가 약 47m이며 수령은 미상이나 500년 가까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조선 선조 때 훈련대장을 지냈던 탁순창 선생이 심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선생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원거시(園居時)에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대(臺)를 쌓고 동지들과 행정계(杏亭契)를 조직하였 고 매년 칠월이면 이 나무 그늘에서 흥겹게 놀았다는 기록이 선생의 연보(年譜)에 남아 있다. 국내의 은행나무로서는 용문사(龍門寺) 및 영월 등지에 몇 그루가 천연 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으나 영남지방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1966년 1월 13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지대를 더 높이 쌓아 보호구역을 설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한밭, 섬산, 대전(大田), 도연(陶淵):이 마을에 넓은 밭이 있어 한밭이라 했으며, 또 옛날에 물 이 저수지같이 고여있다고 하여 도연(陶淵)이라고도 하였다. 폭포 옆에 있는 섬산은 청송에서 내려오는 대수(大水)가 암반을 형성하고 있는 도연폭포로 전부 흐르지 못하고 산을 한바퀴 돌 아 흘러 섬과 같이 생겼다고 섬산이라 부르게도 되었다. 이 마을은 현재 대부분이 수몰되었으 며 산등성이 일부분만이 남았어 1가구가  이주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수몰되기 전 이 마을에는 도연폭포라 하는 작은 폭포와 격진령이라는 암벽이 있었는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도연폭포는 망천에서 반변천을 따라 10㎞ 정도 올라가면 길안면, 임동 면, 임하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 폭포는 안동 팔경 중의 으뜸이었다고 하며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이 폭포와 선찰암 사이에 조그만 독산이 하나 있는데 옛날에는 폭포가 없었으며 강물이 이 독산 끝을 돌아 선찰암 앞으로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지금의 폭포 밑 깊은 소(沼)에 사는 용(龍)과 선찰암에 있는 부처와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유는 용은 물을 바로 흐르게 하자는 것이요, 부처님은 예전대로 돌아 흐르게 하자는 것이었다. 싸움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고 성이 난 용은 그만 꼬리로 산을 쳤다고 한다. 그 산을 친 자리가 갈라져서 지금의 폭포가 되었다고 하며 폭포 밑의 소는 깊어서 명주꾸리 하나를 푼다고 하며 그 속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산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폭포는 아득한 옛날엔 격진령의 산허리가 들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물이 멀리 산자락을 돌아 흐르던 것이 오랜 세월 홍수와 급류가 산허리를 받아 그만 산을 무너 뜨리고 바로 떨어지게 된 것으로 홍수가 지면 비좁은 폭포로만 다 흐를 수가 없어 멀리 산자락을 돌아서 흐른다. 폭포의 높이는 불과 4m에 불과하지만 낙동강 지류 수 개의 폭포 중 가장 으뜸이었다. 격진령은 폭포 옆에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높이 50m 길이 300m의 바위산으로서 층암절벽의 기화요초와 산 마루에 풀잎을 얹고 있는 품이 천하일색(天下一色)이다. 격진령을 아늑히 둘러싼 높고 짙푸른 산색과 검은 벼랑 밑을 미끄럽게 흐르는 파란 물빛과 햇빛 아래 더욱 하얀 돌빛과의 어울림, 폭 포 주변의 경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식을 연발케 한다. 여기 도연(陶淵)의 날카로운 봉우리 긴 절벽이 하필 격진령으로 불러지게 된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삼전도(三田渡)의 굴 욕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선비 김시온이 여기 도연 위에 깊숙이 숨어 산수(山水)에 마음을 붙 여서 울분을 달래며 학문을 벗하여 소요자적(逍遙自適) 했는데 얼마나 세상이 귀찮았으면 격진령이라 했을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었다 하였다. 이러한 사연을 간직한 채 도연폭포와 격진령은 수몰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 새짐재:천지리에서 검박골로 오는 소도로에 있는 고개이다. 새가 집을 짓고 있어써 붙인 명칭 이라고 한다.

 ◇ 검암지:검박골의 북쪽에 있는 저수지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조성된 것으로 수해로 유실된 것 을 40여 년 전에 복구하였다고 한다. 
 ◇ 논   골:검암지 옆에 있는 들판으로 논이 좋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오대골:검박골 서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서 임하면 오대리로 넘 어간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악사골:수몰되기 전 임하면 사의리의 악사마을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검박골의 서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 광 골:검박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광석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광산골이라고도 한다.
 ◇ 사당골:용계은행나무 앞에 있는 골짜기이다. 사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

 ◇ 허개산골:검박골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허씨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용계에는 허씨가 제일 먼저 입향하였다고 하며 다음에 탁씨, 안동권씨 순으로 입향하였다고 한다.
 ◇ 약산골:용계은행나무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약초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

 ◇ 딱박골:닥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약산골 옆에 있다.
 ◇ 괴   골:기이하게 생긴 돌이 많이 나서 붙인 명칭으로 사당골 옆에 있다.

교회마
    이 마을 역시 검박골과 마찬가지로 임하댐 건설 후 수몰민이 새로 형성한 마을이다.

    마을에 교회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현재 1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용계은행나무 전경 

 

 

★ 大  谷  里 ★

 

  대곡리는 길안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청송방면의 도로를 따라 양곡재를 넘고 구수리를 지나서 7.5km 정도 가면 왼쪽에 작은 길이 나타난다. 이 길에서 산고개를 넘어 3.5km 정도 가면 두 갈래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대곡2리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대곡1리로 가는 길이다. 대곡리의 주변은 험준하고 높은 산들이 있으며 대곡리의 여러 자연마을들은 이 산들에 둘러져 있는 분지형태의 마을이다. 마을의 일부분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었으며 현재 한실을 비롯하여 보초, 하직골, 개멸, 추곡, 모현 검단 등 모두 7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대곡리는 원래 한말까지 임하현의 지역이었다.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안동군 임남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정에 따라 부곡리, 검단리와 청송군 부서면의 병보리를 병합하여 대곡리라고 하면서 길안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대곡리에는 56가구에 13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자연부락으로 ①대곡1리에 한실, 하직골(아래하직골, 웃하직골), 보초, 개멸  ②대곡2리에 가라골(상추, 하추) 모현, 검당이가 있다

한실·대곡(大谷)
   한실은 대곡1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대곡리로 들어가는 두 갈래길에서 왼쪽으로 조금 들어오면 마을이 있다. 대곡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이며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행정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마을 명칭은 마을이 위치하는 골이 깊고 크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하며 또 차거운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옛날 임동면의 지례와 지리가 길안면에 속하였을 때 길안면 소재지를 갈려면 이 마을을 거쳐서 가야했다고 한다. 한실은 의성김씨의 동성부락으로 현재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예 재:한실의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한실에서 구수리의 남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옛날 에 피난을 이곳까지 왔는데 골짜기가 하도 험해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돌아갔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보풀때·보초(甫草)
    이 마을은 대곡1리에 속하는데 청송으로 가는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작은 길로 접어들어 2.5km 정도 들어오면 오른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명칭은 마을에 풀이 많이 자란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대곡리와 구수리 사이에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수리와 대곡리 주민들이 풀을 베기 위해 많이 왔다고 한다. 그 후 1976년 전화를 넣으면서 보초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윗쪽에는 흰돌을 캐는 광산이 있다.
 

해질골·하직골·화지곡(花枝谷)
    이 마을은 대곡1리에 속하며 한실에서 서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하직골, 중하직골, 하하직골 등 3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중·하하직골은 수몰되었으며 현재는 상하직골만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8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명칭은 일락동(日落洞)의 낙자(落字)가 불만스러워 해질골을 그대로 음차(音叉)하여 화지골(花枝谷)이라 하였는 데서 유래된다고 한다

 

가마골·개맬·부곡(釜谷)
    이 마을은 대곡1리에 속하며 한실에서 북쪽으로 길을 따라서 가다가 2k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우측에 난 길을 따라 1km 정도 가면 나타난다. 마을의 지형이 가마솥 모양 이어서 처음에는 가마골이라 하였는데 차츰 이 말이 변하여 개맬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한자로 쓸 때는 처음 이름을 따라 부곡이라고 쓰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가라골·추곡(楸谷)
    가라골은 대곡2리에 속하는 마을로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1km 정도 들어가면 나타 난다. 옛날 이 마을에는 가래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가라골이라 하였다. 또 이곳은 행정구역상 청송군 파천면 병부리와 안동군 길안면 대곡리의 경계면에서 안동과 청송을 갈라지게 하는 골짜기인데 이로 인하여 가라골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진다. 가라골은 상추와 하추 등 2개의 마을로 나누어지는데 먼저 나타나는 것이 하추이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상추가 나타난다. 상추에는 7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하추에는 4가구가 거주한다.


 ▶ 모티·모치·모현(茅峴)
    모티는 대곡2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가라골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검당이에서 약 300년 전 안동김씨가 이주하여 불모지를 농경지로 만들었다. 그 당시 큰 못이 마을 앞에 있어서 못의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뒤로 부르다가 모티로 되었다고 한다.  현재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검당이·검단(儉丹)
   이 마을은 모현에서 동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임진왜란 때 안동김씨가 이 마을로 피난을 와서 황무지를 개척하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 명칭은 피난을 오기 전에 먼저 살았던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따와서 검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대곡가는 길

 

 (구)대곡초등학교

 

대곡1리 마을회관

 

 

★ 縣  下  里 ★

   현하리는 길안면의 서남쪽에 있으며 1리, 2리, 3리로 구분된다. 길안면의 남쪽에 있어서 의성과 인접하고 있기도 하다. 현하리는 원래 길안현(吉安縣)의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조선 숙종 때 길안면이 되고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임서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현상리, 현하리, 오도리 일부를 합쳐서 현하리라고 하였으며 1931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임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에 길안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2002년 11월 30일 기준으로 235가구에 459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자연부락으로 ①현하1리에 현골, 잉골, 중리, ②현하2리에 팽목, 쇠점, 못골, 후현, 개간지, ③현하3리에 삽실(사골), 골삽실(원사곡), 새마(신기)가 있다


 

현골·현동(縣洞)·두현·두곡(杜谷)
   현골은 현하1리에 속하는 자연마을이다. 길안현의 현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하리라는 명칭도 이 마을에서 따 온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두현이라고 했다가 조선 초기에는 두곡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현재 12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며 마을 안에 두릉고택이라는 고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옥안터:고려 현종 때 옥을 보관하는 집이 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는 옥안밭이라고도 하며 현골과 중리 사이에 있으며 과수원이 되었다.

 

현하1리 현골소재 두릉구택 


 ▶ 중간마·중리(中里)
    중리는 현하1리의 자연마을로 큰삽실의 남쪽에 있다. 마을이 잉골과 현골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중리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5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옹골·잉골·의흥(義興)
   잉골은 현하3리의 삽실에서 1리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천석의 부자가 살고 있는 부유한 마을이었고 혹은 누구나 여기서 살면 부유해 진다고 하여 의흥이라 명하여 왔다. 부근에 장은사라고 하는 고려시대에 지어진 큰 사찰이 있었던 절골이라는 곳이 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현재 이 마을에는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팽나무정이·팽목(彭木)
    이 마을은 현하2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약 천년 전 고려 왕건 당시 성명 미상의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개척 당시 동구에 커다란 팽나무가 한 그루 있어 팽목이라 칭하여 왔다. 이 마을에는 안동권씨가 주를 이루며 33가구가 살고 있다. 팽나무는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 중앙에 있다. 
 

못골·지곡(池谷)
   이 마을은 현하2리에 속하는 지역으로 팽목에서 서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옆에 금곡지(金谷池)라는 못이 있다고 하여 못골, 지곡이라는 명칭이 붙여 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쇠점·새점·소점·금곡(金谷)
   이 마을은 팽목에서 서남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못골과 인접해 있는 마을이며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 후, 금속물로 금을 만드는 대장간이 설치 되었다고 하여 쇠점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용터지기:고려 초엽 어느 날 밤에 뇌성과 말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고 한다. 날이 밝아 그 곳을 찾아가니, 산이 갈라지고, 용마가 땅에서 솟았다 하여 용터지기, 용골터라 고 전한다. 또 옛날 날개가 달린 백마가 나타나서 천지의 산하리(山下里)로 날아가므로 용마를 찾아가 보니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힌 아기장수가 태어 났다고 한다. 이 아기의 부모들이 이 아기가 나중에 잘못되어 집안을 망치게 할 것 같아서 죽여버리니 용마가 소(沼)에 빠져 죽었다 고 한다. 이로 인하여 용골터라고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용터지기는 쇠점과 후현 사이의 골 짜기에 있다.

 ◇ 오랑실, 오름삭골:골짜기에 약수가 있었는데 차갑기로 유명하여 옻이 오른 사람은 그 약수로 씻으면 효험이 좋았다고 한다. 용터지기 아래에 있다.

뒤티·후현(後峴)
   후현은 현하2리의 끝자락에 있는 마을로 길안면과 의성의 경계지점에 있다. 팽목에서 서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산골 마을이다. 옛날 길안현의 뒷부분에 있다고 하여 뒤티 또는 후현이라는 명칭이 유래된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디티재, 서낭티:후현과 의성의 경계지점에 있는 고개이다. 후현의 뒤쪽에 있어서 디티재라고 하며 여기에 서낭당 있어서 서낭티라고도 한다.
 ◇ 고일고개:후현에서 임하면 고일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를 통하면 고일로 넘어갈 수 있어 붙인 명칭이다.

 ◇ 매봉산:후현의 뒤쪽에 있는 산이다.

 

개간지

    이 마을은 못골과 후현 사이의 개간지에 자연적으로 생긴 마을로 한때 10여가구가 살았으나 교통여건이 불편하여 현재 3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소득은 사과이다

 

삽실·사곡(沙谷)·큰삽실
   이 약 500년 전 개척되었는데 당시 마을 앞 하천에 모래가 많이 있다고 하여 삽실이라고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큰삽실이라는 명칭은 나중에 작은삽실이 형성된 후 붙여진 명칭이다.


 ◇ 조산등:삽실의 서쪽에 있는 고개로 삽실과 골삽실의 경계지점이다. 고개의 경사가 심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작은삽실·골삽실·소사곡(小沙谷), 원사곡
    이 마을은 사곡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사곡(沙谷)에서 분리된 마을이라 하여 마을 명칭이 유래한다. 이 마을에는 호식골타령이라는 민요가 전설과 함께 전해오는데 약 150년 전 봄에 생활이 곤란한 가정의 부인이 남매를 집에 두고 산나물을 하러 갔다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다 하여 호식골타령이라 전한다. 또 서당터가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때 한 선비가 서당을 개설하여 학문에 힘썼다고 전하며 약 220년 전에 없어지고,  그 터에 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사곡에서 조산등을 넘어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도를 따라 길안면 초입에서 우측에 난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이 길로 접어드는 입구에는 원사곡이라는 입석이 세워져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새마을·신기(新基)
    이 마을은 큰삽실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새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새마을, 신기라 하며 현재 여러 성씨 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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