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한기록

경성이라 불리던 시절의 서울사진(갈지)

오토산 2015. 12. 13. 16:54

 

 

京城이라 불리던 시절의 서울 모습
 
남산 공원 야외 음악당
 
  
남산에서 본 경성 시가지 
가깝게는 한국은행 본점, 멀리는 중앙청이 보인다.
  
 
 
 京城 東洋拓殖株式會社.
 
 
日帝가 1908년 12월,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한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현 을지로쪽 명동 입구에 있었고 일본 정부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아서 한국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토지 조사 사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7만8천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여 한국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東拓의 소작료는 일반 민간보다 상당히 고율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 방법도 악랄하였으므로 한국인들의 東拓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
 
 
 
덕수궁 안에서 바라본 경성시가 일부.
멀리 반도호텔과 명동 성당이 보인다. 
 
 
 
경성 太平通
현재 광화문 네거리로 청계천으로 들어가는 물이 흐른다.
 
 
조선은행(현재 한국은행) 앞 대광장
 
  
 
 
경복궁 集玉薺
 
 
 
 1934년에 준공된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
 
지상 4층, 지하 1층,  연건평 3,000여평의 건물로서
  양식주의에서 근대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이다.
 
 
 
경성 종로 2가 거리
 
 
 

京城驛에서 본 남대문 
 
 
 

동대문 밖 조선인 마을
 
 
 
광화문
 
 
 
경성 동대문
 
 
 
종로 보신각
 
 
 
경성 東小門 (惠化門).
 
도성에는 4개의 대문(大門)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惠化)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北門(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경복궁 광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