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문화

관찰사로 환생하여 범어사를 지킨 스님(우받세/한빛)

오토산 2014. 12. 30. 09:10

 

 

 

    범어사 대웅전 전경

 

    관찰사로 환생하여 범어사를 지킨 스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정산(金井山)에 자리하는 범어사(梵魚寺)는 부산 지역의 최대 명찰로 사시사철 순례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전설에는 범어산 정상 한 가운데에 금빛 물이 가득히 고인 커다란 바위가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이 전설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하늘(梵天)로 상징되는 부처님 세계와 금빛물고기(梵魚)로 상징되는 인간세계의 사찰이 하나로 이어졌다는 의미로 새겨볼 수 있다.

    오랜 옛날, 범어사가 창건 된 그 때부터 이러한 믿음은 범어사의 사격(寺格)을 높이는데 커다란 힘을 보탰을 것이다.
    그리고 사중의 스님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범어사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지금의 범어사가 되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보는 전설 역시 이러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 범어사에 낙안 낭백(樂安郎白) 스님이 있었다.

    1719년 무렵에 사중에서 활동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으니, 역사적으로 실제 활동했던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는 이른바 숭유억불로 인해 불교가 여러가지로 제약 받던 시절이었다.
    범어사가 있는 동래를 다스리는 부사(府使)는 특히나 불교를 싫어하여 관권을 이용하여 무려 270여 종이나 되는 엄청난 잡역을 부과함으로써 범어사의 스님들을 괴롭혔다.

    출가자의 본분인 수행뿐만 아니라 사찰 운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행사며 일이 있는데 이처럼 과중한 잡역까지 해야 하니 많은 스님들이 절을 떠나버려 자칫 빈 절이 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낭백 스님 역시 잦은 노동에 시달려 새벽예불도 잘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일단 절을 떠나 동구 밖 산비탈을 개간하여 오이와 감자를 심어 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밤이면 늦도록 촛불을 켜고 짚신을 삼아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보시하였다.

    스님은 여러 켤레의 짚신을 길가 나뭇가지에 걸어 놓아 아무나 가져가 신도록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근에 낭백 스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지나가다가 밭일하고 있는 스님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합장하곤 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관가의 부당한 처사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출가자의 신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만 매일같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하루라도 속히 이 생을 마치고 내생에는 벼슬에 올라 스님들로 하여금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나쁜 제도들을 없애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빌 따름이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났다.

    스님은 이제 때가 온 것을 직감하였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 다음 범어사로 올라갔다.

    법당에서 온 종일 참선에 든 다음 날, 한 행자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갈 때가 되었네. 내 몸은 굶주린 범에게 보시하고 갈 테니, 앞으로 25년 뒤 절의 잡역을 없애고 불사를 하는 관리가 있거든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알아라.”
    스님은 그 길로 산속으로 들어가 범에게 몸을 던졌다. 며칠 뒤 남은 주검을 사람들이 발견하고 절에서 다비했더니 사리가 나와 부도에 모셨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동래 부사로 약관 24세의 젊은 관리가 내려왔는데 그의 이름은 조엄(趙曮, 1719~1777)이다.

    조엄은 훗날 대사헌, 대사간, 이조판서 등 고관이 되었으며 영조 임금을 도와 재정의 건전화와 여러 시책을 이루어내는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은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올 때 그곳에서 보았던 고구마를 들여와 보급하여 구황(救荒) 작물로 재배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이후 고구마는 흉년이 들거나 보릿고개 때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요긴한 작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뒤 얼마 후 동래부사가 되어 부임한 것이다.

    관내를 두루 순시하던 조엄은 하루는 범어사에 가게 되었다.
    동구 밖에 도착 해서 오이밭과 감자밭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향수 같은 것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처음 와본 것인데도 마치 자신의 땀이 배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범어사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분명 범어사에는 처음 왔는데도 여기가 자기의 집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가장 먼저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올라가 절을 드리는데 그 모습이 수십년 간 불공을 드린 스님 못잖게 자연스러웠다.
    금강계단에서 내려온 조엄은 절의 주지를 비롯하여 여러 스님들과 자리를 같이 해서 절의 사정을 들었다.

    과중한 잡역으로 스님들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그 즉시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찰에 필요한 여러 가지 불사를 돕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그런데 범어사 스님들 가운데 노장 스님이 있어서 조엄의 얘기를 들어보니 24년 전 낭백 스님이 입적하며 남긴 서원과 흡사한 것을 깨달았다.
    기이하게 여긴 그 스님은 조엄에게 나이를 물어보니 스물네살이라 하지 않는가!
    스님은 놀라며 조엄을 향해 절을 드렸다.

    조엄이 놀라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예전 낭백 스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제서야 조엄은 자신의 전생이 바로 낭백 스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범어사 입구의 오이밭이며 감자밭이 다 자기가 손수 가꾸던 것도 그제야 기억이 나 무한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그 뒤 조엄은 범어사의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고 전한다.

    巡相國趙公嚴革祛寺弊永世不忘壇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인 조엄(1719~1777)이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며 범어사를 둘러싼 폐단을 혁파했다고 전한다.

    범어사에서는 이를 기리며 단을 세우고 비문을 짓는데 위의 글은 이를 탁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