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남선면 유래

오토산 2012. 5. 16. 02:29

 

 

 

 

 

 

 

연 혁

  • 삼 한 시 대 - 안동부에 속함
  • 조 선 시 대 - 안동관찰부에 속함
  • 1895. 5. 26 - 16개리 남선면으로 개칭(고종 32년)
  • 1914. 3. 1 - 군, 면 폐합으로 10개리로 개편
  • 1983. 2. 15 - 행정구역개편 정상,정하 2개리 강남동으로 편입
  • 1991. 11. 15 - 남선면 청사준공
  • 1995. 1. 1 - 도농복합형 안동시 남선면으로 개칭
  • 1995. 12. 1 - 안동시조례개정(조례175호) 이천3리 신설(8개반)

 

지역특성

  • 위 치 - 안동시청에서 동남쪽으로 10.9㎞ 지점에 위치
  • 소재지를 중심으로 동부지역은 평야지로 시설작물 재배
  • 서부지역은 산간오지로 고추, 참깨, 마늘, 양파의 주산지
  • 1986년 신석1리 농공단지 56,879㎡ 조성
  • 1990 ~ 1993년 농어촌 정주권개발사업 실시
  • 특산물 : 구미리를 중심으로 시설 풋호박재배
  • 시민휴식공간 : 갈라산 산림욕장 및 등산로설치

 

 

구미리

1. 마을의 자연환경
남선면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서쪽은 안동시의 정상동과 접경하여 구릉이고 북쪽은 송천동과 반변천을 사이에 두고 접경하고 있다. 구미천이 마을의 주앙을 남류(南流)하여 들을 만들고 있으며 남쪽은 도로리와 신흥리인데 구릉이며 동쪽은 신석리인데 갯들이다.
2. 마을의 역사
본래 안동시남선면 지역으로 기룡산(작우산)에서 발원한 귀미걸(구미천)이 구비쳐 흘러서 구비·구미(九尾)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일동(百日洞)을 합병하여 구미리라 하였다. 남선면의 행정상 중심지가 된다. 면사무소. 치안센터. 초등학교. 우체국. 예비군면대. 안동농협남선지점 등의 기관이 있다. 마을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 양지마라 부르고 마을 앞에 있는 들을 귀밋들(九尾坪)이다. 양지마의 서쪽에는 조선시대에 사창(社倉)이 있었다하여 사창들이라 한다. 마을이 북쪽을 향하고 있어 음지마라 부르며 마을 한가운데에 귀은정(龜隱亭)이 있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당시 류영경(柳永慶)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 귀은(龜隱) 김령(金鈴)공의 유덕을 추모하여 향내(鄕內)의 유림이 세운것이다. 음지마의 앞들을 수양평(垂楊坪)이라고도 한다. 서쪽에는 지루골(指老谷). 남서쪽에는 팽나무가 있다고 팽나무골(彭木谷). 북동쪽에는 암성곡(岩城谷). 뒷쪽 에는 한수골(漢水谷)이며 한수골 동편 골짜기는 큰옥골이다. 면사무소와 치안센터. 초등학교. 우체국과 나누어 지는 삼거리는 음식점이 있고 면민의 화합의 장소가 되어 왔으니 주막걸이라 부른다. 백일(白日)은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백일곡(白日谷)이 골자기가 있고 옛날 마을 뒷산에서 백일장(白日場)을 개최한 일이 있어 백일이라고 한다.

도로리

1. 마을의 자연환경
마을의 동쪽 경계에 둔지산(해발402m)이 솟았고 남쪽에 의성군단촌면과 경계에는 갈라산(해발569.7m)이 솟아있다. 북쪽은 정하동이며 남쪽은 의성군 단촌면이고 동쪽은 구미리.신흥리이고 서쪽은 현내리와 외하리이다.
2. 마을의 역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노리(指老里).신사동(新寺洞).백양동(白楊洞).사부곡(沙夫谷).도율리(道栗里) 일부를 병합하여 도유리와 지노리의 이름을 따서 도로리(道老里)라 한다. 사부골·사부곡(巳浮谷·沙夫谷)마을은 둔지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이 높고 골이 깊어 하천이 길며 암석으로 이루어져 모래를 찾아 볼 수 없어서 모래의 지아비란 뜻으로 사부곡이라 하며 또 다른 말은 앞 산 줄기가 흡사 뱀이 꿈틀거리는 형국이라 해서 사두혈(巳頭穴)이니 사부곡이라 한다. 사부골 마을 남쪽 갈라산 문필봉(文筆峯)에 기우단(祈雨壇)이 있어 한발이 극심할 때는 안동부사가 이곳을 찾아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며 산중턱에 위치한 갈라당(葛蘿堂)은 마을에서 신성시 하는 당으로 매년 음력 3월14일 당제를 지낸다. 남쪽에 위치한 마을은 사시나무골(백양동)로 마을 주위에 사시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절골(新寺谷)은 옛날 새로지은 절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리골·지로골(指老谷)은 이 마을 앞산에서 회의를 하였는데 이 마을을 가리킬 때 노인이 손가락질을 하였다하여 지로골이라 하였다 한다.




신석리

1. 마을의 자연환경
남선면에서 가장 넓은 들을 갖는 마을로서 반변천의 남안이 펼친 갯들마을이다. 송천동과 반변천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동쪽은 이천리이고 서쪽은 구미리 남쪽은 신흥리·임하면 추목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원숭이 모양의 바위가 마을 앞 들 가운데 있다 하여 원숭이 신(申) 돌석(石)으로 마을 이름을 삼은 것이라 하며 다르게는 납돌·납들이라고도 한다. 납들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에 초당이 있었다고 하여 초당골(草堂谷)이라 부른다. 초당골에는 사당(祠堂)으로서 조선 영조대 공신인 화원군(花原君)으로 봉해진 권희학(權喜學)선생의 영정을 모신 봉강 영당(鳳岡影堂)이 있다. 화원군 영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인 맞배지붕이다. 납들의 남쪽마을에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복주(福州)로 피난했을 때 축성했던 자취가 남아있어 성골(城谷)이라 한다. 성골에는 신석산성·왕굴·임금바위·봉수지등 유적이 남아있다. 납들마을 북쪽에 기니리·기늘·기느리·인곡(麟谷)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600여 년 전에 김(金)씨가 개척하였다 하고 뒷산이 늘 서쪽을 가리고 있어 그늘이 진다고 하여 기늘이라고 한다. 이 마을 위쪽이 웃기느리. 아래쪽에 아랫기느리가 있다. 인골에는 피부병에 좋다는 기늘 약수탕이 있으며 부근에 조선 고종때 안동부사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년 ~1922년)의 친필 동대(東臺)가 암각되어 있으며 아랫기느리에는 효자 권성범(權聖範)과 그의 아들 사도(思度)의 효행을 기리는 세효각(世孝閣)이있다.

남선농공단지 전경

신흥리

1. 마을의 자연환경
남선면의 남서편에 위치하는 마을로 북쪽에 구미리와 신석리가있다. 기룡산(해발507.7m)이 마을 뒤쪽에 솟아 구미천이 흐르게 하여 좁다란 시냇가의 들을 이루고 주위는 구릉지대이다. 동쪽은 임하면추목리 이고 서쪽은 도로리이며 남쪽은 의성군 점곡면과 경계를 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고려시대 윤(尹)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망실(望實)이라 칭하고 살아오다가 마을이 운수가 없어 쇠퇴해갈 무렵 노승이 신흥(新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부터 부유한 마을이 되었다. 지금도 윤(尹)씨의 집단마을이다. 신흥리는 윷놀이가 성행했던 마을로 채윷대풀이라는 윷노래가 전해오고 있다. 마을의 동쪽 골짜기를 살골. 남동쪽 골짜기가 올미처럼 생겼다고 올미골이라 하며 자귀같이 생긴 작우산이 마을 동쪽에 위치하며 신흥리와 구미리 경계에 참실(진실·眞實)바우가있고 1943년4월 축조된 진실유지(眞實溜池)가 있다.


외하리

1. 마을의 자연환경
갈라산에서 발원한 노림천이 마을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그 시내가 이루는 갯들과 갈라산 줄기의 구릉지대에 산재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북쪽은 현내리. 동쪽은 도로리. 서쪽은 원림리 이고 남쪽은 의성군 단촌면이다.
2. 마을의 역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무수무(舞袖舞).중리(中里).신기(新基).음지(陰地).양지(陽地)등의 마을을 병합하여 외하리라 한다. 무수무·상무수무·무선동(舞仙洞)은 장수지 남쪽에 있는 마을로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전설에 따라 무선동이라고도 하며 또 물이 많다고하여 무수무. 위쪽에 있다고 상무수라고도 한다. 마을 부근에 밤나무선골. 고무재. 고무재골. 아홉굽이가 되어 있다는 아홉사리재. 약물골. 신부가 초행길에 가마채가 부러져 뒹굴러 그 자리에서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각시바위. 북동쪽에 갈라산 문필봉이 있고 1931년에 축조된 물이 많고 수원이 오래 간다는 장수지(長水池)가 있다. 중마·중리(中里)는 상무수무와 샛터마을 중간에 있다하여 중마라 하며 7월 풋굿놀이를 할 때 일꾼들이 떡을 구워 지고가서 제사를 지내고 먹고 놀았다는 풋굿대박과 달계골. 옻이 오른데 효험이 있다는 옻물탕이 있다. 외하리에서 가장 큰마을인 큰마·대촌(大村)은 넓은 벌판인데 옛날에 손(孫)씨 들이 집단으로 살았다 하여 큰마라 하게 되었다. 또한 마을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망아지가 빠져 죽어서 묻어 버렸다고 한다. 큰마 북동쪽에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우두골이 있다. 음지마·음촌(陰村)은 마을 뒷산이 있어 음지가 지므로 음지마라 하며 마을 동남쪽에 벽수지(碧水池)가 있다. 옛날에 나(羅)씨가 살았다는 날근골. 벽수골. 악골. 새나무절골. 가느골. 끄승앳골이 있다. 새터마을은 새로 터를 잡아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고 하며 마을 하천변에 관(冠)모양의 관바우가 있다. 이 관바우가 넘어지면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마을 뒤에 람갈정(覽葛亭)이 있다.


원림리

1. 마을의 자연환경
남선면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노림천의 지류가 마을의 가운데를 관류하면서 들과 구릉에 산재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북쪽은 수상동.동쪽은 현내리. 남쪽은 의성군 단촌면. 서쪽은 남후면 무릉리 이다.
2. 마을의 역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암리(魯岩里). 노림리(魯林里). 원리(院里). 토파리. 외하리의 각 일부를 합병하여 원리와 노림의 이름을 따서 원림리(院林里)라고 한다. 노암(魯岩)마는 서원마 남쪽에 있는 마을로 권(權)씨가 일직에서 이곳에 시거(始居)할 때 마을 이름에 암(岩)자를 쓰면 좋다고 하여 노암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서원마·원리(院里)는 조선 효종4년 분지(賁址) 남치리(南致利)선생을 배향하기 위한 노림서원(魯林書院)이 창설되었으나 고종5년(1668년)에 철폐된 후 서원마 또는 서원의 원자를 써서 원리라고 부른다. 서원마 동쪽에 비룡상천(飛龍上天)의 형국인 천지산이 있고 이 산에 분지(賁址) 남치리(南致利)선생의 묘소가 있으며 부근에 강정골. 재인절골. 새절골. 혈래골. 독산이 있다. 뒷 산맥이 높게 둘러싸고 마을이 남향이 되어 양지바르다고 하여 양지마·양지(陽地)마을 이라 하며 마을입구 회화나무 아래에 주민들이 위하는 선돌이 있다. 손고개·손치는 마을뒤 밀개산 밑에 있는 고개인데 손(孫)씨들이 집단으로 살았다고 하여 손고개로 전해왔고 구석마·우촌(?村)은 원림리 중심 마을에서 한쪽 모퉁이 구석진곳에 있다고 구석마라한다. 원림리 남동쪽에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는 토갓마을이 있다. 토갓마을 가는 중간에 40여년 전에 생긴 중마·중토갓·중토지(中兎地)마을이 있고 마을 앞에 토선지(兎先池)가있다.


이천리

1. 마을의 자연환경
남선면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반변천의 남안(南岸)갯들과 남쪽으로는 구릉으로 이루어진 산간이다. 북쪽은 반변천을 건너 송천동 이고 동쪽은 이천천을 사이에 두고 임하면신덕리·추목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본래 남선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이곡동· 하신석리 ·천평동의 각 일부와 임서면의 평지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곡과 천평의 이름을 따서 이천리라 한다. 이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은 뱁실(이곡)인데 마을 중앙에 아주 큰 배나무가 있어서 뱁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배나무는 없어졌다. 마을안쪽에 1943년 3월에 축조한 이곡유지(梨谷溜池)가 있으며 이 곡유지 안쪽에 이천유지(梨泉溜池)가 있다. 뱁실 남족 마을인 샘들·천평(泉坪)은 원래 강이 흐르던 곳이 메워져 마을이 되었다. 전에는 배(裵)씨 집단마을로 큰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이 마르면서 배씨가 떠나야 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런데 중년에 우물이 마른적이 있어 배씨는 거의 떠나고 송(宋)씨 집단마을이다. 샘들마을 뒷산 뒷산은 모양이 매를 닮았다고 매봉산이다. 이 산에 늙은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는데 동수(洞守)나무로 섬기고 있다. 마을 앞들의 웅덩이는 집앞웅뎅이라 부른다. 마을 뒷쪽에 천평유지(泉坪溜池)가 있다.뱁실과 샘들사이에 거북돌이 있다. 거북돌의 입이 원래 뱁실마을을 향하고 있어서 풍년이 들어도 뱁실마을은 가난하게 산다고한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이 거북돌의 머리를 반대로 돌렸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다른 곳을 보고 먹어서 똥을 뱁실마을에 누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현내리

1. 마을의 자연환경
남선면 서북쪽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노림천이 마을의 남서쪽에 흘러 시냇가의 들을 이루고 그 사이에 마을이 산재한다. 북쪽은 정하동.동쪽은 도로리. 남쪽은 외하리. 서쪽은 원림리이다.
2. 마을의 역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리·가현·도율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현(加峴)과 내리(內里)의 이름을 따서 현내리(峴內里)라 한다. 현내리에서 가장 큰 마을은 내리이다. 옛날에 동구밖에 큰 소(沼)와 소나무 안에 있다고 하여 솔안 또는 내리라고 하였다 하나 소와 소나무는 없어지고 그 부근에 소태나무가 서 있으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호수 아래 염병을 막기 위한 액막이용 선돌이 서 있다. 마을 뒤쪽에 산천정사(山泉精舍)가 있고 북쪽에 가릿골. 남쪽에 망싯골.동쪽에 재골이 있다. 내리 북서쪽에 수상동으로 가는 바람티(풍현·風峴)와 산모양이 나팔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곰바골이 있다. 내리 마을 남동쪽에 더티·가현(加峴) 마을이 있고 1994년 축조된 가현지(加峴池)가 있다. 더티마을 북동쪽에 깊은 골에 있는 마을로 옛날 마을 앞 길 옆에 결실이 안되는 큰밤나무가 있었다고 마을 이름을 돗밤실·도율(道栗)이라 하고 있다.

참고문헌
안동의 지명유래(안동민속박물관 2002. 12)
경북마을지(경상북도 199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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