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時代(고려시대)樞密院副使(추밀원부사)을 지낸 權守平(권수평)은 高麗史(
고려사)에 淸貧(청빈)한 官吏(관리)의 表像(표상)으로 記錄(기록)된 人物(인물)이다. 그의 아들 權威(권위)는 太子(태자)의 太師(태사)로 權氏家門(권씨가문)
最初(최초)로 忠憲(충헌)이란 諡號(시호)를 받은 人物(인물)이며,權守平(권수평
)의 曾孫(증손)이며 贊成事(찬성사) 權端(권단)의 아들인 權溥(권부)는 自身(자신)을 包含(포함)해 그의 아들 5兄弟(형제)와 그의 사위 3名이 모두 君(군)에 封(봉)해져서 名聲(명성)을 떨쳤다.當代九封君(당대9봉군)은 歷史上(역사상)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이 家門(가문)의 자랑이다.朝鮮時代(조선시대)에들어 서면서 安東權氏(안동권씨)는 3百59名의 文科(문과) 及第者(급제자)를 輩出(배출)하여 燦爛(찬란)한 꽃을 피운다.
權近(권근,1352~1409) : 號는 陽村(양촌). 諡號(시호)는 文忠(문충). 李穡(이색)과 鄭夢周(정몽주)의 門下(문하)에서 學文(학문)을 배우고, 高麗(고려)恭愍
王(공민왕)때 17歲(세)로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였다. 高麗(고려) 禑王(우왕)때 成均館(성균관) 大司成(대사성) 禮義判書(예의판서)等(등)을 歷任(역임). 朝鮮(조선)太祖(태조)때 私兵廢止(사병폐지)를主張(주장)하여王權確立(왕권확립)에 功(공)을 세웠다. 禮文館(예문관) 大提學(대제학),大司成(대사성),議政府 贊成事(의정부찬성사) 等(등)을 歷任(역임)하였다.王命(왕명)으로'東國史略(동
국사략)'을 編纂(편찬)하고, '入學圖說(입학도설)'은 後(후)에 李滉(이황), 張顯光(장현광) 等(등)에게 큰 影嚮(영향)을 끼쳤다. 그밖의 著書(저서)로는 陽村集(양촌집), 四書五經口訣(사서오경구결) 等(등)이 있다.
權蹄(권제,1387~1445) : 權近(권근)의 둘째 아들.號(호)는 止齎(지재),諡號(시호)는 文景(문경).太宗(태종)때 集賢殿(집현전) 副提學(부제학),漢城府尹(한성부윤)을 지내고, 世宗(세종)때(1429年) 明(명)나라에 進獻使(진헌사)로 다녀와 京畿道(경기도)觀察使(관찰사)가 되었다.1435年 吏曺判書(이조판서)에 昇進(승진
),1436年'東國年代(동국연대)'를 編纂(편찬)하고, 다음해에 禮曺判書(예조판서)를 지내고,知中樞院事(지중추언사),知春秋院事(지춘추원사) 等(등)을 지냄. 1440年 '高麗史(고려사)' 編纂(편찬)에 參與(참여), 1445年(世宗 27年)右贊成(우찬성)이 되어 鄭麟趾(정인지), 安祉(안지) 等(등)과 함께 '龍飛御天歌(용비어천가)를 지어 王(왕)에게 바침.
權橃(권벌)(1478~1548) : 諡號(시호)는 忠貞(충정). 號(호)는 沖齎(충재).高麗 中宗(고려중종)때 禮曺判書(예조판서)를 지냄.宣祖初(선조초)에 左議政(좌의정)에 追贈(추증)됨.
權轍(권철,1503~1578) : 權慄(권률)의 아버지. 明宗(명종)때 3政丞(정승)을 두루 지며 오랜 期間(기간) 政權(정권)에 있었 으나 아무도 그의 허물을 말하는 이가 없을 程度(정도)이었다.
權慄(권율,1537~1592) : 號(호)는 晩翠堂(만취당).諡號(시호)는 忠壯(충장).領議政(여의정) 權轍(권철)의 아들. 壬辰倭亂(임진왜란)때 光州牧使(관주목사)로 錦山郡(금산군)伊山祠(이산사)에서 倭軍(왜군)을 大破(대파),全羅道(전라도)巡擦使9순찰사)로 水原(수원) 禿旺山城(독왕산성)에서 敵(적)을 大破(대파)하고, 幸州山城(행주산성)에서 3萬(만) 大軍(대군)과 싸워 敵兵(적병) 2萬4千名의 死傷者(사상자)를 내게한 幸州大捷9행주대첩)의 功(공)을 세워 都元帥(도원수)에 오르고'幸州(행주)치마'의 由來(유래)를 낳음.丁酉再亂(정유재란)에서도 功(공)을 많이 세워 죽은 後(후)에 領議政(여의정)에 追贈(추증)됨.
權俠(1542~1618) :諡號(시호)는 忠貞(충정).壬辰倭亂(임진왜란)때 掌令(장령)으로 서울 死守(사수)를 主張(주장).1597年 丁酉再亂(정유재란)때 告急使(고급사)로 明(명)나라에가서 明(명)나라 軍士(군사)를 끌어들이는데 成功(성공), 歸國後(귀국후)戶曺參議(호조참의)에 오르고 1604年 吉昌君(길창군)에 封(봉)해짐. 1607年 禮曺判書(예조판서)에 올랐으나 光海君(광해군)때 官職(관직)을 버리고 杜門不出(두문불출)함.
權尙夏(권상하,1641~1721) : 號(호)는 遂菴(수암). 諡號(시호)는 文純(문순). 朝鮮(조선)의 學者(학자). 宋時烈(송시열)의 首弟子(수제자).宋時烈(송시열)이 濟州(제주)에서 賜藥(사약)을 받고 죽게되자 離別(이별)을 告(고)하고 衣服(의복)과 冊(책)을 遺品(유품)으로 받음.肅宗(숙종)이 寵愛(총애)하여 右議政(우의정),左議政(좌의정)에 任命(임명)하였으나 모두 辭讓(사양)함. 李珥(이이),宋時烈(송시열)로 繼承(계승)된 畿湖學派(기호학파)의 指導者(지도자)임. 글씨에도 뛰어남.
權日身(권일신, ?~1791) :朝鮮時代(조선시대)의 天主敎(천주교)인. 敎名(교명)은 프란시스 자비에르.實學者(실학자)인 安鼎福(안정복)의 사위.南人(남인)의學者(학자)로 陽明學(양명학)을 硏究(연구)하다 1782年(正祖 6年) 李蘗(이벽)의 勸誘(권유)로 天主敎(천주교)에 入敎(입교).1782年 淸(청)나라에서 領洗(영세)를받은 李承薰(이승훈)에게 最初(최초)로 領洗(영세)를 받았다.1787年 只今(지금)의 明洞聖堂(1898年築成) 附近(부근)明禮坊(명례방)에서 李承薰(이승훈),丁若銓(정약전)等(등)朝鮮(조선)의 敎人(교인)들이 모여 職制(직제)를 結成(결성)하여 朝鮮天主敎會(조선천주교회)를 創立(창립), 主敎(천주)가 되어 1789年 敎友(교우) 禹某(우모)를 北京(북경)에보내 北京(북경)에온 神父(신부)의 派遣(파견)을 要請(요청)하였다.1791年 辛亥迫害(신해박해)때 李承薰(이승훈)과 함께 濟州島(제주도)로 歸養(귀양)을갔으나 老母(노모)를 生覺(생각)하여 信仰(신앙)에 動搖(도요)가 生(생)겨 背敎(배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