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점진타파 (漸進打破 )》

오토산 2020. 5. 16. 14:27

초한지(楚漢誌)81

 점진타파 (漸進打破 : 조금씩 깨뜨린다.

 

 그로부터 10여 일 후.

 한신은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가면서, 하루는 번쾌를 불러 이렇게 명한다.

 

"우리는 머지않아, 대왕을 모시고 함양으로 진격할 예정이오.

그런데 함양으로 가는 길이 큰 문제요.

 

일찍이 장량 선생께서 함양으로 가는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오.

 따라서 잔도를 보수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요.

장군에게 군사 만 명을 줄테니,

주발, 진무등 두 장군과 협력하여 한 달 안에 잔도를 완전히 보수해 놓으시오.

만약 기일을 지키지 못하면, 법에 따라 엄중 처단할 것이오."

 

 번쾌는 너무도 엄청난 군령을 받고 기가 막혔다.

10만 명이 1년이나 걸려야 해낼 수 있는 대공사를,

단 만명을 가지고 어떻게 한 달 안에 완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

 번쾌는 생각다 못해, 즉석에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원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그러나 함양으로 가는 길은 천하의 험로인데다가, 거리도 천리가 넘사옵니다.

그것을 무슨 재주로 만 명을 가지고 한 달 안에 보수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

  원수님께서 저를 죽이고 싶으시거든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 주시옵소서."

 한신은 무슨 생각을 해선지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말한다.

 

"군령을 받고 어려움을 핑게로 임무를 회피하려 하는 것은

불충(不忠)에 속하는 일이오.

장군의 충의를 나는 잘 알고 있으니,

안 될때 안 되더라도 일단 최선을 다해 보시오."

 

번쾌는 더 이상 말대답을 했다가는 군법에 회부될 것 같아서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만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잔도 보수의 길에 올랐다.

 

 한편 한신은 그날부터 병사들을 손수 진두 지휘하면서,

마지막 군사 훈련을 강도 높게 계속하였다.

 평소에 훈련을 철저하게 시켜 둔 덕택에

군사들은 군호에 따라 정확하고 민첩하게 움직여 주었다.

 

깃발을 좌로 흔들면 나는 듯이 왼편으로 달려나가고,

 깃발을 오른쪽으로 흔들면 쏜살샅이 오른쪽으로 공격하고,

앞으로 흔들면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공격 대형을 취하며,

 징 소리와 함께 뒤로 흔들면 일보 후퇴를 하는데,

수백 수천의 군사들이 일사 불란하게 하나같이 행동이 일치하였다.

 

네 개의 부대를 하나로 통합하면 순식간에 장사진을 이루고,

 하나의 장사진을 네 개의 무리로 분산하니,

순식간에 사문(四門)의 군진(軍陳)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전진과 후퇴, 분열과 통합 등 복잡 다단한 군사 행동이 깃발과

 군호(軍呼)에 따라 , 커다란 군사의 무리가 하나가 움직이듯 하였다.

 

 한신은 군사들의 훈련 광경을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며,

하루는 한왕에게 이렇게 품하였다.

 

"대왕 전하 ! 출전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을 모두 끝마쳤사옵니다.

신으로서는 막강한 군대라고 자부하는 바이오나, 대왕의 어의(御意)에는 어떠하실지,

 친히 사열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한왕은 웃으면서 한신에게 말한다.

 

"장군이 군사들을 정예롭게 훈련시키는 광경을 여러 차례 보아왔는데,

새삼스럽게 사열식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구려."

 그러자 옆에 배석해 있던 승상 소하가 한왕에게 아뢴다.

 

"대왕 전하 ! 출진(出陳)을 눈앞에 두었으니,

대왕께서 최후의 사열을 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래야만 대왕께서도 든든한 마음으로 출진하시게 되시겠지만,

병사들도 용안(龍顔)을 직접 배알함으로써 사기가 더욱 왕성해질 것이옵니다."

 

"승상의 말씀을 들어 보니 그렇기도 하구려.

그러면 내일 아침 묘시(卯時:오전6시)에 연병장으로 나가기로 하겠소."

 

 다음날 아침, 한왕이 문관(文官)들을 모조리 거느리고 연병장으로 행차하노라니까,

한신은 모든 대장들을 인솔하고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왕이 사열대에 높이 올라서자,

 군악이 요란스럽게 울려퍼지며 사열식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한신 자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수만 군사들을 합동 지휘하는데,

 모든 부대의 대오가 하나같이 질서 정연하고,

나가고 물러섬이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면서도 진형(陳形)을 무궁 무진하게 펼쳐 보이는데,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열식이 끝나자,

 한왕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신을 가까이 불러 치하의 말을 내린다.

 

"장군이 군사들을 다루는 솜씨는 놀랍도록 뛰어나시오.

모르면 몰라도 손자나 오자도 장군만은 못했을 것이오.

군사들이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하게 훈련되었으니,

이제는 함양을 향하여 출진(出陳)하기로 합시다."

 한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신이 길일을 택하여 대왕을 모시고 출진하겠사오니,

출진할 날짜는 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그러면 출진할 날짜가 결정되는 대로 나에게 알려 주시오."

 

 한왕이 사열식을 끝마치고 사열대에서 내려오니,

잔디밭에는 어느새 주안상(酒案床)이 성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요란스럽게 차려 놓은 많은 음식들을 살펴보니,

그것은 파촉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산해 진미(山海珍味) 뿐이 아니던가 ?

 

(한신이 나를 위해, 이처럼 구하기 어려운 음식을 어디서 구해왔을까 ?

이런 음식을 마련한 것만 보아도, 한신의 충성심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구나 ... ! )

 

 한왕은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눈앞에 있는 음식중에 두세 가지의 음식만 먹기로 하고,

 나머지 귀한 음식들은 한신을 불러 이렇게 분부하였다.

 

"나는 두세 가지만 먹으면 족하니,

다른 음식들은 여러 대장이 다함께 모여 나눠 먹기로 합시다."

 

한왕의 우악한 분부에,

모든 대장들이 한결같이 감동하며 상 앞으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대왕 전하의 은혜는 하해(河海)와 같사옵니다."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실로 그 임금에 그 신하들이었던 것이다.

 

 한편, 번쾌는 잔도 보수의 중책을 맡고, 주발.진무등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현장을 둘러보니, 산은 높고 길이 험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바위는 앞을 가로막고, 수목은 겹겹이 얽혀 있어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왔다.

 번쾌는 한숨을 쉬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조차 들었다.

 

(혹시, 한신 장군이 초나라를 정벌할 자신이 없으니까,

시일을 끌기 위해 계획적으로 무모한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닐까 ?

그렇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 ! )

 

 번쾌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발. 진무와 함께 고운산(孤雲山)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러나 고운산 일대의 산세가 어찌나 험악한지, 새도 날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길을 보수하려면 10만의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적어도 1년은 걸려야 할 게요.

 그런데 단 만 명으로 한 달안에 보수하라고 하니, 나는 죽어도 못하겠소."

 

주발과 진무는 입을 모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나온다.

 그러나 명령을 직접 받은 번쾌로서는 간단히 단념할 수는 없었다.

 

"한신 장군은 준법 정신이 지독히 강한 사람이오.

 게다가 대왕께서도 한신 장군을 무척 신임하고 계시오.

따라서 우리가 임무를 시도조차,

 안 해보고 포기해 버렸다가는 반드시 참형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못 될 때는 못 되더라도, 일단은 최선을 다해 보기로 합시다."

 

 번쾌는 주발과 진무를 격려해 가며,

그날부터 군사들을 총동원하여 보수 공사를 시작하였다.

 

바위를 밑에서 파헤쳐 언덕아래로 굴리고,

큰 나무는 밑동을 도끼로 끊어서 계곡 아래로 던져 버리고,

높은 곳의 흙은 깎아 내려 낮은 곳을 메우고,

 이쪽 벼랑과 저쪽 벼랑사이에는 다리를 새로 걸쳐 놓았다.

이처럼 험악한 작업을 온종일 계속하자니, 바위에 치어 죽고, 나무에 깔려 죽고,

 벼랑에 떨어져 죽는 희생자가 날마다 속출하였다.

 

 "장량이란 자가 잔도를 불태워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

 그놈이 왜 이런 짓을 해가지고,

우리를 이렇게나 고생시킬까."

 

"누가 아니래, 그놈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장량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네.

그런 놈이 무슨 빌어먹을 군사(軍師)란 말인가 ! "

 군사들은 너무도 고생스러워,

<장량 선생> 욕하기를 입에 달고 일했다.

 

잔도 보수 공사가 10여 일쯤 계속되고 있을 무렵에,

대부(大夫) 육가(陸賈)가 1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돌연 공사 현장에 나타났다.

 

"아니, 대부께서 이 험악한 곳에 웬일이시옵니까 ?"

 그러자 육가가 대답한다.

 

"출동 준비가 다 되었으니,

처음 말한 대로 한 달 안으로 공사를 끝내도록 하라는

 대원수의 명령을 전하러 왔소이다. 아울러 기일 내에 공사를 끝내지 못하면,

장군을 엄중 처벌하겠다는 말씀이오."

 

육가의 말을 듣고, 번쾌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다가 화를 버럭 내며 항의하였다.

 

"대원수는 해도 너무하시오.

10만 군사로써 1년이 걸려도 끝낼까말까 하는 공사를 만 명만 가지고

어떻게 한 달 안에 끝내라는 말씀이오 ?

공사 기일을 연기해 주기 전에는 나는 죽어도 못 하겠소.

 아무리 대원수의 명령이라도 나로서는 못 해 내겠다는 말이오 ! "


 번쾌는 악에 받쳐서 육가에게 대고 마구 퍼부어 대었다.

 그러자 육가는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나더니,

번쾌의 귀에 입을 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대원수는 보수 공사가 한 달 안에 불가능한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적(敵)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장군을 다그치고 계신 것이오.

 그러니 장군은 그런 줄 알고,

군사들을 더 많이 보내주기 전에는 보수 공사를 기일 내에 못 하겠노라고

대왕 앞으로 표문(表文)을 올리도록 하시오.

대원수는 그렇게 하기 위해 장군을 일부러 다그치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난후, 공사 지원군이 도착하거든, 이렇게저렇게 하시오...."

 

 번쾌는 그제서야 한신의 깊은 계략을 알아채고,

밖으로 나와서 군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대원수는 보수 공사를 한 달 안에 끝내라는 엄명이지만,

공사가 워낙 험난하여 우리들 만으로는 도저히 임무를 완수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대왕전에 긴급히 표문을 올려,

지원 군사를 더 많이 공급받도록 하겠다."

 

그러나 육가는 그런 말은 못 들은 체하고 군사들에게,

 "그대들은 한 달 안에 이 공사를 끝내지 못하면 ,

대원수의 엄중항 처벌이 계실 것이니,

모두들 전력을 기울여 책임을 완수하도록 하라 ! "하고

 새삼스럽게 엄중한 지시를 내리고 본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육가가 공사 현장을 떠나 버리자,

번쾌는 예정했던 대로 한왕에게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대왕 전하, 신은 대원수의 명에 의하여,

 잔도 복구 공사(棧道復舊工事)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공사를 하는 전 구간의 지세가 워낙 험난한데다가

 희생자까지 속출하고 있는 형편이온데,

오늘은 대원수로부터 기일 안에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참형에 처한다는 엄명까지 받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대왕을 모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과된 책임을

그르쳐 본 일이 없사오나, 이번만은 대원수의 손에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대왕께서 신의 목숨을 구해 주시려거든 잔도 보수공사의 지원군을

하루 속히 보내 주시옵소서.

이에 아장, 이륭을 보내 이 표문을 올리옵니다.

 

 한왕은 번쾌의 표문을 받아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신의 계략을 이미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한왕은 한신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잔도 보수 공사에 병력이 더 필요한 모양이니,

 번쾌 장군에게 정병 천 명을 더 보내기로 하시오."

 모두가 적을 속이기 위한 술책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번쾌가 천 명의 지원군을 받고 나자,

  뒤이어 한신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작전 명령이 날아왔다.

 

<장군은 주발.진무등의 두 막료와 함께 잔도 보수 공사의 명목으로 보낸

 천 명의 정예 군사를 두 부대로 편성해 가지고 한밤중에 태산 준령을 넘어가

 초(楚)의 대산관(大散關)을 불시에 기습하여 대번에 점령하도록 하라.>

 

 번쾌는 작전 명령을 받고,

즉시 기습 무대를 편성하여 태산 준령을 타고 넘어 대산관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초나라 군사들은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무렵, 대산관의 수비의 총책임자는 대장 장평(章平)이었다.

장평에게 어느 날 군사 범증으로 부터 돌연 경고문이 날아 들었다.

경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산관은 한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한왕 유방은 대호(大虎)와 같은 인물이어서,

우리의 허(虛)를 어디로부터 찔러 올지 모르니,

장군은 불철 주야로 관문 경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 >

 

 장평은 이러한 경고문을 받아 보고,

 관문 경비에 철통같은 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더구나 그 무렵 항간에는 ,

 <한왕 유방은 초를 치기 위해 한신을 대원수로 기용해 가지고

함양으로 진격할 잔도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중이다>라는

 소문이 널리 떠돌고 있었으므로,

장평은 대산관의 경비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던 차였다.

 

 한편, 삼진왕의 한 사람인 장한은 ,

한신이 한나라로 들어가 대원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비웃었다.

 

"한왕이 한신이라는 졸장부를 대원수로 발탁하였다니,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구나. 한신이라는 자로 말하면,

어렸을 때 부터 구차하게도 남의 밥을 빌어 먹던 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깡패를 만나서는 그 놈들을 물리칠 배짱이 없어,

놈들의 가랑이 밑을 기어나갔다는 놈이 아니더냐 ?

그런자가 우리 초나라에선 출세할 가망이 없으니까 한나라로 도망을 가버린 처지인데,

유방이 그런 못난 자를 어쩌자고 대원수로 발탁을 하였단 말인가 ?

하하하, 그러려니 아무리 한신이 대원수가 아니라 대왕이 되었다 하기로,

그런 못난이를 누가 감히 두려워 할 것인가 ! "

 

 이렇듯 백전 노장 장한에게는 한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한신을 이렇게도 비웃어 주었다.

 

"한신이 지금 우리를 치기 위해 잔도를 보수중이라고 하지만,

 천 리가 넘는 험한 산길을 제대로 고치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만 병사로 동시에 보수를 시작하여 ,족히 1년은 걸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겨우 만 명의 군사로 길을 닦고 있다니,

정신이 올바로 박힌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장한은 한신을 이렇게나 업신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대산관을 수비하고 있는 장평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한신이 대산관에 이르는 잔도를 고쳐가지고 우리에게 쳐오려면,

적어도 1년은 더 걸려야 할 것이오.

이러나저러나 한신이라는 인물은 애시당초 우리와는 상대도 되지 못하는 인물이니,

조금도 걱정할 것 없겠소이다.>

 

장평은 그 서한을 받아 보고,

그때부터는 자기 자신도 경비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장평이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데 수하 장병이 급히 달려와 큰소리로 아뢴다.

 

"사령관님 !

  어젯밤 야음에 유방의 군사 백여 명이 우리 진영으로 귀순을 해왔사온데,

저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

 

"뭐야 ! 유방의 군사가 우리에게 귀순을 해왔다고 ? ...

음, 알았다. 내가 곧 나갈 테니, 그들을 사령부에 모두 대기시켜 놓아라 ! "

 

장평은 유방의 군사들이 귀순해 왔다는 소리를 듣자, 크게 기뻐하며,

급히 옷을 추스려 입고 사령부에 나와 보니,

백여 명의 귀순병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장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거짓 귀순병들이었다.

 

 "우리한테 귀순해 왔다는 유방의 군사들이란,

바로 이 사람들이냐 ?"

 

"예, 그러하옵니다.

오랫동안 헐벗고 굶주려 온 탓인지, 모두가 거지와 같은 몰골들이옵니다."

 

아닌게 아니라,

첫눈에 보아도 거지와 다름 없는 처량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장평이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유방의 군사라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냐 ?"

 

"예,

 그러하옵니다."

 

 "백여 명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유방의 군사라면 유방을 위해 충성을 다할 일이지,

 어찌하여 우리에게 귀순 해 왔느냐 ?"

 그러자 선임인 듯한 젊은이가 전체를 대신하여 큰소리로 대답한다.

 

"충성도 좋지만, 밥을 굶고서야 충성을 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저희들은 굶어 죽기가 억울하여, 초나라로 오게 된 것이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굶어 죽을 형편이었다는 말이냐 ?"

 

 "유방은 초나라를 치기 위해, 저희들에게 잔도를 보수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군량이 부족하여 밥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공사를 한 달 안에 끝내라고 다그치니,

 아무리 충성을 하고 싶어도 우리가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다 보니 저희들은 생각다 못해, 초나라로 귀순을 해오게 된 것입니다.

 

"잔도 보수의 책임자는 누구였는냐 ?"

 

"번쾌라고 하는데,

감때가 어찌나 사나운지,

밥도 먹이지 않으면서 우격 다짐으로 잔도 보수 공사에

 다그치기만 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장평은 그들이 혹시나 거짓으로 귀순한 것이 아닌가 싶어

여러가지로 의문을 가지고 묻고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위장 귀순을 하였다는 기색은 아무데서도 찾아 볼 길이 없었다.

 이에 장평은 마음을 놓고, 귀순병에게 말한다.

 

"만약 너희들이 거짓으로 귀순해 온 사실이 밝혀지면 용서 없이 처단을 하겠지만,

진심으로 귀순을 해 왔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겠다.

너희들 중에 누가 주동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주모자는 앞으로 나와 보아라 ! "

 

 그러자 요룡과 근무라는 두 젊은이가 좌중에서 벌떡 일어나며,

 "귀순을 책동한 주모자는 저희 두 사람이었습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오오,

너희들은 참으로 용감한 장정들이로구나 ! "

 장평은 그들의 용기를 칭찬해 주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 두 사람은 군에 끌려오기 전에는 무엇을 해먹고 살아왔느냐 ?"

 

 "저희들은 군에 끌려올 때까지,

보안군 이라는 두메 산골에서 사냥을 하면서 살아왔사옵니다."

 

"사냥꾼으로 살아 왔다면 활 쏘고 창 쓰는 재주는 보통이 아니겠구나 ?"

 

"활 쏘고 창 쓰는 재주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사옵니다."

 장평은 그들의 진실성을 떠보려고 ,

의심에 찬 질문을 여러가지로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재주가 아무리 좋아도 밥을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베가 얼마나 고팠으면, 저희들이 도망쳐 왔겠습니까 ?"

 

"그러면 너희들의 소망이 무엇이냐 ?"

 

"우선은 밥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고,

시국이 평온해 지거든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십사 하는 것 뿐이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 소원대로 밥을 배불리 먹여 주고

시국이 안정 되는 대로 기꺼이 고향으로 돌려 보내 주겠다."

 

 장평은 귀순병들의 희망을 기꺼이 들어 주기로 약속을 하고,

 "유방은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했다고 하는데,

 한신은 누구의 연줄로 그처럼 높게 쓰이게 되었는지,

너희들은 그 내막을 알고 있느냐 ?"하고 물어 보았다.

 

귀순자 들의 입을 통하여 적정(敵情)을 탐지하려는 심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요룡이 대답한다.

 

"한신은 본시 구변이 뛰어나서, 그가 병법을 강론하는 것을 듣고,

 승상이 강력히 추천하는 바람에 대원수로 발탁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한신이 대원수로 발탁된 뒤에

 모든 장졸들이 그의 명령에 잘들 복종하고 있느냐 ?"

 그러자 이번에는 근무가 대답을 한다.

 

"장병들이 한신 대원수의 명령에 잘 복종하냐구요 ?

 솔직히 말씀드리면 장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졸병들 조차도

 한신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형편입니다.

 더구나 번쾌 장군 같은 사람은 한신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있어서,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젠가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한왕 조차도 한신을 대원수로 기용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요룡과 근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두 사람은 많은 동료들을 귀순시키는데 공로가 컸으므로,

특별히 <대기 패관(大旗牌官)>에 임명하겠다.

 

대기 패관이란,

싸움이 있을때 군기(軍旗)를 휘두르며 사병들의 사기를 끌어내는

역활을 하는 것으로써,

장평은 일단의 군사를 이끌고 귀순해 온 요룡과 근무의 환심을 사려고,

계획적으로 그들에게 파격적인 임무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을 밥을 배불리 먹여 주고 씻기게 한 후에 깨끗한 옷을 주어라 ! "

 하고 명하였다.

 

장평은 귀순병들을 이같이 처리하고 나니 더욱 자신이 생겼다.

그리하여 삼진왕들에게도 사람을 보내,

<한왕 유방은 두려워 할 존재가 못 되니 너무들 걱정을 마시오>하고

통보까지 해주었다.

 

 한편, 항우는 팽성으로 천도한 이후로,

날마다 주색을 즐기며 정사는 거의 돌보지 않았다.

 

범증은 크게 걱정스러워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렸다.

그러나 주색에 미쳐 버린 항우는, 범증의 간언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항간에는,

 "항우가 그 꼴이 되어 가지고는 나라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범증은 그럴수록 애가 타서, 어느 날 밤에는 천문을 살펴 보려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 연후에 동서 사방의 별들을 살펴 보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서남방 하늘 기슭에 떠 있는 장성(將星)별 하나가

유난하게도 밝은 빛을 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 파촉이 서남방에 해당하는데,

 그쪽 장성 별이 저렇게도 휘황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한왕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에게 쳐들어 오려고 하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 )

 범증은 천문을 살펴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왕이 초나라를 치기 위해 한신을 파초 대원수로 발탁하였다고 하더니,

만약 한신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아쳐 오면 우리는 무슨 힘으로

그들을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인가 ?)

 

 일찍이 한신의 사람 됨을 알아 본 범증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막막해 왔다.

 그리하여 항우에게 또 다시 간언을 하였으나,

항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부(亞父)는 유방과 한신 따위에게 왜 이다지도 겁을 내시오.

그처럼 걱정이 되시거든 계량과 계향 두 장수에게 각각 군사 3천 씩을 주어서 

 삼진왕에게 보내어 국경을 지키게 하시오.

그러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오."

 

범증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삼진왕 중에서도 최강자인 장한을 직접 찾아가 상의하였다.

 그러나 장한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군사께서는 무엇때문에 유방이나 한신 따위를 그처럼 경계하십니까.

유방이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했다고 하지만,

한신으로 말하면 어렸을 때 부터

남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다니던 천하의 못난 놈입니다.

그런 못난 놈이 어찌 감히 우리에게 덤벼올 수가 있겠습니까 ?

더구나 그들은 이곳에 오고 싶어도 길이 끊겨서 못 올 것입니다.

천리 길을 보수하려면 10만의 병력으로 1년이 걸려야 될까말까 인데,

 

겨우 일 만의 군사로써 길을 닦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하니 제아무리 빨라도 10년 내에는 길 조차 완성하기가 벅찰 것입니다.

걱정 붙들어 매시고, 발 뻗고 주무세요..."

 

 백전 노장인 장한조차도 유방과 한신을

우습게 여기는 데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범증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나라가 망하려고 모두들 머리가 돌아 버렸는가 보구나 ... !)

 하고 혼잣 말로 탄식을 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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