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산과 넉넉한 강이 만나 生命愛가 넘쳐난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맞물려 태극형상을 이루고 있는 하회마을 일대의 전경. 남산에서 북쪽을 향해 바라본 모습이다. 가운데 암벽이 부용대이고, 하천변 지맥(매봉산) 뒤쪽 왼편이 도청 신도시가 들어서는 천응산, 오른쪽이 좌청룡격인 옥정산이다. 오른쪽 뒤로 일부 보이는 넓은 들이 바로 이 일대 여러 반촌(班村)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준 풍산들이다. |
동양의 음양오행론은 우주 만물의 구성 원리요, 변화하는 사물의 내재 규율이다. 불완전한 두 개의 반원(半圓)이 하나의 완벽한 원(圓)인 태극(太極)을 이뤄가는 하모니의 과정이다. 그것은 유교·불교·도교가 추구했던 ‘도(道)’이며, 우주의 가장 주된 흐름인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람의 정신은 양(陽)이요, 신체는 음(陰)이다. 신체의 기(氣)는 양기(陽氣)요, 혈(血)은 음기(陰氣)다. 건강하다는 것은 곧 정신과 육체, 우리 몸의 기와 혈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땅도 마찬가지다. 음인 산과 양인 강물이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룬 곳이 명당이다. 우리 조상이 배산임수나 산수환포하는 터를 각별히 선호했던 이유다. 풍수는 서양의 ‘토포필리아(topophilia; 장소애)’다. 토포필리아는 중국계 미국인 지리학자 이-푸 투안이 ‘장소’를 뜻하는 희랍어 ‘토포(topos)’와 ‘사랑한다’는 의미의 ‘필로스(philos)’를 합쳐서 만든 개념이다.
전국적으로 토포필리아 열풍이 불고 있다. 지자체마다 전통 장소를 복원하고, 둘레길·올레길·누리길·마실길·강변길·자전거길 등을 만드는 데 열심이다. 주민과 관광객에게 장소애를 심어 주고 더 나아가 향토애 내지 국토애를 함양하기 위함이다. 이 땅의 수많은 삶터 중에서도 토포필리아가 잘 형성되어 있는 곳은 고풍스러운 반촌(班村)이다. 산자락 하나, 도랑 하나에도 의미가 부여돼 있고, 그에 대한 애착심 또한 남다르다. 토포필리아가 살아 숨쉬는 마을은 쉽게 쇠퇴하지 않는다. 주민이 부여하는 가치들의 안식처이며, 오랜 역사적 깊이와 형이상학적 위엄성을 갖춘 곳이며,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의 중심이며,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또 전승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마을들이 에워싸고 있는 한복판에 경북도청이 이전해 간다. 하회마을·가일마을·소산리·오미리·백송리·구담리 등 말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명촌(名村) 중의 명촌들이다. 뚜렷하고 개성 있는 ‘○○명당’이라는 지리적 아이덴티티를 갖추고 그동안 숱한 인물을 배출해 온 수백 년 전통의 뿌리 깊은 마을들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리 경관(景觀)과 함축된 스토리는 살아 있는 현장 박물관이다. 도청 신도시 터 주변은 또한 숲이 우거진 산과 넉넉한 강물, 그리고 넓은 들과 호수로 되어 있어 저절로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생명애)가 우러나는 장소다. 이미 유교문화길이 만들어져 있는데다, 앞으로 학가산에서 비룡산까지 이어지는 문수지맥과 낙동강·내성천을 따라 역사와 생태를 체험하는 길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이 도청 신도시의 테크노필리아(technophilia; 기술애)나 네오필리아(neophilia; 창조애)와 어우러져 그야말로 전통적인 음과 현대적인 양이 조화로운 새천년의 더없이 좋은 삶터가 될 것이다.
공간과 장소는 다르다. 사람들은 도시 공간에서 불안과 짜증을 쉽게 느끼지만, 고향에서는 푸근함을 느끼며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고향은 공간이 인간화되고 사회화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서울 주변 신도시들의 땅이나 집은 그저 도구나 교환의 대상일 뿐 더 이상 장소애의 대상은 아니다. 경제성을 좇아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고 있는 까닭에 집이나 삶터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공간을 ‘터’나 ‘터전’으로 여기면 그것은 매우 다른 의미가 된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장소는 가치지향성이 높다. 단순한 물리적인 대상도 아니고, 지도나 지적도에 오르면 그만일 객체도 아니다. 그것은 의미론의 대상이다.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동태(動態)다.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 신념, 가치를 형성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며,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갖고 공간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도청 신도시 터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 인공적 환경의 스토리는 곧 경북 신 도도(道都)의 토포필리아 정립과 직접 연관된다. 이미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고, 또한 도청 이전지의 지척에 있어 앞으로 신도시 주민도 자주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세 곳이 있다. 하회마을 부용대(芙蓉臺)와 비룡산 회룡대(回龍臺), 그리고 백송리 선몽대(仙夢臺)다. 필자가 3대(三臺)라 칭하는 이 세 곳은 각박한 물질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장소들이다. 단, 껍데기 공간상(相)을 넘어 내재된 장소성을 읽는다는 전제하에서다. 먼저 부용대부터 가보도록 하자.
하회마을 고샅길과 흙으로 지어진 집과 담장.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마을의 남쪽에 위치한 정자관, 속칭 감투봉이다. 세계문화유산 역사마을다운 양명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삶터다. |
부용대는 화천(花川: 낙동강) 건너 하회마을 북쪽에 위치한 바위 절벽이다. 감입곡류천에 나타나는 일종의 하식애다. 그곳에 오르면 화산(花山) 끝자락에 터 잡고 있는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용은 연꽃을 뜻하고, 부용대는 연꽃 모양의 마을을 내려다보는 대(臺)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회마을을 온갖 형상에 빗대어 놓았다.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듯하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외에도 산줄기와 물줄기가 태극 형태로 맞물린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 배(舟)가 가는 듯하다는 행주형(行舟形), 다리미형, 가운데가 볼록하다 하여 삿갓형, 버선형, 심지어는 소가 누워 있는 듯하다는 와우형(臥牛形)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아마도 마을터 자체만 보느냐, 아니면 터와 강줄기를 연관시켜 보느냐, 그것도 아니면 아예 화산까지 다 포함시켜 보느냐에 따라 제각기 그 모습이 다르게 비춰지기 때문일 것이다.
도청 이전지와 그 동남쪽 일대의 전경을 담고 있는 사진을 한 번 보라. 사진의 왼편이 서쪽, 위가 북쪽이다. 남에서 북으로 뻗으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튀어나온 보현지맥의 부용대 줄기는 그 반대 방향, 즉 동쪽에서 서쪽으로 튀어나온 문수지맥의 화산 줄기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맞물려 있다. 이른바 산태극이다. 그 두 지맥 사이를 흐르는 화천은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만송정 솔숲 앞에서 북류한 후, 그 숲을 지나자마자 서에서 동으로 거슬러 흐르다가 북동쪽으로 크게 휘어진 후 남서방향으로 계속 흘러간다. 이른바 S자형의 수태극이다. 낙동강 700리 구간에서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거슬러 흐르는 데는 하회밖에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예부터 사람들은 이 수태극 형상을 신비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회마을의 집과 골목길은 중앙의 삼신당(느티나무)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양진당은 남향이고, 충효당은 서향이며, 북촌댁은 동향이다. 가운데가 봉곳이 솟아오른 지세에 순응하여 일단 집 뒤를 높은 쪽으로 삼고 거기에 기댄(坐) 후, 마을을 감싸고 있는 강이나 산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제각각 방향을 잡아 집을 지었기 때문에 좌향이 모두 다르다. 이를테면 남향을 일조량이 가장 좋은 절대향(絶對向)이라 할 때, 하회의 집들은 오히려 집이 앉을 지세와 집의 시계(視界)나 조망권 같은 상대향(相對向)을 바탕으로 입지해 있는 것이다. 혹자는 서애파 종택인 충효당이 결혈처(結穴處)라고 얘기하지만 화산의 맥이 충효당을 지나 삼신당과 대종가인 양진당 터에서 다시 솟구쳐 응결했기 때문에 삼신당을 결혈처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양진당은 남산의 정자관(程子冠), 속칭 감투봉을 안대(案對)로 삼았다. 감투는 벼슬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풍수적인 소응 얘기가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의 성장기에 환경심리적으로 적잖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된다.
하회마을은 대부분 흙길, 흙담, 흙집으로 채워져 있다. 흙은 인간에게 땅기운을 전달해 주는 매개체이자 생명체이다. 하회마을이 그렇게 호흡하는 삶터로 유지되게 된 데는 풍수 형국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회는 연화부수형과 행주형이 겹친 땅이다. 행주형의 지세는 돛대와 닻으로 비보(裨補)를 하면 길한 땅이 되고 샘을 파면 불길한 땅이 된다. 하회 사람들은 오랜 세월 우물을 파지 않고 화천의 물을 길어다 사용했다. 수령 600년이 넘는 삼신당 느티나무는 마을 개기(開基) 때 돛대의 역할을 겸해 심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연화부수형은 자손이 영구히 번성하고 청사에 길이 남을 인걸을 배출하는 지세다. 무거운 돌을 얹어 잎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고, 연꽃은 수면에 떠 피기 때문에 집터를 수면보다 너무 높게 잡아도 좋지 않다. 풍산 류씨보다 먼저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가 화산 기슭에 들어와 터를 잡았지만 결국은 화천 가까이 다가가 수면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터 잡은 류씨 가문이 번성했기 때문에 ‘허씨가 터닦고, 안씨가 집짓고, 류씨가 잔치를 벌였다’는 향언(鄕諺)이 전해 온다.
화천변의 만송정(萬松亭) 솔숲은 겸암이 직접 조성한 인공숲이다. 혹자는 부용대의 살기를 누르기 위해 조성한 숲이라고 주장하지만, 겸암이 남긴 ‘영송정(詠松亭)’ 시와 부용대 한쪽에 겸암정이 지어진 것을 감안하면 다소 억지 추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만송증수식(萬松曾手植) 세구울성림(歲久鬱成林)/ 야정한성원(夜靜寒聲遠) 강공취영침(江空翠詠浸)/ 자다한의미(自多閒意味) 영득호광음(得好光陰)/ 산보승량처(散步乘凉處) 염분불허침(炎不許侵)." “일찍이 소나무 여러 그루 직접 심었더니, 세월 흘러 울창한 숲이 되었구나/ 고요한 밤 솔바람 소리 아련하고, 텅 빈 강에 푸른 그림자 드리웠네/ 한가로운 기운은 저절로 넉넉하고, 충분히 좋은 시간 가질 수도 있다네/ 산보하며 더위도 식히는 곳으로, 더운 기운 범접치 못한다네." 그러고 보면 만송정 숲은 바람과 모래를 막고, 홍수시에 토양유실과 마을의 재난을 방지하며, 주민들의 휴식장소로서도 큰 몫을 했던 일종의 다목적 비보 풍수림이었던 게 틀림없다. 유교문화가 한창 성했을 때, 대부분의 양반취락들은 길지로서의 위의(威儀)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그 같은 동수(洞藪) 하나 정도는 만드는 것이 상례였다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하다.
3. 인간 본연의 삶 깨우쳐주는 선비들 위한 최고의 명당
이상의 설명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 내부의 공간구조를 이해하는 기초 지식에 불과하다. 부용대 위에서 마을의 안팎, 즉 화산과 부용대, 넓은 풍산들과 하회마을의 놓인 위치 등을 보게 되면 또 다른 공간 세계가 열린다. 우선 하회마을 터가 산과 강, 그리고 절벽으로 둘러싸인 매우 폐쇄적인 장소라는 것이 인지될 것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예전에는 화산 중턱의 소로를 통하거나 아니면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밖에서는 마을이 있을 것이라 생각조차 하기 힘든 외진 곳이었다. 더구나 농경지도 협소하고 그마저도 물돌이 터의 특성상 홍수시에는 재해를 입을 개연성이 무척 높은 곳이었다. 그런 터는 사실 과거에는 피란지나 귀양지로 적격인 곳이었다. 하회마을이 모든 병화(兵禍)를 피할 수 있었고, 또한 이웃하고 있는 비슷한 물돌이 지세의 회룡포(의성포)가 조선왕조 때 유배지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하회마을은 그 장소적 폐쇄성 때문에 근동의 처녀들이 하회로 시집가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는 얘기도 전해 온다. 김용직은 하회마을로 시집온 어머니에게 할머니가 했던 말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아가야, 이제 밖에 나가 앞산을 바라보면 눈물이 나느니라. 뒷산을 보아도 그렇지. 그래도 참고 살면 여기도 좋은 곳이니라."
그렇다면 풍산 류씨가 그 같은 여러 가지 악조건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하회마을을 삶터로 택지(擇地)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고려조 이래 대를 이어 향리(鄕吏)를 지내면서 넓은 풍산들을 소유해 나름대로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해 오는 얘기로는 하회 터를 얻기 위해 삼대에 걸쳐 적선을 하는 동안 류씨 집안의 가세도 많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당시의 사회상을 꿰뚫어 본 류씨 조상의 혜안을 읽는다. 어차피 신분제 사회에서는 후손을 선비로 만들어 중앙관계(官界)로 진출시키는 것이 집안을 일으키는 지름길이었던 이상, 자연환경이 선비정신을 함양하기에 더없이 좋은 하회 터를 얻는 게 류씨 가문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적중했다. 풍산 류씨 가문은 겸암과 서애의 대에 이르러 나라의 주목을 받은 명문거족으로 부흥했을 뿐만 아니라 추수 때가 되면 넓은 풍산들의 소작인들이 곡식을 싣고 줄지어 하회마을로 들어오는 장관을 연출했다고 한다. 하회마을이 명당인 것은 그곳이 선비정신을 기르기에 더없이 좋은 터였기 때문이다. 그 핵심적인 인문경관은 현재 퇴락해가든 아니든 마을 안의 빈연정사와 원지정사, 부용대 위의 겸암정·옥연정·화천서당·상봉정, 그리고 화천강변의 병산서원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4. 사람과 장소가 대화 나누듯 공명을 일으키는 곳
이제 마지막으로 하회마을 터에 내재된 고급스러운 장소성을 살펴볼 차례다. 그것은 외부관찰자의 눈에 보이는 단순한 세계가 아니다. 그 터에 직접 몸담고 살았던 사람의 환경지각 세계다. 장소와 인간의 대화를 담고 있는 토포필리아의 극치다. 서애가 쓴 ‘옥연서당기(玉淵書堂記)’에 “중년에 망령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득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여년이었다. 손발 움직일 때마다 걸핏하면 놀라고 부딪치기만 했으니 그 때마다 크게 걱정하며 할 일을 잊고 슬퍼하지 않은 때가 없었으나 이곳의 무성한 숲속을 생각하며 즐거움을 삼았다(而中年妄出宦途, 汨沒聲利地二十餘年矣. 擧足搖手, 動成駭觸, 當其時, 大悶無聊, 未嘗不然思茂林草之爲樂也)"는 구절이 있다. 이전투구의 사회생활 속에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준 곳이 바로 고향의 부용대였음을 밝힌 내용이다. 토포필리아는 실존의 안정적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장소와 자아의 능동적 융합을 바탕으로 사람의 지적(知的)·도덕적·정신적 가능성이 길러진다는 것을 적시(摘示)하고 있는 좋은 예다.
서애가 돌아가신 형님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詩)를 한 번 보자. “아형유정관(我兄遺亭館) 겸암유구명(謙菴有舊名)/ 죽영정임계(竹影淨臨階) 매화개만정(梅花開滿庭)/ 유종방초합(遊踪芳草合) 선로백운생(仙路白雲生)/ 창억공수루(憶空垂淚) 강류유야성(江流有夜聲)." “형님께서 끼치신 이 정자, 그 예에도 이름 있었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 가득 피어 있구나/ 노니신 자취 꽃다운 푸새들,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은 눈물 되어 소리 없이 떨어지니, 강물도 덩달아 흐느끼며 밤새도록 흐르네." 겸암과 서애, 두 형제는 부용대 절벽을 가로질러 나 있는 300m의 층길, 속칭 ‘서애 오솔길’을 오가며 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했던 것으로 전해 온다. 마지막 구절을 보라. 형제의 사랑을 나타내는 인간애가 장소애를 나타내는 토포필리아와 하나로 융화되어 종래는 인간과 자연이 같이 슬퍼하고 있다. 이처럼 사람과 장소가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명당의 극치다. 농부에게 저 드넓은 풍산들녘이 명당이었다면, 부용대는 선비를 위한 명당이었다. 인간 본연의 삶을 깨우쳐주는 명당, 그런 부용대를 찾으면서 어찌 그곳에 내재된 정신세계를 놓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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