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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동양반과 퇴계학맥을 찾아서

오토산 2012. 2. 14. 20:59
 

 

1.안동양반이란






안동을 양반(兩班)의 고장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동을 정말 양반의 고장이냐 아니냐로 인식했다기보다는 관습적으로 안동하면 양반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뭘까? 안동은 언제부터 양반의 고장이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안동의 양반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다 보면 안동의 유교문화의 맥이 잡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양반은 누군가




  양반이란 말은 원래 고려시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지칭하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양반이란 말이 지배신분층을 가리키는 뜻으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이후 양반이란 말은 사대부란 말과도 같이 사용되었고 또 사족(士族)이라고도 하였다. 사대부란 독서하는 선비(士)와 전현직 관료(大夫)를 말한다. 전현직 관료라 해도 선비에서 출발하였고 또 신분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문을 단위로 결정되는 까닭에 이들은 사족이라 하였던 것이다. 선비가 관료가 되는 방법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관직을 역임했던 사람의 후손들에게 주어지는 음직(蔭職)이 있었다. 그러나 관직이 없거나 품계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유학(幼學)이라 하였다. 따라서 양반이란 크게는 유학층을 기반으로 하여 전현직 관료와 품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16세기 이후에는 국가에 대한 군역의 부담을 지지 않는 특권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시대의 신분체계는 많은 혼란을 겪게 되었다. 전쟁의 혼란으로 이전에 신분을 구속하던 기록들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고, 농업의 발달과 함께 양인들의 신분상승 노력으로 양반이란 직을 매매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양반의 위치를 고수하려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문족․세족․청문사족이라 인식하면서 나름대로의 구분을 하고 있었다.




안동에서 양반이 되려면...




  안동의 양반들도 재지사족으로서 대체로 양반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양반의 명부라고 할 수 있는 향안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야 했다. 향안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지역사회에서 양반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따라서 여기에 문제가 있게 되면 엄청난 분란이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각 고을에서는 각기 향안에 입록하는 절차와 자격을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향규라고 하였다. 향안에 등록될 수 있는 자격과 과정으로는 내외사족으로 허물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며 향안에 기록할 때에는 먼저 초안을 작성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통지하고 모두 좋다고 하면 또 향선생에게 말해 다시 허락을 받은 다음에 향안에 올렸다. 여기서 허물이란 향리, 서얼의 후손이거나 이들과 결혼한 가문, 자신의 윤리도덕상에 중대한 과실을 범한 자 등을 말한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이고 부계와 모계, 그리고 처향에 이런 흠집이 있는지를 조사해서 결격사유가 없는 경우에만 향안에 등록이 가능하였다. 이것을 삼향(三鄕), 또는 삼참(三參)이라 하였다.  안동에는 이러한 향안이 많이 남아 있으며, 향안에 기록된 성씨를 기준으로 할 때 안동 양반의 문화는 대체로 47개의 성씨에 의해 형성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안동의 양반사회를 주도하였던 것은 6~7개 성씨에 불과하였다. 15~6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성씨는 안동권씨와 흥해배씨, 영양남씨 등이었으나 조선후기에는 의성김씨. 전주류씨, 풍산류씨 등의 영향력이 커짐을 알 수 있다.




안동의 양반 마을




  이렇게 안동사회를 주도하였던 양반들은 대개 동성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동성마을은 대개 행정의 중심지인 읍치에서 멀리 떨어진 아주 궁벽한 산골에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지방양반인 재지사족이라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것과 일치한다. 재지사족의 가계는 고려시대 지방의 행정실무자인 향리가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안동의 양반도 이런 형성과정을 거쳐 신유학인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중앙의 관직에 있다가 낙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자신의 근거지인 안동으로 낙향해 오면서 점차 동성마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곽에 위치한  이런 동성마을은 원래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개간에 필요한 노동력이 확보되어야만 했다. 당시의 사족은 양반이라는 신분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전현직 관료였기 때문에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산간 계곡에 적합한 농업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간 하천의 물을 이용해 이앙법을 사용한 벼농사는 안동 양반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이런 경제적 기반 위에 유교 관념이 정착됨에 따라 과거 처향에 거주해 살던 풍속들이 점점 변화되어 아버지 혈통의 친족집단으로 동성마을은 형성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동성마을은 예전보다 더 강하게 양반의 권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안동 양반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동성마을을 이룩하여 향촌사회에 강고한 지배층을 형성하게 된 양반들은 독자적인 지배조직과 규약을 갖추어 백성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유향소․향약과 향규․동계․동안 등이 그것이다. 유향소는 향촌 양반들의 가장 대표적이 자치기구이다. 위로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견제하고, 아래로는 향리와 백성들을 통제함으로써 지방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한편 이를 통해 양반의 기득권을 유지 확보하고자 한 양반들의 조직이었다. 향규는 유향소를 운영하기 위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향규는 양반들이 향촌 원리였기도 했지만 규제 대상에 바로 자신들인 양반도 포함되어 있어 자기 통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이런 양반들의 자기 통제는 안동의 양반들이 그들의 권위를 오랫동안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안동에는 지방관의 선정비나 영세불망비가 없다. 훌륭한 지방관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추측하건데 안동양반들의 위세가 워낙 드높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웬만한 수령이 와서 통치를 하더라도 유향소를 이끌어 가는 명망있고 누대로 가문을 만들어 온 양반이 많은 곳이 안동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을 것이다. 향규를 통한 자기 통제가 없었더라면 안동 양반들은 그들의 명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계나 동안은 양반들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을 단위로 실시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양반상호간의 경제적 상호부조를 통해 공동체적 유대를 강하게 하고, 이것을 통해 형성된 결속력을 바탕으로 그들 소유의 노비와 촌락의 하층민들을 지배하고자 한 것이었다. 양반 된 자로서 지켜야 할 가장 큰 덕목은 제사를 받드는 것과 손님을 잘 맞이하는 것이다. 더구나 의례를 중시하는 유교적 특색으로 인해 상장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력과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갑자기 맞이하는 여러 가지 일들은 개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으니 이때 양반들의 상호부조는 적절한 해결책이 되었던 것이다.




안동양반 ­남인




  안동의 양반들은 성리학을 공부한 신지식인 이었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났고, 영남 인재의 반은 안동에서 났다는 말이 들려주듯이 안동은 명실상부한 양반의 고장이다. 사람들이, 인재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 인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여말선초부터 시작된 안동 지방의 성리학적 기풍은 이후 퇴계 이황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영남학파(嶺南學派) 또는 퇴계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조선 전기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영남학파는 당대 사림(士林)을 대표한 학파로서 정계․학계․문단 등 여러 분야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황과 조식은 각각 영남좌도와 우도에서 영남학파의 영수로 추앙되어 많은 문도를 거느리면서 저명한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황과 조식은 서로 경우(敬友)로 대하였고, 그들의 문인들은 대개 두 사람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조식의 문인들은 광해군 때 정계에 다수 진출하여 주도권을 잡았으나, 광해군의 패륜과 폭정을 바로 잡지 못한 데다 선현(先賢)을 모독한 정인홍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후 남명학파는 점차 그 학맥이 약해지고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대명사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목․김성일․류성룡․정구․장현광․정경세․허목․이현일․이상정․이진상․곽종석․등이 있다.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병파의 학통은 정경세․류진․류원지․정종로 등으로 이어지고, 김성일을 중심으로 한 호파는 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류치명을 거쳐 김흥락에게 이어진다. 관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삼림에 은거하여 자신의 학문적 완성과 인격의 수양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살았던 영남의 인재들, 그들 남인들은 산림처사였다.

 

 

2.안동의 유교생활문화


 



 

한국사람에게 유교라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생활이다. 우리의 일상이 유교적 생활인데 이것을 글로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먹고 자고 놀고 하는 일들이 양반이라고 다를 수가 있었을까? 상민들이야 그들의 본성대로 살아도 무리가 없었겠지만 양반이라고 하는 계층은 자신들의 권위와 위엄을 지키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글공부이다. 양반은 글 읽는 사람들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그들은 출사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늘 과거를 준비하느라 책을 읽고 있었고, 엄격한 자기 통제를 위해서도 늘 글을 읽지 않으면 안되었다. 안동은 그런 면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각 지방 사람들을 일컫는 별칭이 있다. 그 중에 경상도 사람들을 보리 문둥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문둥병을 앓는 환자라는 말이 아니다. 골골마다 양반의 위세를 떨치고 사는 동성마을 있으니 그들의 어린 자제들이 글 읽어대는 소리가 늘 낭낭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문동이, 즉 글 읽는 소년들이 많다는 의미인 것이다.  양반 가문에서는 어릴 때부터 자녀에게 글을 읽고 쓰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선비의 길을 걷도록 하는 것이다. 비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정치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도 글을 읽어서 선비의 교양을 갖추고자 하는 것이다. 선비는 사실상 지식인이면서 도덕성 높은 수양인이다. 어릴 때부터 선비다운 인물로 기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가르침이 있다. 금하는 놀이가 있고 가르침을 절제하는 경계도 있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읽어보면 양반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양반들도 먹고살아야 할 것이므로 그들의 경제생활은 어땠을까? 안동의 토지는 산간에 소규모로 흩어져 있고 그나마 모래로 된 땅이 많다. 이런 농업조건이 대지주로서의 성장을 자연스럽게 억제하면서 골골마다 그만그만한 중소지주와 동성마을을 형성하게 하였다. 지방의 양반들은 서울의 관직에 나가있는 사람들과 달리 소유농지를 착실하게 경영하여 농업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과정에서 자기들의 경제적 기반도 성장시킬 수가 있었다. 15세기에 걸쳐 농서의 보급, 농경기술의 개량 및 농경지의 확대정책은 지방에 거주하는 신흥사족에 의해 추진되었다. 안동의 신흥사족들은 척박한 토지임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의 물과 신농법을 이용하여 그들이 경제적 기반을 유지했으며, 퇴계 향약 이후로 관권과 양반층 모두는 농민수탈에 대한 규제를 통하여 계급간의 모순의 정도를 낮추었다.  양반의 모습하면 떠오르는 것이 갓과 흰 두루막이다. 사람을 처음 볼 때 판단하는 우리의 방법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제일 앞에 오는 것이 바로 용모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도 의식주(衣食住)라 하여 용모가 가장 앞선다. 물론 용모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면 양반으로서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군자는 옷을 입고 있으면서 그 단정한 용의가 없으면 부끄러워한다’는 말도 있듯이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은 개량한복이 나와서 입고 다니는데, 편해서 누구라도 입고 다닌다. 그러나 따진다면 겉옷을 입지 않고 속옷만 입고 다니는 꼴이니 때때로 민망할 때가 있다. 예전에 안동 양반들은 집에 있을 때조차도 항상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어디를 가던지 무엇을 하던지 두루마기는 정장이자 예복이었다. 물론 여성들도 몸을 노출시키지 않는 복장을 하고 다녔다. 물론 여성들보다는 못하지만 남자들도 함부로 맨살을 내 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양반이라고 해서 늘 이렇게 자신을 규제만 하고 있지는 못했다 조선시대가 금욕주의적인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을 몸소 실천하던 양반들은 놀이와는 무관하게 도학을 연마하고 윤리를 실천하는 근엄한 존재로 묘사되어 온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양반 역시 인간이었으며 인간이었기 때문에 항상 긴장만 하고 살지는 못했다. 양반의 여가활동은 육체적인 활동보다는 정신적 활동에 치중했으며 역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이들이 추구한 여가활동은 시서화(詩書畵)를 비롯한 예술활동과 정적인 놀이에 국한되었고, 활동의 단위도 개인이나 작은 집단으로 한정되었다. 산림(山林) 또는 강호(江湖)로 표현되는 자연은 양반들의 여가활동의 대상이자 공간, 그리고 삶의 지향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양반들의 여가활동을 이해하려면 풍류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는 방법은 첫째로 그들이 삶의 공간에 풍류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는 그와 같은 조건이 갖추어진 자연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안동의 많은 문화재 가운데는 건축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양반들이 건축한 정자류들이 많은 편이다. 기록에 의하면 300여개가 넘는 정자가 있었으며, 현재 안동에 남아 있는 정자만 해도 170여개가 넘는다. 주변경관이 뛰어난 곳에 정자를 만들어 연못을 파거나 나무 또는 화초를 심음으로써 풍류를 일상화할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외에도 뱃놀이를 이용한 풍류를 즐기는 방법이 있었는데, 농암 이현보나 퇴계 이황이 낙동강에 배를 띄워 왕래하면서 달빛 아래 뱃놀이를 즐긴 것은 지극한 풍류가 아닐 수 없다. 또한 하회마을의 적벽을 본 딴 듯한 부용대 아래에서 벌어지는 뱃놀이 또한 유명한데 지금까지 전통이 이어져 내려와 선유줄불놀이로 남아 있다. 안동 지역은 낙동강 상류로써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 많은데 물과 산이 잘 어우러진 자연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풍류 중에서 산수유람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산수유람은 세상을 경험하고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 다시 글쓰기와 공부에 반영하게 하는 훌륭한 놀이였다. 조선전기에 산수를 유람하고 적은 유산록 등이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영남사람의 산행기록은 김종직 이후 한결같이 유산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퇴계 이황도 풍기군수로 가 있는 동안 소백산을 유람하였고, 겸암 류운룡도 금강산을 유람하고 와서 기록을 남겼다. 산행은 풍류를 즐기는 행위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학문을 연마하고 더 나아가서는 체력을 단련하는 일기도 하였던 것이다.  산을 아끼기로 유명하기는 퇴계 이황의 청량산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각별한 퇴계의 청량산 사랑은 급기야 청량산은 우리 집안의 산이라는  말을 낳았다. 자신이 사는 곳과 가까운 데에 있어서 수시로 찾아가서 벗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에 올라서 많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렇듯 산은 양반들의 놀이의 공간이자 수양의 공간이었다.

 

 

3.퇴계의 학맥을 찾아서---

 

(퇴계--유성룡--학봉(김성일)--경당(장흥효)--갈암--밀암--대산--소산--정재(류치명)--서산--석주)

 

 

 

1.경당 장흥효(張興孝, 1564~1633)

 


  장흥효의 자(字)는 행원(行原), 호(號)는 경당(敬堂)이며, 태어난 곳은 안동부(安東府) 금계리(金溪里)이다.  고려태사(高麗太師)벼슬을 지낸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이며, 시조(始祖)인 장정필(張貞弼)은 888년(신라 진성여왕 2년)에 대사마장군(大司馬將軍) 원(源)의 아들로 중국 절강성 소흥부(蘇興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함께 우리나라로 망명한 그는, 930년(고려 태조 13)에 고창(현재의 안동)에서 성주(城主)인 金宣平(안동 김씨의 시조), 判官 權幸(안동 권씨의 시조)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견훤의 군대를 대파시킨 공으로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 태사(太師)의 벼슬에 오르고 고창군(古昌君)에 봉해졌다.  그 후로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쓰며 오늘날까지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증조는 이무(以武), 조부는 흡(翕), 부는 팽수(彭壽)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경당은 처음에 첨지(僉知) 권사온(權士溫)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1녀를 두었는데, 바로 정부인 장씨다.  그 뒤에 후사가 없자 60세가 넘어 권몽일(權夢日)의 딸에게 다시 장가를 들어,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鐵堅(字, 若虛)은 호군(護軍)을 지냈다.  정부인(貞夫人) 장씨는 어릴 때부터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 원근에 칭송이 자자했으며, 19세 되던 해에 부친의 제자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에게 출가하였다.  오직 부친의 가르침대로 경(敬)과 성(誠)을 다해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받들며 7남 3녀를 모두 훌륭하게 길러내었다.  자녀 중 장남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은 역시 경당의 제자로 스승의 행장을 지었고, 3남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은 사림의 천거로 이조판서의 지위에 올랐는데, 전례를 따라 어머니 장부인에게 정부인(貞夫人)의 교지가 내려졌던 것이다.  경당은 나이 12세가 되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스승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理)를 밝히고 몸을 닦는 것을 학문의 요체로 삼아 『소학』과 『근사록』의 공부에 한결같이 전념했을 뿐, 과거공부와 같은 영달의 학문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와 같은 어린 제자의 독학정신을 눈여겨보았던 학봉은 ꡒ이 사람의 배움은 정력(定力)이 있으니 후일 크게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나의 문생 가운데 이와 같은 인재를 얻으니, 자랑스럽다ꡓ며 경당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29세 때 (1593년)에는 양친 상을 당했으며, 33세 때에는 다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하를 찾아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 번은 한밤중에 스승 서애 유성룡을 모시고 등불을 마주보며 ꡐ이(理)ꡑ자를 논한 적이 있었는데, 서애가 등불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ꡐ불의 허(虛)한 곳이 이(理)인가ꡑ라 묻자 경당이 대답하기를, ꡐ허(虛)는 실(實)의 대(對)가 되는데, 이(理)에는 대(對)가 없으니 허(虛)로써 이(理)를 삼을 수는 없는 듯 합니다ꡑ고 하였다.  이에 서애는 곧 응하여 말하기를, ꡒ허(虛)에는 허(虛)의 이(理)가 있고, 실(實)에는 실(實)의 이(理)가 있다ꡓ 라고 하였다.  이 한가지 일화만 보더라도 스승인 서애가 경당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경당은 ꡑ喜怒哀樂의 未發ꡐ과 ꡑ고요한 가운데서도 모름지기 물(物)이 존재한다ꡐ는 논리를 하나의 학설로 완성하여 鄭逑(1543~1629)에게 반복하여 변론한 적이 있었는데, 한강은 경당의 학문이 심득(心得)한 것이 있음을 깊이 탄복하였고 서로 알게 된 것이 늦었음을 탄식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37세 때는 경광서당의 당장으로 부임하였다. 여기서 그는 문인들에게 인사하는 법과 예절을 먼저 배우도록 가르쳤으며, 다음에는 사람됨이 진실하고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등 수신(修身)공부를 특히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재능에 맞추어 공부의 진도를 차등 있게 나누어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오늘날의 능력별 교수법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한 글자 한 글자 자세하게 풀이해주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성실하게 가르쳤다.


 


師 承


 


  영남학파는 영남출신의 사림파 학자들로 이루어진 학통이다.  이들은 ꡐ사림ꡑ이라는 신분적 자격으로 관직에 오른 자가 아니라, 학문과 정치적 역량으로 인해 사대부가 된 자 및 그 동류집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습화된 세대부(世代夫)나 벌열집단(閥閱集團)이 아니라 대부분 과거를 통해서 사대부의 신분이 된 전문적인 학자출신의 관료집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출신지역이 서울과 멀리 떨어진 영남지역이며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로서의 생활기반을 유지하는 한미한 지방 양반출신들로서 그들이 지닌 학문적 소양이나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사대부의 신분을 획득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학문적인 의리를 인간의 정신적 가치로 특히 존중하였다.  이와 같이 영남학파의 정신적 전통이 그러했던 만큼 의리는 영남학파의 존재이유이자 인식의 기반이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의리와 명분을 중시했으며, 또 역사적으로 수많은 의리실현의 행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이 중시한 성리학은 곧 실천궁행을 중시하는 실천도학적 성리학이었다.  영남학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역시 퇴계학파였다.  이 학파는 17세기 이후부터는 다양한 발전을 하게 되는데, 16세기에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양대산맥을 이루며 발전하였으나, 인조반정(1623) 이후로 남명학파는 쇠퇴일로의 길을 밟아 독립된 학파로서의 유지가 어렵게 되어 북인 , 노론으로 분산되었고, 나머지는 퇴계학파로 통합되고 말았다.  퇴계 이황의 성리학은 그의 문하생인 김성일(金誠一) , 유성룡(柳成龍) , 정구(鄭逑) 등에 의하여 계승되면서 각기 특색있는 발전을 보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유성룡은 두 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탁월한 경륜으로 임란이라는 7년 동안의 미증유(未曾有)의 국난 속에서 나라를 구출하여 명실공히 수기치인의 입공(入貢)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로는 학문적 관심의 다양성으로 인해 퇴계학파의 성리학도 다양하게 분기 , 발전되어 나갔는데, 학봉의 학맥은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장흥효(張興孝)→이휘일(李徽逸) , 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 , 이광정(李光靖)으로 이어져 나갔다.  경당은 퇴계의 학문대통을 학봉(鶴峯) , 서애(西厓) , 한강(寒岡)으로부터 이어받아 자신의 외손자인 존재(存齋) , 갈암(葛庵)에게 물려주었고, 존재와 갈암은 이 학통을 다시 갈암의 맏아들인 밀암(密菴) 이재(李栽)에 물려주었으며, 밀암은 다시 외손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형제에게로 이 학통을 전승케 하여 영남학파의 줄기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학맥의 사승(師承) 관계를 살펴보면, 영남학맥이 곧 퇴계학맥의 본간이며 중추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경당 이후 대대로 가학을 계승함으로써 학문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퇴계 이후의 한국 유학계를 대표하는 명현들인 바, 그 중에서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연구와 강론이 철저하고 독실하여 문하제자가 많기로 유명했으며, 퇴계 이후에 갈암 이현일이 정리한 주리론(主理論)을 더욱 발전시켜 퇴계학맥의 거봉을 이룸으로써 작은 퇴계, 즉 ꡐ소퇴계ꡑ라고 불려질 정도였다.  이러한 계통을 도표로 정하면 다음과 같다.

 

  2.학봉종택(鶴峯宗宅)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살았던 가옥이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며 학봉의 8세손 광찬(光燦)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종택의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계서당으로 쓰도록 하였고, 소계서당을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며 사용하게 되었다. 야산을 배산하고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 서남향으로 좌정하였는데, 근년에 지은 5칸 규모의 서북쪽으로 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좌측에 정침과 그 뒤쪽의 사당이 서남향으로 배치되었고, 마당 건너편에는 근년에 지은 운장각(雲章閣)과 정자가 서북향으로 나란히 앉아 있다. 정침은 □자에 양익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최근 좌측에 직각으로 일(一)자 아랫채를 달아내어 사(巳)자형으로 바뀌었다. 정침의 정면 우측에 사랑채가 돌출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2칸통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1칸씩 두고 전면에 길게 툇마루를 둔 중당협실형의 소계서당이었던 것을 개조하면서 좌측 2칸을 사랑방으로 꾸미고 우측의 2칸은 사랑마루방으로 만들었다. 사랑방 좌측에는 2칸통의 작은사랑방을 두었으며, 뒤로는 1칸 책방을 놓아 안채의 우익사에 연결하였다. 안채는 우측 3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좌측에는 2칸 안방을 두고 끝에 부엌을 놓았으며 그 앞쪽의 좌익사는 식당 등으로 내부가 개조되었다. 사랑채나 안채의 상부 가구는 5량가이고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올렸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3칸 사당을 배치하고 토석담장을 둘러 별곽을 이루었다. 우여곡절이 많은 건물로 구조양식적인 특징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학봉종택으로서의 품위는 간직하고 있다.




학봉 김성일(1538 - 1593)의 한글 서간


 


선조25년(1592)壬辰12月24日 학봉선생이 경상우감사로서 경남


산음현(산청)진중에서 안동본가의 정부인 권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로서 국문학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32×38cm)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가장 思念(사념)하네


나는 山陰(산음)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이르르면 도적이 대항 할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또 稷山(직산)입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가


염려 마오.


장모 뫼시옵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들 있으라 하오. 監司라 하여도 음식이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기필 못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흩날




김성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峯)이다. 선생은 퇴계의 문인인데 1556년(명종 11)에 아우 복일과 함께 도산의 이황 선생을 찾아 <서경>, <역학계몽>, <심경>, <대학의의> 등을 익혔으며, 1564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퇴계에게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을 받았다. 1568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사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검열, 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를 노릉(단종의 능)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토록 진언하였으며, 군덕과 시폐를 논의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 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 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 검상,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 순무어사로 함흥, 삼수, 길주, 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 우응장과 정견용, 김광옥 등을 선전관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선생이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를 소홀히 하고 창곡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 나씨간의 송사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금성산 기슭에 대곡서원을 세우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자성록>, <퇴계집>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 경기추쇄경차관, 예빈시정,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 이라는 정사 황윤길과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부제조를 겸하였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 서울로 소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류성룡 등의 변호로 직산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 산음, 단성, 삼가, 거창, 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을 보내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도관찰사 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 군량의 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선생은 정치적으로 동인에 가담, 1590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의 신원을 위해 서인의 영수 정철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릴 때 류성룡, 김우옹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또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고제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리론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학통은 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으로 이어 전해졌다. 또한 예학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에 따라 행하였으며 <두씨통전>, <구씨의절>, <향교례즙> 등 을 참고하여 <상례고증>을 지었다. 1614년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 사빈서원, 영양의 영산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하동의 영계서원, 청송의 송학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 <상례고증>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 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고성이씨 종택

 

 

 

 

임청각 (臨淸閣)


 


  임청각은 세종조에 좌의정을 역임한 용헌공(容軒公)의 손자인 참판공(參判公)의 삼자인 임청옹(臨淸翁)께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1519년(중종 14)에 창건하였으며 당초 민가로서는 최대 규모인 99간으로 건축하였으나 행랑채와 정문누대(正門樓臺), 별묘사당(別廟祠堂)은 임진란과 일제 때 중앙선 철도 건설로 소실 또는 철거되고 현재 군자정(君子亭), 정침(正寢), 사당(祠堂) 등 60여칸이 보존되고 있다. 임청각의 지형을 살펴보면 영남산 기슭으로 앞에는 낙동강이 흘러 반변천과 합수되어 문자 그대로 배산임류(背山臨流)에다 대안에는 일월산(日月山)이 뻗어내려 여기서 그친 무협산(巫峽山)이 정답고 멀리 강 건너 저편에는 문필봉 낙타산(駱駝山) 연봉이 수려하게 에워 둘러 그 아름다운 풍경은 화산절경(花山絶景)이라 칭하며 안동팔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목조 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임진란을 겪어온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가지가지 전설과 일화를 간직하며 480여 년 22대 동안 보존하고 있다. 전면 도로 중간에 서있는 고목은 정문 옆에 있는 나무였다. 정문은 2층 누대로 건축되어 옛날에는 낙동강 물이 누대 앞으로 흘러 누대 2층에서 낚시를 하였다. 이 집의 특기할 만한 세 가지 사실은 첫째, 20대까지 양자 한번 없이 종자종손으로 계계승승 이어지다가 국권회복운동 와중에서 종자 횡위(橫位)로 21대만에 조카 양자가 처음이며 둘째, 인물이 연면배출(連綿輩出)되어 문학석학이 대대로 이어졌는데 한말에는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이 여기서 탄생하였으며 일가 9위(位) 가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셋째, 재산이 부절(不絶)하여 수백 석, 때로는 수천 석의 부를 유지하여 임진란에는 이 집에 주둔한 명군을 상당기간 먹인 일도 있으며 흉세에는 기민구휼에도 힘썼다.


 


임청각 군자정(臨淸閣 君子亭)


 


  군자정은 丁자형 다락집이며 내부에 임청각 현판과 농암 이현보, 백사 윤훤, 재봉 고경명, 송강 조사수, 파서 이집두, 구포 나만강, 석주 이상룡 시판이 걸려있다. 고려시대 건축형으로 진기하다. 중, 하방이 벽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며 현판글씨는 퇴계선생의 글씨로 단아한 서체가 아름답다. 정자 옆에는 방형의 연못을 조성하여 군자의 꽃, 연꽃을 심어 군자의 심성을 닦고자 하였다.


 


임청각 정침(臨淸閣 正寢)


 


  임청각 정침(正寢)은 지리학적으로 일월이 합친 형국이라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한 용(用)자형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건축하여 어느 방이라도 광선이 들어 밝으며, 장방과 도리 사이에 옆방을 끼운 것과 중, 하방이 벽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며, 한 채의 가옥을 용(用)자형으로 건축하였기에 뜰(中庭)이 다섯 개로 지은 집은 임청각 외에는 볼 수 없는 특수한 건물이다. 2층으로 된 다락 부분이 곡간으로 많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청각(臨淸閣)우물방


 


  우물방은 정승이 세분이 나온다고 전해 오고 있다. 본손(本孫)으로는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과 외손으로는 문헌공(文軒公)이 이 방에서 탄생하였으며 앞으로 한 분이 더 나신다고 한다. 이 우물은 집안에 있는 것이 진기하며 영천수(靈泉水)라 하여 장마가 계속되거나, 가뭄이 계속되거나 하여도 일정한 수량이며 수질과 물맛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法興洞 固城李氏 塔洞派 宗宅)중요민속자료 제185호


 


  조선 숙종때 좌승지로 증직된 이후식(李後植 1635-1765)이 안채를 건축하고 이어서 사랑채와 대청(永慕堂)을 그의 손자 원미(元美 1690-1765)대에 완성한 가옥이다. 대청의 북쪽에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는 북정(北亭)은 7대조인 진사 이종주(李宗周)가 1775년(영조 51)에 건립하였다. 영남산의 동쪽 기슭에 좁은 계류를 끼고 넓직히 동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건너에는 대청이 높게 자리 잡았고, 연못 동쪽에는 사랑채가 있으며 그 곁에 口자 평면으로 구성된 안채가 있다. 안채의 동쪽에는 3칸 사당이 있고, 대청 북쪽 좀 떨어진 숲 속의 계류옆에 북정이 서 있다.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의 좌측 2칸은 큰 마루방이고 우측 1칸은 1칸반 온돌방 뒤에 반칸 골방을 두었으며, 전, 후면과 서측면에는 길게 동마루를 달아 내외부 공간을 연결하였다. 방과 마루방의 창문틀에는 가운데 설주가 서 있으며, 마루방에는 큰 범살문을 달아서 바깥으로 들어 열게 하였다. 마루방은 연등천장으로 5량가인데 종보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웠다. 사랑채는 정면과 측면이 2칸으로 서쪽에 2칸 크기 마루방이 있고 동쪽에 온돌방 두 칸이 앞뒤로 놓였다. 마루방 주위와 남쪽 온돌방 앞까지 동마루를 깔고 난간을 돌렸는데 마루방 북쪽과 남쪽 온돌 앞 동마루 끝에 계단을 쌓았다. 마루방과 온돌방의 살창문은 영쌍창이고, 5량가인데 충여 위에 첨차와 초각한 대공을 놓아 외기틀을 올리고 눈섭천장을 꾸몄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6칸으로 경사지의 높은 자연석 축대 위에 앉은 서산각지붕집이다. 중문간을 들어서면 방형의 안마당에 이르는데 정면 기단 위에 마당폭 가득히 4×2칸의 큰 안대청이 자리 잡았으며 방주에 5량가로 동자주대공을 세웠다. 대청 우측에는 직교하여 골방과 안방이 도합 4칸 길이로 마당쪽을 향하여 늘어섰고 그 앞에 부엌을 2칸 더 달아내어 중문간채에 관입되었다. 대청 좌측에는 2칸통 서녁방을 두고 그 앞으로 누다락집으로 3칸을 뻗어 중문간채에 접하였는데 누하에는 통래간과 헛간 2칸을, 누상에는 3칸의 긴 고방을 두었다. 중문간의 좌측에는 방과 부엌에 고방 2칸이 배치되었고, 우측은 관입된 안방부엌 오른쪽으로 봉당 1칸과 부엌방 1칸을 두어 중문간채가 우측으로 2칸 연장 돌출되었다. 이것과 대칭으로 안방과 뒤쪽 골방 오른쪽으로도 마루방과 동녘방을 돌출시켰는데 이들 단부를 사주문과 토담으로 연결하여 장방형의 내밀한 살림마당을 구성하고 한구석에 장독대를 꾸몄다. 안채 대청 뒷벽의 널청문과 안방 등의 살창문도 대부분이 영쌍창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은 숲이 우거진 야산과 계류 등 자연환경과 연못과 건축을 잘 조화시킨 사대부 저택으로 독특한 구조수법과 전통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이상룡(李相龍 1858-1932)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이명(異名)은 계원(啓元), 계원(啓源).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출신지는 안동면(安東面) 법흥동(法興洞: 현 안동시 법흥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멸망으로 인식하고 일제를 토벌하기 위해 군자금 조달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략과 대책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그 해 겨울 매제 박경종(朴慶鍾 : 영해출신)과 함께 1만 5천원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차성충(車晟忠)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 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자신을 포함한 유림계의 대응태도와 입장에서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새 방략을 모색하던 중 1909년 4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이상룡은 신민회와 더불어 서간도 이주 계획을 세우고 1911년 2월 3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가도로 망명하였다. 서간도로 망명한 후 이상룡은 오로지 이주한인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1911년에서 1918년까지는 서간도로 이주해온 우리 민족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독립운동지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후 1930년경까지는 항일독립운동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중국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상룡은 서간도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포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류인식은 교육부장을, 김동삼은 조직과 선전을 담당하였다. 경학사는 1913년 공리회(公理會)를 거쳐 1916년에는 부민단(扶民團)으로 개편하였다. 이런 일련의 조직들은 서간도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 이주해 온 한인들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곤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상룡은 당시 중국인들이 버려두었던 저습지를 헐값에 빌려 개간하였다. 몇 차례 시도 끝에 1914년경부터 벼농사를 지어 큰 수확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서간도 각지에 논이 개발되고 비로소 한인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서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들의 경제생활이 안정되면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실천운동도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겼다.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기간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그 후 고산자에 토지를 구입하여 학교를 신축하고 본교를 두었다. 이것이 뒷날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상룡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대동역사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역사관련 저술을 남겼다. 그는 민족정신과 주인정신을 동포들에게 심어주고자 우리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래서 한국고대사를 만주를 중심으로 단군→부여→고구려→발해의 흐름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한→신라, 백제, 가야로 연결시키는 이원적인 구도를 체계화시켰으며, 그 중에서도 만주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이것은 만주와 중국 북부가 고대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는 점을 부각시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그를 통해 독립에 대한 신념을 동포들에게 주입시켜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다. 1919년 국내에서 3, 1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전후하여 국외에서도 독립운동의 열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이에 남만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에 이상룡은 김동삼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만주 한인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이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사회의 자치기구였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을, 김동삼은 서무사장(김동삼이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으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성로(金聲魯)가 서무사장에 기용되었다)을, 김형식(金衡植)은 학무사장을, 김규식(金圭植)은 학무부장을 각각 맡아 활약하였다. 또한 이상룡은 1919년 4월 유하현 고산자에서 서간도 한족대표를 모아 독립전쟁을 주도해 나갈 군정부 즉 군사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임시정부의 산하 조직으로서 군정서 조직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것이 바로 1919년 4월에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였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으로, 김동삼은 군사 지휘를 총괄하는 참모부의 대표인 참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외에도 김성로는 서무, 김응섭(金應燮)은 법무, 김형식은 학무를 담당하였다.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와의 항쟁을 계속하던 이상룡은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그것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그는 1921년에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서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상해에서 개최되자 김동삼을 비롯한 핵심운동가들을 파견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면직안이 통과되었다.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된 박은식은 헌법개정을 추진하여 대통령 중심제를 국무령체제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였다. 그 해 9월 9일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은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 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단체나 독립군 양성을 통해 활발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다수의 운동가들은 이미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노선에 비협조적이었다. 6개월 가량 독립운동세력의 조정과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1926년 국무령직을 사임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1926년 2월 만주로 다시 돌아온 이상룡은 우선 만주내 독립운동단체만의 통합이라도 먼저 이루려는 생각에서,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3대 재만광복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일제의 만주와 중국대륙침략은 더욱 가열되었다. 1932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만주에서의 항일운동도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런 와중에 그는 그만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으로 여러 달째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상룡은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순국하였다. 의병에서 시작된 석주의 독립운동은 끝까지 무력항쟁론, 독립전쟁론을 고수해 나간 것으로 평가된다.

 

4.의성김씨종택(내앞,천전)

 


 

의성 김씨종택  (義城 金氏宗宅) 보물450호


 



 

  의성김씨 종택은 전면 11칸, 측면 8칸 모두 55칸 규모로 건물의 모든 방에 햇볕이 잘 들어오게 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본채의 전체적인 평면 구성은 동쪽 口자형 안채와 서쪽 일(一)자형 사랑채(4칸X2칸)가 나란히 서있다. 그 두채를 일(一)자형의 큰사랑채행랑(서고, 누다락)과, 일(一)자형의 행랑채가 이어져서 이것을 합친 ‘ㄴ’자형을 이룬다. 그러므로 종택은 전체적으로 ‘巳’자 형상을 하고 있다. 종택의 입구를 들어서면 앞쪽으로 담이 있고 그 안쪽으로 행랑마당을 지나 행랑채와 작은사랑채가 길게 가로 놓여있다. 행랑채와 작은사랑채를 연결하는 중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안채의 외곽부, 서쪽에 사랑채와 사랑채행랑의 전면 내곽부가 자리한다. 이 곳 안동지역의 사대부가옥의 배치형태에서 남자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랑채를 이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안채보다 낮은 앞쪽에 배치되는데 반해 안채와 나란하게 다소 위쪽에 배치되어있다. 그러면서도 안채는 口자형 평면으로 사랑채와 격을 두어 배치되고, 사랑채는 대청에서 앞에 있는 행랑채와 길게 연결되었다. 중간마당(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안채, 북서쪽으로 큰사랑채가 배치되어있으며 서쪽으로는 중층으로된 누마루(하층은 광으로 사용)를 지닌 큰사랑채행랑이 작은사랑채에서 오름계단으로 연결되고, 행랑채는 행랑마당쪽 중문에서 작은사랑채와 연결되고 있다. 안채는 중문부엌, 안방(큰방), 대청, 건넌방들과 헛간, 방 등이 대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다. 다른 口자형 양반주택의 평면과 달리 안방이 바깥 중문쪽으로 높게 자리 잡고, 대청은 안방에 직교해서 동향하고 있으며, 마루바닥이 세 개의 단(三段)으로 층으로 이루고 있다. 행랑채에서 바로 안채를 통하는 문이 없이 중간마당에 작은 중문을 두게 만들어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점은 조선시대 유교의 남녀유별, 내외사상을 철저히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리고 안채에서는 안대청이 내외 구별이 없이 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이웃해서 방의 배치와 구조가 계획되었다. 큰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커다란 사랑대청과 사랑방과 침방이 일자형으로 구성되어 집주인은 중간마당을 통하여 안채에서 큰사랑채에 이르지만 내객은 행랑채의 중문을 들어서지 않고 곧바로 서쪽의 작은사랑채를 돌아 넓은 사랑마당을 통해서 큰사랑채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채가 갖는 남자 주인방으로서 기능은 약하다. 큰사랑채와 행랑채를 잇는 부속채는 완전한 좁고 긴 2층 누다락 구조로 되어 윗층은 서고로서 큰사랑채의 대청과 이어지고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인다. 이 같은 2층 구조의 부속건물는 16세기 당시의 다른 주택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즉 중국 명나라 재상가의 집에서 응용되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행랑채는 작은사랑채 부분의 서쪽 끝에서부터 누마루, 부엌, 대문(중문)․그리고 행랑채 부분이 되는 마구간, 마루, 함실부엌방, 마루들이 일(一)자형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커다란 사랑대청과  사랑방․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중문부엌으로부터 안방, 대청, 태실, 작은대청, 건넛방, 부엌, 헛간 등이 口자로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이 집의 기밀성을 가지는 공간이다. 특히 안대청의 높이는 매우 높아 대청과 붙어 있는 건넌방의 천장상부를 누의 형식을 빌려 찬다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채의 기단은 사랑채와 같은 높이로 하였고, 덤벙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큰 것은 26X26cm이고, 작은 것은 20X20cm이다. 안채의 구조는 간결한 납도리집 양식으로 안방의 전면에는 난간을 툇마루가 있고, 툇마루 밑에는 간결한 굴뚝을 내었다. 지붕가구도 간략하게 하여 대들보 위의 종량은 형식적으로 작은 단면의 부재를 접시받침만으로 받들고 있다. 대청칸의 온돌방은 반침으로 웃목을 일부 가리고 있어 이는 연령별의 앉아야 될 자리의 구별을 고려한 것으로 계획되었다. 안대청은 5량집 구조이며 기둥머리는 한 곳만 제외하고, 기둥, 도리, 보를 간단히 결구하였다. 대공은 동자기둥을 세웠고 주심도리와 중도리는 납도리로, 종도리는 장여를 받친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정으로 하고, 기타 방들은 반자위에 종이마감으로 하였다. 대청마루바닥은 우물마루인데 높이를 달리한 3단으로 형성되어있다. 안마당의 배수처리는 부엌마다 밑으로 토관을 묻어 밖으로 빠지도록 하였다. 이 주택에서는 안채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기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안채의 비중이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무고주 5량집이며, 합각지붕에 흩처마로 되어 있는데 서쪽 3칸통은 대청이고, 동쪽 1칸통은 2개의 침방로 구성되어있다. 침방은 안대청과 뜰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위치해 있어 다른 지방의 사대부가옥에서보다 외간의 구별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은 배치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주택에서는 지형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다보니 자연히 약 6척정도의 높이가 높아져 행랑채와는 약 6척의 정도의 고저차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작은사랑채와 행랑채가 연결되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2층 바닥이 큰사랑채 대청까지 수평으로 연결되면서 그 아래는 광으로 사용 할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채의 구조는 막돌허튼층 쌓기를 한 기단위에 방형의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각기둥(21cmX25cm)을 세워 굴도리를 받치는 민도리집 양식이다. 가구는 오량으로 앞뒤의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접시받침만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흩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기둥머리에서는 외부로 보아지를, 내부로는 초공을 받치게 하였고 종보 위에는 대공을 세웠다. 대청 정면은 세 살 쌍여닫이문으로, 대청과의 사이는 4폭 여닫이로 하였다. 행랑채는 정면 11칸, 측면 1칸의 3량집 규모로써 가운데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배치되어 있고, 그 양옆에 마굿간과광, 방 그리고 양끝에서 1칸씩 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큰사랑채의 뒤편 북서쪽 높은 언덕 위에 따로 담장을 쌓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건축되었는데 본채와는 축이 약간 틀어져 있다. 정면 4칸, 측면의 1칸의 맞배지붕에 1고주 1량집 구조이며, 정면에 퇴칸마루를둔 사당의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곳에는 청계선생의 불천위 위판과 영정을 봉안해 두고 있다. 출입은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통해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사당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안채와 좀더 가깝게 배치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서는 사랑채와 아주 가깝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당과의 기능적인 관계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협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주택을 둘러싸고 있는 담은 외담과 내담의 이중으로 되어 주거의 기밀성을 좀 더 보장해 주고 있다.

5.정재종택


 

정재종택 (定齋宗宅) 경북 문화재자료52호


 



 

    대산학설(大山學說)을 승계한 퇴계학파의 거봉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선생의 증조부인 류관현선생이 1735년(영조 11)에 건립한 가옥이다. 임동면 수곡2동에 있었으나 임하댐 수몰로 인하여 1987년 현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대문채, 정침, 행랑채, 사당 등 4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침은 口자형 평면으로 전면에 사랑방과 사랑마루, 갓사랑, 책방을 두었고 안채에는 안방과 부엌, 찬방, 대청, 루마루, 상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반으로 5량가로 결구되어 있다. 좌측 퇴칸 부엌은 안방과 전면의 찬방을 끼고 있으며 좌측 협칸과 어칸은 통칸온돌로 놓고 우측 협칸과 어칸은 대청으로 꾸미고 대청 전면과 우측 퇴칸의 누마루측으로는 4분합들장지를 설치하여 하절기 통기를 용이하게 꾀하고 있다. 안방과 대청 전면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대청과 누마루 배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짜여져 있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한칸반으로 5량가로 결구되어 있다. 사랑채 좌측 퇴칸은 갓사랑방이 한칸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어칸은 통칸 온돌방으로 큰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방과 사랑마루 사이는 4분합들장지로 구획되어 있고 사랑마루와 전면의 툇마루 사이도 4분합들장지가 설치되어 있어 하절기의 원활한 통기를 배려하고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두칸 온돌방이 있고 우측에는 장마루 청판을 깐 두칸 고방이 설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한칸의 3량가 맞배지붕이다. 두칸 고방과 창고, 외양간, 온돌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랑채 곁에 3칸의 디딜방아칸이 위치해 있다. 사당은 우측 중문을 지나 들어설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내부바닥은 장마루로 처리하였고 구조는 막돌기단 위에 덤벙주초 깔고 방주위 상부가구는 5량가로 결구하고 있다. 정침의 누마루 바닥 높이가 서로 다른 것으로 미루어 평상시 서로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사료된다.


 



 

만우정 晩愚亭 경북 문화재자료37호


 



 


 

  조선시대 병조참판을 지낸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1777-1861)의 강학지소로 1885년(고종 22)에 건립된 정자이다. 현판은 대원군의 친필이다. 높은 자연석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을 꾸몄는데 좌측칸을 통칸방으로 꾸미고 우측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원주와 방주를 혼용하였는데 대청부분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다. 대청의 외부벽은 판벽으로 마감하고 모든 칸에 창호를 달았는데 정면의 가운데 것은 키가 높은 굽널세살문으로 출입의 용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울거미가 있는 두짝 널문을 달아창의 쓰임새로 하였다. 대청의 원기둥 위에는 주두를 올렸고 창방과 외목도리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워놓아 대청부분을 강조한 소로수장집으로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5량가로 동자형대공을 세운 장식성이 없는 간결한 구조이다. 누하부는 목주를 받쳤으며 온돌방의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규모가 작고 꾸밈새가 검박하나 전면에 큰 누마루를 두어 그런대로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가 있는 집이다.  원래 널직한 후원터에 담장 돌림 없이 산전에 위치해 있었는데 산과의 공간적 단절이 없이 그대로 산록의 연장처라고 볼 수 있는 위치였으며 별당중에서도 매우 여유있는 배치형식을 보이는 예였다고 하겠다. 1913년에 건축한 건물인데 정자의 건축기법에서는 아직 조선시대의 수법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당초 임하면 사의동 악사에 위치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8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같이 이건한 정재종택의 오른쪽에 있다.


출처 : 진성이씨 온계선생 후손들 사랑방
글쓴이 : 병은(我虛軒)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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