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02-(143)
*처량한 신세의 김삿갓.
전주를 돌아 본 김삿갓은 남원(南原)으로 발길을 돌렸다.
성춘향(成春香)과 이몽룡(李夢龍)의 설화(說話)가 서리서리 얽혀 있는
광한루(廣寒樓)와 오작교(烏鵲橋) 등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원은 지리산 기슭에 위치한 곳인지라,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도가도 인가를 찾아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김삿갓은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신세인지라, 인가가 없는 것처럼 딱한 일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날이 몸이 불편해 오는데다가 밥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니,
길은 더딜밖에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밥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뱃속에서 울려오는
쪼르륵 소리를 들어 가며 진종일 인가를 찾아 헤맨 일도 있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풀뿌리를 캐어 먹기도 하고, 솔잎을 씹어먹어 보기도 해보았으나
그런 일이 며칠씩 계속되니, 기진맥진하여 다리를 가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도승들은 흔히들 생식을 한다는데, 나는 꼭 밥을 먹어야만 살아 갈것 같으니,
죽는 날까지 거지 신세를 면할 수가 없는 것이 나의 팔자인가 보구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자 서글픈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내가 이러다가 굶어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
인가를 찾는데 지쳐 버려서, 맥없이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늘은 맑게 개고 무심한 새들은 아름답게 우짖고 있었다.
배가 하도 고파 몸을 가눌 수가 없는 지경이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은 죽어야 할 운명이기에, 이왕이면 잠자듯 조용하게 죽고 싶기만 하였다.
기운이 탈진한 김삿갓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뒤로 누워,
쓸쓸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타향 살이 몇 해던가 손 꼽아 헤어 보니
고향 떠난 이십 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 보니 하늘은 저 쪽
고향 앞에 버드 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 때는 옛날.
...
김삿갓은 정신이 혼미해 오는 상태에서 , 타향살이 설움을 달래는
구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이윽고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누군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아저씨 ! 날이 저물어 오는데 무슨 잠을 이렇게나 자고 있어요 ? "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김삿갓은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제사 알고 보니, 자기를 깨운 사람은 열두세 살쯤 먹어 보이는 나무꾼 소년이었다.
"네가 나를 깨웠냐 ? "
"날이 저물어 오는데, 아저씨는 무슨 잠을 그렇게도 정신없이 자고 있어요."
어둡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러 주는 말이다.
"깨워 줘서 고맙다. 네 덕택에 내가 잠시 죽었다가 살아났구나."
김삿갓은 머슴아이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 나서,
"이 애야 !
내가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나를 너희 집에 데리고 가서 밥 좀 먹여 줄 수 없겠냐?"하고 물어 보았다.
한평생 문전걸식을 해오던 습성이 무심결에 드러났던 것이다.
김삿갓의 구걸하는 말을 듣고, 소년은 일순간 어리둥절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예사롭지 않게 대답했다.
"배가 고프면 우리 집에 가세요. 우리 집도 밥은 없어요.
그렇지만 감자는 얼마든지 있어요. 감자라도 괜챦겠지요 ? "
김삿갓은 소년의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굶어죽을 판인데 감자면 어떠냐 !
하늘이 나를 살려 주시려고 너를 일부러 보내 주셨나 보구나."
"아저씨는 우스개 말씀도 잘도 하시네요.
내가 뭐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인 줄 아세요 ?"
김삿갓은 소년의 말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아느냐. 죽을 사람을 살려 주면,
그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 보내신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냐 ?
안그래 ? 허허허."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고마워요....
아무튼 우리 집에 감자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시장하시건든 빨리 가세요."
김삿갓은 염치불고하고 소년을 따라 나섰다.
소년의 집은 고개 넘어 산골짜기에 있는 오막살이였다.
50 가량 되어 보이는 두 내외가 어린 아들과 함께
숯을 구워 팔아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들 내외는 인정이 어찌나 많은지, 아들로부터 자세한 애기를 듣고 나더니,
"츠츠츳 !
이틀씩이나 굶으셨다면 배가 얼마나 고프셨겠소.
감자가 입에 맞으실지는 모르지만,
감자라면 얼마든지 많으니까 마음놓고 잡수세요 ! "
하고 말하며, 삶은 감자를 한 소쿠리나 갖다 주었다.
김삿갓은 평소에 감자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갈(飢渴)이 감식(甘食)>이라고, 이날은 감자맛이 꿀맛처럼 달았다.
주인은 김삿갓이 감자를 탐스럽게 먹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마누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마누라.
점잖은 양반한테 통감자만 대접하기가 민망스러우니,
내일 아침에는 감자로 국수도 만들고, 전병도 좀 부쳐 드리도록 하오.
그렇게 해드리면 별식삼아 맛나게 자실게 아니오 ? "
실로 고맙기 그지없는 마음씨였다.
이날 밤 주인 내외와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깊어져 그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생각조차 들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그 집에서 열흘 동안이나 묵다가,
열하루째 되는 날에야 남원을 향해 떠났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은 돈보다도 역시 인정이었던 것이다.
...계속 144회로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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