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공, 학림공 사적비 제막식 가져 (5)
태사공과 낭중공 추향제를 봉행한 참제원들은 제막식장으로
이동, 평창공(平昌公)과 학림공(鶴林公) 사적비(事績碑)
제막식을 가졌다.
권오상 총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제막식에는 권용주씨의
경과보고에서 권웅렬. 권오록 두 고문이 능동성역화사업에
쓰라며 성금 1억원씩 모두 2억원을 기탁했다.
그 동안 여러차례 회의를 열어 능동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4천여만원의 예산으로 평창공과 학림공의 사적비 비문을
최종 심의 확정했었다.
권해옥 대종회장은 인사말에서 "평창공과 학림공 사적비 건립은
시기는 늦었지만 여러분의 뜻이 모아져 오늘 건립하게 되었다"며
권웅렬. 권오록 두 고문의 성금이 뜻있게 쓰이기 위해 앞으로
성역화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권오을 바른미래당위원장도 인사말을 했다.
제막식에는 권해옥 회장을 비롯하여 추향제 헌관들과 지역 및
파종회장이 참석, 평창공과 학림공 비(碑)에 흰 천으로 덮어놓은
끈을 차례로 당기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제막식이 끝나자 사적비 앞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17세(世)인 평창공의 휘(諱)는 옹(雍), 호(號)는 평창공이고
추밀공파이다.
1452년 문종 2년 평창군사(平昌郡事)를 끝으로 충주로 귀향했다가
성종 때 장인이 사는 안동 하회에서 살았다.
그는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천등산(天燈山)에 태사공묘(太師公墓)가
있는 산(山)임을 알고 풍수와 답사하다가 지석(誌石)을 찾았으나
입석(立石)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후 아들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태사공묘에 작은 비를 세웠다.
이 비의 근찬(謹撰)은 권기갑 대종회 부회장이, 근견(謹堅)은
권웅렬 대종회 고문이 맡았다.
28세(世)인 학림공의 휘(諱)는 방(訪), 자(字)는 계주(季周)이다.
1793년 정조(正祖) 병조좌랑(兵曺佐郞)에 제수(除授)되었는데
벼슬을 단념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서 성균관에 유학중인
동지들과 만인소(萬人疏)를 수창(首唱)하였다.
그는 안동권씨대동보(大同譜)를 편찬, 서문을 지었으며 삼공신
(三功臣)을 모신 태사묘의 작헌의절(酌獻儀節)을 정연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속칭 능동(陵洞)의 시조 태사공 묘소와
풍산류씨(豊山柳氏) 감사공(監司公) 묘소가 같은 지번에 입산되어
있다.
당시 양 문중의 소유권 견해차이를 공(公)이 슬기로운 지혜로
타협하여 이를 계기로 양 문중은 선의(先誼)를 다졌으며 현재까지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1808년 69세에 돌아가셔서 현재 학가산 국사봉에 안장되어있다.
문집 11권이 간행되었다.
이 비문은 안동의 김창회(金昌會) 전 성균관부관장이 쓰고
권웅렬 안동권씨 대종회 고문이 비를 세웠다.
제막식이 끝나자 도시락과 소고기 국밥으로 점심식사를
하였으며 주최 측은 참제원 전원에게 타월 1장과 2020년
신년 달력 1부씩을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권오상 대종회 총무국장이 사회를 보고있다.
권용주 부정공파 고문이 경과보고를 하고있다.
권해옥 대종회장이 인사말을 하고있다.
권오을 전 국회의원이 인사말을 하고있다.
평창공 제막식 광경.
학림공 제막식 광경.
제막식이 끝나자 단체로 기념촬영을 했다.
점심시간에 소고기 국밥을 받기위해 줄을 서있다.
참제원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준 타월과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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