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십승지지

오토산 2020. 3. 6. 08:50

十勝之地(십승지지)

 

한국은 난리가 나면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다.

 임진왜란 때도 임금은 백성을 팽개치고 평양ㆍ의주로 도망갔다.

마지막 에는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피신하려고 했다.


죽어나는 것은 민초들이었다.

625 때도 서울 사람들이 피난조차 가지 못하게 한강다리를 끊어버렸다

. 그러고도 집권층은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 안심하라"는 거짓 방송을 내 보냈다.

IMF외환위기 때도 그랬다.

"괜찮다. 문제없다"고 했지만 결국 파탄 났다.

혼란이 오면 각자가 알아서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十勝之地(십승지지)이다.

三災(삼재)가 들어오지 못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열군데가 바로 십승지다.

 삼재는 전쟁ㆍ기근ㆍ역병이다. 십승지로 숨어 들어가면 전쟁이 나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사람이 굶어 죽는 대흉년에도 살 수 있으며

전염병이 창궐해 길거리에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흟어보면 영조26년, 1750년에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 당시 조선의 인구가 700만명 정도인데,

1~7월까지 전국에서 20만명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는 사람이 접근하기 어러운,

그리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심심산골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곳이 십승지에 해당한다.


조선 팔도를 뒤져 그 가운데 가장 숨기 좋은 지점을 열군데로 이 십승지는

 하루아침에 형성된게 아나고 적어도 오백년 이상 목숨 보존처 찾아 헤매던

낭인들과 떠돌이 민초들, 그리고 깊은 수도처 구하던 승려와 도사들의

현장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라 본다.


그렇다면 십승지는 어디인가? 

 나라 안에서 피란(避亂)하기 좋다고 전(傳)하는 열 군데의 지방(地方).

경북 영주 풍기읍의 금계촌, 봉화군(奉化郡)의 춘양면, 안동의 화곡,

경남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 강원 영월의 정동쪽,

충북 보은군의 속리산 아래의 증항, 단양의 영춘, 충남 공주의 유구와 마곡,

전북 부안의 호암, 남원시(南原市)의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이다.


국가조사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지정된 지정된 곳이 아닌

'정감록' '남사고비결'등 각종 민간 비결서에서 주장하는 곳들로 비결서마다

약간씩 들쑥날쑥하다.


지리산 일대에 산재한 청학동 서너군데도 십승지의 연장선상이다.

오히려 십승지의 보다도 훨씬 일찍부터 난세에 몸을 보전하고 신선도를 닦을 수 있는

 명당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한문 서당이 있는 청학동, 하동쌍계사 뒷길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있는 불일평전

 해발 700m의 고운동, 칠불사 위에 있는 허북대 같은 곳도 청학동 범주에 속한다.


십승지의 특징을 다시 꼽아본다면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라는 점,

 외부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자그맣지만 최소한으로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

십승지는 대개 이런 조건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7할이 산이라는 지형조건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 산들은 해발 1,000m 내외라 동식물이 살 수 있고,

계곡물이 흐르며 숲이 우거져 있다. 물이 없고

동식물 없는 산에는 사람이 숨어 살 수 없다.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