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승상 소하의 예지(叡智)》

오토산 2020. 5. 15. 09:41

초한지(楚漢誌)79

 승상 소하의 예지(叡智)

 

 다음날 아침, 만조 백관들은 어전 조회(御前朝會)가 끝나자,

형조 대부(刑曺大夫)가 한왕에게 아뢴다.

 

"번쾌 장군을 어제부터 하옥시켜 두고 있사온데,

 그를 어떻게 처리하실 것이시온지, 선지(宣旨)를 내려 주시옵소서."

 

한왕은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매우 착찹한 심정이었다.

법대로 하자면 번쾌는 응당 참형에 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번쾌는 지금까지 생사 고락을 같이해 온 건국 공신이 아니던가 ?

​ 게다가 홍문연 연회때에는 꼼짝없이 죽게 된 자기를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사사로이는 동서(同壻)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국법을 어긴 죄인을

사사로운 정리로 용서를 하자니 국가 기강이 무너질 것이 아니겠나 ?

 한왕은 잠시 고민에 잠겨 있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이렇게 분부했다.

 

"번쾌는 국법을 무시하고 광언(狂言)을 떠벌린 중죄인이오.

그가 비록 나하고 인척간이지만,

그의 죄를 물어 마땅히 참형에 처하여 삼군의 훈계로 삼아야 할 것이오.

당장 조문(朝門)으로 끌어내어,

중인환시하 (衆人環視下 :대중이 보는 앞에서) 에 참형에 처하도록 하오."

 

 그러자 승상 소하가 한왕의 고민을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어 아뢴다.

 

"대왕 전하 !

번쾌의 죄는 참형에 처하고 남음이 있사옵니다.

그러나 번쾌는 지금까지 많은 공을 쌓아 온 개국 공신이옵니다.

게다가 대원수를 새로 임명하신 경사스러운 이때에,

개국 공신을 참형에 처하시는 것은 매우 상서스럽지 않은 일이옵니다.

 그러하니 번쾌의 문제는 신에게 일임해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그러면 신이 공의(公議)를 거쳐, 공평하게 처리하겠나이다."

 

 "번쾌를 처벌하지 않으면 국법도 문란해지려니와,

 새로 임명한 대원수의 위령(威令)도 확립되지 못할텐데,

승상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시겠다는 말씀이오 ?"

 

소하가 다시 아뢰는데,

 "대왕께서는 엄중하신 조서(詔書)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면 신 등은 그 조서에 따라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겠사옵니다."

 

 "승상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러면 조서를 내리기로 하겠소.

승상은 나의 뜻을 잘 알아서,

국리(國利)에 추호의 해로움이 없도록 선처해 주시기 바라오."

 

한왕은 승상이 의도하는 바를 잘 알고 있는지라,

마음 속으로는 철저한 소하의 보필을 무척 고맙게 여기며,

곧 상서(尙書)를 불러 명한다.

 

"대부(大夫)들의 공의(公議)에 의하여 번쾌를 엄중 처벌함으로써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도록, 승상 앞으로 조서를 내리시오.

조서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엄정해야 하오."

 

 한왕이 승상 소하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짐(朕)은 승상과 장량 선생의 천거로 한신 장군을 대원수로 맞았는데,

그것은 한신 장군이야말로

초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 천하의 지략가라고 나 자신도 확신했기 때문이었소.

그리하여 예를 갖추고 한신 장군을 맞아 온 터인데,

번쾌는 자신의 조그만 공로만 믿고 인신지례(人臣之禮)를 어겨 가며

 의식 절차를 문란케 하였으니,

이래 가지고야 국가의 기강을 어떻게 지탱해 나갈 수 있겠소.

이에 번쾌의 죄는 마땅히 참형에 처해야 옳을 줄 알고 있으니,

승상은 공의를 거쳐 죄인을 엄정하고도 공평하게 처단해 주기 바라오.>

 

 소하는 한왕의 조서를 받자,

조서의 내용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널리 퍼뜨려 놓았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서의 내용을 옥중에 있는 번쾌에게도 알리기 위해서였다.

 아니나다를까, 그 소문은 사흘이 채 못 되어 번쾌의 귀에도 들어갔다.

 번쾌는 조서의 내용을 전해 듣고 크게 놀랐다.

 

(장량 선생과 소하 승상이 다같이 한신을 대원수로 천거했을 정도로,

한신이라는 사람이 그렇게도 비범한 인물이었던 말인가 ?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어전에서 함부로 행패를 부렸으니,

 이번에야 말로 큰 실수를 하였구나 ! )

 

 번쾌는 그제서야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대장 주발(周勃)을 비밀리에 불러다가 부탁을 하였다.

 

"나는 한신이라는 사람이 장량 선생과 소하 승상이 천거하신 것도 모르고,

 대왕 앞에서 우리 대장들의 생각을 기탄 없이 토로하였던 것이오.

그러나 이제사 알고 보니, 그로 인해 나는 참형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소.

그러나 나는 이미 나의 잘못을 충분히 깨달았으니,

장군은 내가 참형을 면할 수 있도록 좋은 방도를 좀 구해 주시기 바라오."

 

 주발은 번쾌의 부탁을 받고,

곧 승상부로 소하를 찾아가 진정을 올린다.

 

"번쾌 장군은 개국 공신 입니다.

그가 일시적으로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오나,

지금은 본인도 크게 뉘우치고 있사오니,

승상께서는 대왕 전하께 앙탁(仰度)하시와 

 특별히 사면(赦免)을 내려 주시도록 애써 주시면 고맙겠나이다."

 소하가 대답한다.

 

"주상께서는 진작부터 파초 대원수(破楚大元帥)가 될 만한 인물을 구하고

 계셨으므로 장량 선생의 천거로 한신 장군같이 탁월한 인물을 얻게 된 것은 

 국가의 대경사라고 생각하오.

 이로써 우리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된 것이오.

그런데 번쾌 장군은 그런 내막도 모르고 무엄하게도 주상앞에서 행패를 부렸으니,

 주상께서 대로하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오.

그렇지만 번쾌 장군은 개국 공신이므로,

그 점을 감안하여 특별 사면을 내려 주시도록,

내가 대왕전에 상소문(上疏文)을 올려 보기로 하겠소.

아울러 제하 여러 장군들도 각별히 언행에 주의 해 주시기 바라오."

 

 소하는 국가의 원로인 여이기 노인등과 상의하여

 한왕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

  <대한국 승상(大漢國丞相) 신 소하는,

 삼가 대왕전에 상소문을 올리옵니다.>

 

신은 국가의 원로들과 함께 번쾌의 범죄 사실에 대해 공의(公議)를 거듭한 결과,

번쾌가 어전에서 행패를 부리며 망언(妄言)을 한 죄는

마땅히 참형에 처해야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사옵니다.

그러나 번쾌는 풍패(豊沛)에서부터 대왕 전하를 일관되게 보필해 온

 개국 공신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홍문연 연회에서는 목숨을 걸고

 대왕 전하를 구출해 낸 국가의 원훈(元勳)이기도 하옵니다.

 신 등은 그와 같은 전공(前公)을 감안하와, 이번만은 특별 사면을 내려 주시고,

차후에 이와 같은 죄를 또다시 범했을 때에는 단호하게 처벌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었사옵니다.

중신들의 공의가 이상과 같사오니,

대왕 전하께서는 중신들의 공의를 깊이 참작하시와,

 삼가 성재(聖裁)를 내려 주시기 바라옵니다.

 

 한왕은 그 상소문을 받아 보고

곧 소하를 불러 분부한다.

 

"번쾌가 자신의 공로를 믿고 국법을 유린한 죄는

 마땅히 참형에 처해야 옳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중신들이 공의로써 특별 사면을 청해 왔으니,

이번만은 중신들의 간언을 소중히 여겨 특별히 용서하기로 하겠소.

 그러나 금후에도 만약 신임 대원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때에는 그것 역시 내게 대한 불복종으로 간주하고 단호히 처단하겠소.

 그 점 거듭 명심하게 해주기 바라오."

 

 한왕의 특사령이 내려지자, 번쾌는 즉시 석방되었다.

 옥중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는 번쾌는,

 옥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한신을 찾아가 고두 사죄(叩頭謝罪)하며 말한다.

 

"소장은 장군의 영명하심을 몰라뵙고, 난동의 중죄를 범했음을 거듭 용서하소서.

 차후에는 신명을 다해 대원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맹세합니다."

 한신은 번쾌의 두 손을 반갑게 마주 잡아 일으키며 말한다.

 

""공(公)을 세우는 것이 신자(臣子)의 직책이라면,

분(分)을 지키는 것은 신자의 대절(大節)이라고 하지요.

 장군이 과거에 공훈이 많았기로,

어찌 그것을 믿고 국법을 무시하고 어전에서 교만을 부리셨소.

 주상께서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중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나 역시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그러니 주상의 은전을 가슴 깊이 아로새겨서,

금후에는 국가를 위하여 더욱 분발해 주기를 바라오."

 

 한신은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문득 자세를 바로잡더니 가볍게 꾸짖듯이 말한다.

 

"장군은 출옥하는 길로 나를 먼저 찾아오신 모양인데,

대왕 전하를 먼저 찾아 뵙고 사은의 말씀을 올리는 것이 신자의 예의요,

지금이라도 속히 입궐하여, 대왕을 배알하도록 하시오."

 

 번쾌는 한신의 충고를 듣고 나서야

예방(禮訪)의 순서가 뒤바뀐 것을 알고 적이 당황해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그 문제에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고 말머리를 바꾼다.

 

"대왕 전하에게 사은 숙배(謝恩肅拜)가 끝나거든, 퇴궐하는 길에 승상부에 들러,

승상 각하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도록 하시오.

장군이 이번에 특별 사면의 은전(恩典)을 받게 된 것은,

오로지 승상께서 애써 주신 덕택임을 알아야 하오."

 

 번쾌는 한신의 깨우쳐 줌을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며,

 부랴부랴 입궐하여 한왕을 배알하였다.

 한왕은 번쾌를 가까이 불러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말한다.

 

"그대는 나와 함께 풍패에서부터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워왔으니,

 내 어찌 그대의 공훈을 모르리오.

그러나 군신지간에는 예절이 엄중해야 하는 법이니,

금후에는 그 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라오.

 

그대도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그대의 지혜는 장량 선생에게 미치지 못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점에서는 승상에게 미치지 못하오.

한신 장군은 그 두 분이 나에게 추천해 준 천하의 기재요.


 그대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인신지례를 그릇쳤으니,

그 어찌 중한 죄라 아니 할 수 있으리오.

만약 승상이 그대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그대는 지금쯤 황천객이 되었을 것이오.

그렇게 되었다면 그대를 아끼는 나의 마음인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소.

승상은 슬기롭게 그대와 나를 다같이 기쁘게 해주셨으니,

그대는 승상의 예지에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하오."

 번쾌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맹세한다.

 

"신은 전하의 우악한 말씀을 듣고,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신의 잘못을 깨달은 이상,

이 몸을 나라에 바쳐 성은의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거듭 맹세하옵니다."

 한왕도 감격의 눈물을 지으며 말한다.

 

"내 그대의 깊은 충성을 어찌 모르리오. 승상부로 찾아가

승상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빨리 올리도록 하시오."

 

번쾌는 승사부로 달려가

소하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승상께서 소장을 구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소장은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옵니다.

 승상의 은혜는 백골 난망이옵니다."

 소하는 단 아래로 달려내려와 번쾌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한다.

 

"장군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이 모든 것은 주상의 은총이라는 것을 아셔야 하오."

 그리고 단상으로 데리고 올라 기쁨을 같이 나누며 말한다.

 

"우리가 천하를 평정하게 되면,

 장군은 누구보다도 먼저 일국의 후백(侯伯)이 되실 것이니,

이제 앞으로는 더욱 충성을 다하기로 합시다."

 

 번쾌는 충성의 맹세를 거듭하며,

그때부터는 한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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