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남원 광한루를 찾은 김삿갓

오토산 2020. 4. 8. 08:59

■방랑시인 김삿갓 02-(144)

*남원 광한루에서..


김삿갓이 남원 고을 광한루(廣寒樓)에 도착한 때는,

삼복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고 모두들 광한루로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삼삼오오 여기저기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질탕하게 놀고 있기도 하였다.

광한루는 그 옛날 성춘향과 이몽룡이 사랑을 속삭이던 본고장인지라,

어디에서나 의레 들려 오는 노래는 <사랑 타령>이 아니면

 <십장가(十杖歌)>뿐이었다.


이렇게 광한루 주변은 한량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어서,

김삿갓은 어디를 가거나 술은 공짜로 얻어 마실 수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한 해 여름을 태평 세월로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김삿갓은 술을 공짜로 얻어먹는 대신에,

술좌석에 흥을 잘 돋워주어 누구도 싫어하지 않았다.

더구나 시를 좋아하는 늙은 선비들은 김삿갓과 한번 어울려 보고 나서부터는

 그를 유난히 좋아하게 되어, 어쩌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삿갓 친구가 오늘은 어디로 갔을까 ?

그 친구가 있어야 술 맛이 제대로 나는데...."

하고 김삿갓을 일부러 찾아 나설 정도로 정답게 되어 버렸다.


그 덕택에 김삿갓은 광한루에서 시를 여러 편 읊게 되었는데,

 그중에 한 편을 소개하면,

...

남쪽 나라에서도 풍광 좋은 광한루는 (南國風光 畵此樓 / 남국풍광 화차루)

용성 고을 오작교 바로 이웃에 있네   (龍城之下 鵲橋頭 /용성지하 작교두)

마른 강에 소나기 퍼붓고 지나가니   (江空急雨 無端過 / 강공급우 무단과)

들에는 물이 흠뻑 뭉개구름 뭉갠다.  (野潤餘雲 不肯收 / 야윤여운 불긍수)


머나먼 천릿길을 외롭게 찾아드니       (千里筑鞋 孤客到 / 천리축혜 고객도)

신선들은 사시장철 장구 치며 노는구나 (四時가鼓 衆仙遊 / 사시가고 중선유)

은하와 선경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銀河一脈 連蓬島 / 은하일맥 연봉도)

구태여 바다의 용궁은 찾아 무엇 하리오.(未必靈區 入海求 / 미필영구 입해구)

...

김삿갓은 광한루에서 한 해 여름을 보내는 동안에 술도 많이 마셨고,

시도 많이 읊었지만, 남의 시도 많이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특별한 시는, 계화(桂花)라는 60이 다 된 노기가 들려 준

<사모(思慕)>라는 시였다.


어느 날, 김삿갓은 노인들의 시회(詩會)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동석한 계화라는 노기는 자기가 지었노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들려 주었다.

...

고운 비단 짜다 말고 다락에 오르니  (織罷氷紗 獨上樓 / 직파빙사 독상루)

수정발 저편에 계수나무꽃 피어있네  (水晶簾外 桂花秋 / 수정염외 계화추

정든 님 떠나신 후 소식조차 끊어져 (牛郎一去 無消息 / 우낭일거 무소식)

오작교 주변에는 밤마다 수심이오.  (烏鵲橋邊 夜愁愁 / 오작교변 야수수)

...

김삿갓은 60이 다 된 여인이 그렇게도 애절한 시를 지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 시는 남의 것을 자네가 지은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

정든 님이 떠난 지가 몇 해나 되었지 ? "


노기는 거짓말이 탄로난 것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더니,

"님이 떠나신 지는 이미 30년이 넘었다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렀기로 그게 무슨 상관이예요.

나에게는 어제 일만 같은걸요."

김삿갓은 그 대답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허어. 30년 전의 작별이 어제 일만 같다구 .... ?

헛 참 ! ...

남원 여자들은 춘향을 닮았는가 ? "


"그러게요.

저의 절개는 춘향이 같건만, 떠난 님은 이 도령 같지 못해,

30년을 눈물로 보내고 있다오."


"여보게 !

말 좀 똑똑히 해 보게, 도데체 자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님은 어딜 갔기에

30년이 넘도록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단 말인가 ? "


"가기는 어디를 갔겠어요.

한양에 가셨지요."


"허어, 그 옛날 한양에 가신 님

<이 도령>은 10년 후에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을 찾아왔는데,

자네의 <님>은 30년이 넘도록 , 여태까지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 "


"누가 알아요,

나의 님도 이 도령 모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가지고

 오늘이라도 나를 찾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아요 ?

그 양반이 떠나가실 때 내게 한 철썩 같던 언약을

 나는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걸요."

30년 전의 언약을 60이 다 된 지금까지 철썩같이 믿고 있다면,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도 오히려 어리석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래서 김삿갓은 넌즈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여보게 !

<신언은 불미(信言不美)요,

미언은 불신(美言不信)> 이란 말이 있다네.

자네는 옛님의 미언(美言)을 너무나도 과신하고 있는 게 아닌가 ? "

김삿갓의 말에 대해, 노기는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의 말을 믿고 살아야 해요 ? "

그러자 김삿갓은 농담 비슷이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았네.

그러나 애인의 말을 믿는 데도 한계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만약 옛날 애인이 오늘이라도 찾아 온다고 가상해 보세.

그동안 자네는 주름살 투성이의 할머니가 되어 버렸는데,

옛날 애인이 그래도 자네를 옛날처럼 사랑해 줄 것 같은가 ? "

그 소리에 좌중에는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노기는 웃기는커녕 별안간 울상이 되어 버렸다.


김삿갓은 농담이 지나쳤다 싶어,

너스레를 치려고 말머리를 엉뚱한 데로 돌렸다.

"여보게 !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네.

무슨 일이든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병이 생기는 법이야.

자네는 애인이 한양에 가셨다고 했는데,

한양에는 워낙 미인이 많아 지금쯤은 자네를 잊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걸세."


노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분개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면 30년 동안이나 일편단심으로 기다려 온 저는 어떻게하란 말이예요 ? "


"이 사람아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자네 마음이 30년이 되도록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 "


"저는 그 양반을 진심으로 사랑했거든요.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마음이 변할 수가 없지 않아요."


"자네가 아무리 그 사람을 좋아했기로,

그 사람이 자네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 "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양반은 한양으로 떠나가실 때 저한테 철썩같은 약속을 해 주신걸요."


"무슨 약속을 어떻게 철썩같이 했단 말인가 ? "


"한양에 올라가거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사 놓고,

 저를 한양으로 불러 올려 갈 테니,

자기를 철썩같이 믿고 기다려 달라고 말씀하신걸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으흠 ㅡ

자네는 그처럼 허황된 약속을 아직도 믿어 오고 있단 말인가 ?

그러고 보면 자네가 30년 동안이나 기다려 온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 준다고 약속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군 그래 !

자네가 그런 마음보를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해 왔으니,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날 리가 없지 않은가 ? "

김삿갓이 마지막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쏘아대니,

노기 계화는 마무 대답도 못 하고 얼굴을 수그린 채 울먹이기만 하였다.

...

이렇게 ,남원 광한루에서 꼬박 한 해 여름을 보낸 김삿갓은 계절이 가을철로 접어들자,

지리산을 넘어 , 따듯한 남쪽으로 가기 위해 또다시 방랑의 길에 올랐다.

 

...계속 145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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