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41)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관촉사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내려오면,
풍계촌(風界村)이라는 마을에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甄萱)의 무덤이 있다.
견훤은 신라의 비장(裨將)이었는데, 진성왕(眞聖王)때, 따르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일으킨 풍운아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자 금강(金剛)과 신검(神劍)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나라를 세운지 41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견훤의 초라한 무덤만이 적막한 산속에 쓸쓸히 남았으니,
인생의 영고성쇠란 본시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와, 익산군(益山郡) 용화산(龍華山)에 있는
미륵사(彌勒寺)와 상원사(上院寺) 등을 구경하고, 옥구(沃溝) 땅에 들어섰을 때에는
가을도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가을에 전라도 일대에는 심한 흉년이 들어,
김삿갓은 어디를 가도 밥을 얻어 먹기가 매우 어려울 지경이었다.
때는 추수철 임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식량이 부족해,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는 집조차 있는 형편이었다.
형편이 이지경이다 보니, 김삿갓은 열 집 스무 집 구걸을 다녀 보아도,
하루에 한 끼를 얻어먹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돈은 한푼도 없고 날은 갈수록 추워 지는데, 몸에 걸치고 있는
옷 조차도 여름옷 그대로였다.
(이거 큰일났구나. 배를 타고 금강을 내려올 때만 하여도 배가 터지도록
잘 얻어 먹었는데, 이제는 하루 한 끼도 얻어먹기 어려운 형편이니,
눈앞에 닥쳐오는 엄동설한을 어떻게 넘길 것인가 ? )
좀처럼 비관할 줄 모르는 김삿갓도 이때만은 눈앞이 아득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않던가.
그러나 김삿갓은 날마다 기아(飢餓)에 허덕이다 보니,
이제는 좋은 경치를 찾아다닐 마음의 여유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듯 아침 저녁을 제대로 얻어먹기가 어려울 지경이어서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해 오는데, 몸이 야위어올수록 추위도 혹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김삿갓은 구걸 생활을 30여 년이나 해왔지만,
이때처럼 혹심한 고초를 겪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느 날, 김삿갓은 추위를 참고 견디다 못해 어느 집으로 찾아가 사정을 해보았다.
"나는 지나가는 나그네올시다.
감기에 걸려 열이 심하니, 하룻밤 잠이나 편히 자고 가게 해 주십시오.
밥은 조금전에 먹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밥을 먹었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추위를 피해 잠을 자고 가기 위해 ,
주인을 안심시키려는 말이었다.
주인은 김삿갓의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올해는 흉년이 심해, 우리 식구들은 지금 밥을 굶고 있다오."
"그런 사정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밥 걱정은 마시고, 잠만 자고 가게 해 주시면 됩니다."
"에이, 여보시오.
내 집에서 자고 일어난 사람에게 어떻게 밥을 굶으라고 하겠소.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주인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서, 김삿갓의 행색이 하도 딱해 보였던지,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굶다시피 하기 때문에
어느 집을 찾아가도 똑같은 사정일게요.
여기서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김진사라는 부자 댁이 있소.
그 집에 가면 돈도 많고 쌀도 많을 테니 그 집을 찾아 가 보시오."
하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돈도 많고 쌀도 많은 집>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진사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면, 말도 통할 것 같았기에 은근한 기대를 갖고
지친 다리를 이끌고 고개를 넘기 시작하였다.
별로 험한 고개도 아니건만,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몹시 힘에 겨웠다.
이윽고 고개위에서 바라보니, 과연 산 밑에는 고래등 같은,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저 집이 바로 김진사 댁인가 보구나. 저만한 부자라면 밥도 배불리 먹여 주고
잠도 따듯하게 재워 주겠지.)
김삿갓은 가슴 울렁거리는 흥분을 느끼며 김 진사 댁을
찾기가 무섭게 제법 힘차게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대문을 두 세번 연거푸 두드려도 안마당에서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할 뿐
사람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밥을 빨리 얻어먹고 싶은 마음에서 대문을 연방 두드려 대었다.
그러자 60 가까운 탕건을 쓴 늙은이가 대문을 살며시 열고 내다보며 ,
매우 냉담한 어조로 물었다.
"누구를 찾소 ? "
물어 보나마나 그 노인은 김 진사가 분명해 보였다.
"저는 지나가는 과객이옵니다.
하룻밤 신세를 좀 지게 해 주십시오."
상대방이 진사인 만큼, 이쪽도 선비의 체통을 지키려고 제법 의젓하게 부탁했다.
김진사는 사뭇 아니꼬운듯, 시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문득 주머니에서 엽전 두 닢을 꺼내 손에 쥐어 주며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집에서는 사람을 재워 줄 형편이 못 되오.
이것 가지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드시오."
그리고 대뜸 대문을 잠가 버린다.
김삿갓은 손바닥에 놓여진 엽전 두 닢을 물그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까닭 모를 분노와 함께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라왔다.
(글줄이나 배웠다는, 소위 진사라는 작자가
선비를 이렇게도 멸시할 수가 있을까 ? )
배우지 못한 사람이 그랬다면 무식한 탓으로나 돌리겠지만,
진사까지 지냈다는 작자가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나오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젊잖은 체면에 대문을 걷어 차며 행패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은 아니던가.
(사람이 이런 괄시를 받으면서도 살아야만 하는가 ?)
김삿갓은 김 진사라는 자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문득 바랑 속에서 붓을 꺼내 대문 한복판에 주먹 같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후려갈겼다.
...
沃溝 金進士(옥구 김진사) 옥구에 사는 김진사가
與我二分錢 (여아 이분전) 나에게 엽전 두 푼 주노니
一死都無事 (일사 도무사)죽으면 이런 멸시는 안 당할 텐데
平生恨有身 (평생 한유신) 몸이 있는 것이 평생 원한이로다.
....
이같이 분풀이로 시 한수를 후려갈기고 그 자리를 떠나오기는 했으나,
배는 고프고 해는 저물어 오는데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산 밑으로 어정어정 걸어오다 보니, 조그만 움막이 하나 보였다.
알고 보니 그것은 집이 아니라, 상여(喪輿)를 보관해 두는 <상두막>이었다.
(에라, 잘됐다. 어차피 상여 신세를 져야 할 판이니
상두막에서 자다 죽어 버리면 제격인게다.)
김삿갓은 행상 때 쓰는 포장(布帳)을 몸에 휘휘 둘러 감고 상여판 위에
번듯이 누워 버렸다.
그리고 워낙 기아로 기진맥진한 판이어서 눕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문득 누군가가,
"여보시오, 선비 양반 ! "
하고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닌가.
...계속 142회로~~~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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