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팔거지악
조선시대엔,
아내를 내 쫓을 수 있는 일곱가지 조건이 있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자식을 못 낳는 것,
그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
이게 그 유명한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다.
남성우위시대의 철저한 여성탄압의 악법이었다.
지난 4월 2일,
대한민국 국민‘조정희’씨는 중앙일간지에 5단광고를 게재,
‘온 국민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8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하자고 호소했다.
말하자면 지금 대한민국이 안고 있
‘팔거지악-八去之惡’을 밝힌 것이다.
그 내용은 깊이가 있었으며 상당한 ‘분별력'과
‘균형감각’을 갖춘 글이었다.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라 해도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탁월한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1. 분열, 갈등, 대립을 조장하는 무리들에 의해
온 국민이 사분오열되어 있다.
남남갈등을 비롯하여 지역간 갈등, 계층간의 갈등,
빈부간의 갈등, 노사간의 갈등, 종교간 갈등,
정치계파간 갈등,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갈등,
각종 사회단체의 분열이 그것이다.
사분오열(四分五裂)은,
여러 갈래로 찢어지거나 흩어진 것을 말하며,
분열은 찢어져 갈라지는 것이고,
갈등(葛藤)은 ‘칡과 등나무’ 라는 뜻으로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상태다.
대립(對立)은 의견이나 입장, 속성이 달라
서로가 맞서거나 반대의 상태가 되는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북한’ 이라는 적대세력 앞에서
존재하는 ‘휴전상태의 국가'다.
종전(終戰)과 휴전(休戰)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쟁은 언제나 일방에 의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역사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적전분열(敵前分裂)은
자멸(自滅-스스로 자신을 멸망
시키는 것)한다는 사실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라의 온갖 힘을 하나로 결집하는
구심점(求心點)이 없다는 현실이다.
국가 리더십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2. 망국적인 표풀리즘과 지역이기주의,
개인이기주의의 결탁이다.
표풀리즘-populism은, 라틴어의 ‘민중’ 이라는
populus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귀족계급이나 부유층 등 엘리트 계층이 아닌
일반대중에게 호소하는 정치운동이나
그 표현양식을 뜻한다.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이전의
공산주의를 이르는 정치용어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이를
‘인기영합주의’ 라고 해석하고 있다.
인기(人氣)는 한 인물에 대해(정당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열렬히 따르거나
성원하는 상태를 말하며,
영합(迎合)은 자기의 독자적인 생각이나 신념을 버리고
남의 비위나 취향을 맞추고 좇는 것이다.
대표적인 표풀리즘이 ‘복지정책’ 의 남발이다.
일본은 선진국이 되고 더 촉망받던 아르헨티나가
주저앉은 것은 이 표풀리즘 때문이었다.
가장 호소력이 강한 ‘복지표풀리즘’도 사실은
그 막대한 비용을 국민들이 세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함정’임을 알아야 한다.
돈이 나올 곳은 ‘혈세-세금’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금 때문에 고통받지 않으려면 ‘복지표풀리즘’ 을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폐가망신하는 길이 그 속임수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경 제닭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바로 그것이다.
3. 친북세력들의 책동으로 인한 남남갈등과
정치사회 갈등이 문제다.
소수정당에 숨어있는 좌파세력,
종교단체에 기생하고 있는 좌파세력,
노동단체의 좌파세력,
교육현장의 좌파세력,
일부 사회지도층의 좌경화 등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안보를 위협하며
우리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사실, 좌파가 없는사회는 없다.
그게 건전한 진보세력으로서의 좌파라면
국가발전의 동력이 될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좌파급진세력은 분명한 공공의 적이다.
그들 대부분은 ‘학구적인 과정' 을 거친
자기신념으로서의 좌파가 아니라
태생적인 불만분자들이다.
그래서 고칠수 있는 길이 없으며 반대를 위한
반대가 거기에서 생긴다.
책동(策動)은 좋지않은 일을 몰래 계획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쥐새끼’ 들의 선동에 놀아나는
미개하고 우둔한 민중이 있다는 현실이다.
그 몸은 남쪽에서 배불리 먹고 등따스게 자면서
머리는 평양에 있다는 모순된 친북 세력이 있는 게
오늘의 우리 사회다.
그들에 대한 처벌이 약했음을 반성해야 한다.
사법의 치졸한 독재가 만들어낸 재앙이기도 하다.
4. 공중도덕심과 선진국민의식이 부족하다.
책임과 의무감의 결여,
무질서, 무정돈, 자기편의주의의 우선,
공동체의식의 결여등이 문제다.
교육현장에서의 인간교육, 인격교육,
매스컴을 통한 국민계도,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의의(意義)와 가치를 중시하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사고방식이다.
역사적으로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르네상스 이후에
발전된 사상이기도 하다.
여기에 비해 이기주의는 남이나 사회일반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의 이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다.
개인주의에는 자기의 ‘차별화’ 가 강하지만,
이기주의는 다른 것들에 대한 ‘배제’ 가 강하다.
차별화는 무해하지만 이기주의는
대단히 유해한 사회의 거침돌이다.
이기적인 인간을 개성적인 인간으로 바꿀수 있는
수단이 광범위한 ‘교육’ 이다.
가정, 학교, 사회, 종교가 인간을 ‘사람’ 으로
길러내야 하는데 지금 우리에게는 그러한
중요한 기능이 약화되어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그 비율에서 이기적인 인간이 많아지면
배는 결국 침몰하고 만다.
모두가 갑판에만 있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안전하게 배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바닥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5. 종교가 종교본연의 자세와 목표에서 탈선하고 있다.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종교가 지나치게 정치에
여하는가 하면 목전의 이해관계에 집착하고 있다.
종교(宗敎)라는 단어의 일차적이고 평균적인 의미는
‘근본을 가르친다’ 는 뜻이다.
작금의 한국종교가 보여주고 있는 추태는
인간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에게
갑자기 많은 돈이 주어졌을 때 보여주는
‘혼돈’그 자체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지도자들의 ‘자질’ 이 문제다.
자질(資質)은 타고난 성품과 소질이라는 뜻이다.
이제 종교는 근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와 권력을 주문(呪文)해 주는
무당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종교간 차이도 없다.
기복(祈福)만 남는다면 그건 이미 종교가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가 그러하다.
조계종 원로의원이신 고우스님은,
‘나는 종교는 가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분쟁의 대상은 결국 세속적 부(富)에
있기 때문‘ 이라고 말씀하신다.
6. 분별없는 국민수준이 문제다.
분별(分別)은, 서로 구별을 지어 가르는 기능이며,
사물을 종류에 따라 나누는 일이고 세상 물정에 대해
바른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력’ 은,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해 가르는 기능이며 세상 물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선과 악을 분별 못하고, 앞과 뒤를 모르며
가치와 값을 구분 못하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게 지금의 세태다.
‘세종시’ 문제만 해도 수도분할이 엄청난 국가적 해악을
초래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임에도 자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다고 생각, 수수방관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선거에서의 득표만을 노리는 정치모리배들의 사악한
주장에 대해 침묵하는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국민들에게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못된 정권’ 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과 관계가 있다.
집권세력에 대한 반감이 체제도전적인
좌파세력의 지지로 바뀌는게 그런 케이스다.
이미 ‘잃어버린 10년’ 으로 그 값을
톡톡히 치뤘으면서도 이 우매함은 변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후진국이기 때문이다.
7.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신의 정체성이 없다.
분수(分數)는 자기신분에 알맞은 한도를 뜻하며
사람으로서 일정하게 이를 수 있는 한계다.
그걸 넘으면 과욕과 허영심이 되는것이다.
우리 민족의 특성중 하나인 외화내빈(外華內貧)도
분수를 몰라 나타나는 사회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체성(正體性)은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성질,
또는 그러한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들의 ‘정체성’ 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한
대한민국의 ‘국민임’ 에 있다.
사람이 분수를 모른다는 것은
자기의 현실적인 ‘처지’ 를 모르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벌어지는 일이 ‘수지계산’ 이 안 맞는
비 경제적인 집안살림이다.
낭비, 사치, 과소비가 그런 것들이다.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확립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쏠림현상도 심하게 나타난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행사하는 한표의
수준이 곧 그 나라의 수준이 되고만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지금의 여의도수준이
곧 국민의 수준인 이유가 그것이다.
8. 방송이나 신문등 언론기관들이
제 기능을 다 못하고 있다.
사실은,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逆機能)을 하고 있다.
역기능이 무엇인가. 본래 목적했던 것과는 반대로
작용하는 기능이다.
특히 지상파TV는 이미 ‘막장’ 에 갇힌지 오래다.
국민에 대한 ‘계도’ 가 아니라 그 건전한 정신을
갉아먹는 ‘구더기’ 가 된지 오래다.
일부 종이신문만이 겨우 저널리즘의
명맥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방송저널리즘을 죽인 게 ‘시청율’ 이고
그건 곧 ‘돈’ 이다.
시청율-광고-돈이라는 상업적 먹이사슬에서
온갖 퇴폐와 파행, 막가파의
정크프로그램이 양산된 것이다.
TV의 막강한 역기능을 잡지 못하는 집권세력의 ‘한계’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명색이 ‘공영방송’ 인 KBS가 시청료는 반강제로 받아가면서
저속하고 난잡한 흥행위주의 상업방송과
시청율경쟁을 하고 있는 죄질은 그래서 용서받을
수가 없다.
이제 KBS는 KBS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민주시민 조정희씨의 ‘팔거지악’ 은,
그 내용에서 정확한 사회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전부일까.
도대체 지금 우리에게 있어 썩지않은 곳이 있을까.
제대로 된 곳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정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는
’ 나라가 되고 말았다.
넘지말아야 하는, 넘어서는 안되는 영역,
종교까지 넘은 사회가 됐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우리가 올 수 있는 ‘한계’에까지 온 것이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상황’ 에 도착한 것이다.
GNP 2만불을 달성한후 18년째 선진국의
높은 문턱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국민역량’ 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답은 우리 안에 있다.
건전한 민주시민이 우매한 ‘민중’ 보다 그 숫자가 많으면
이 혼돈이 극복될 수 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반대라면, 가슴 아프지만 희망은 없다.
결국 우리들의 선택인 것이다.
닭을 살려서 계속 달걀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닭을 죽일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항상 즐겁고 행복하며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민주시민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