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십 년 공부 나무아미 타불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 한데 쉬어 간들 어떠하리"
위의 시조는 황진이를 대표하는 시조이지요.
벽계수라는 왕족의 건달이 황진이를 사모하여 접근을 하였는데
황진이 또한 그 사나이를 은근히 꼬실 때 지은 시조라고 하지요
벽계수의 본명은 이종숙(李琮淑). 세종대왕의 17번째 아들 영해군의 손자이지요.
영해군의 아들 길안 도정 이의(李義)의 셋째 아들이며 세종대왕의 증손자가 되지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이라면 단연 황진이를 꼽지 않을 수 없어요
보름달 같이 환한 미모에 꾀꼬리 같은 목소리 ...

황진이가 누각에 앉아 가야금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면
재잘대던 산새들도 소리를 멈추고 황진이의 노랫소리와 가야금의 곡조에 귀를 기울였다고 하지요
황진이의 어머니는 진현금이었는데 진현금이 어느 따듯한 봄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데
지나가던 황진사의 아들이 진현금의 미모에 반해 정을 통하여
낳은 자식이 서녀(庶女) 황진이라 하는군요
그녀의 본명은 진. 일명 진랑(眞娘) 기명은 명월이며
조선 중기 개성(송도)의 명기(名妓)로 당대 최고라 했어요.
절세미인 황진이는 홀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갖가지 교육을 잘 받았고 학문과 예의범절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8세 때에 천자문을 통달할 정도로 총기가 있어
10세 때에 벌써 한시(漢詩)를 짓고 고전(古傳)을 읽었지요.
기적에 입문 후에는 서화(書畵)와 가야금에도 출중한 기량을 발휘하여
당대의 최고의 명기가 되었어요
기생의 길을 가게 된 이유는 이러하지요
15세 때 그 동네에서 황진이를 연모하던 한 청년이 있었는데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짝사랑으로 속앓이를 하다가 그만 상사병이 들어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청년의 어미가 황진이의 어미를 찾아와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게 해 주면
자식을 살릴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소연하였지만 극히 섭섭하게도 냉정히 거절을 당하였고
그 청년은 못내 한을 품고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황진이는
어느 날 집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그 집 앞을 지나가던 상여가 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뗑그랑 ~뗑 뗑그랑 ~뗑 상여의 종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사실을 알아본즉 자신을 짝사랑하다 죽은 청년이 한이 맺혀 못 가는 것을 알고
황진이는 소복으로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아가 자신의 치마를 벗어서 관을 덮어 주고
아주 슬프고 애절하게 곡을 해주니 그제서야 상여가 움직였다고 하는군요
이러한 일이 있은 후 황진이는 자기를 연모하는 남정네들이 많은 것을 알고
그들에게 죽음을 몰아다 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기생이 될 것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자신의 자유분방한 성격대로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그 당시 수도였던 개경의 많은 선비와 학자들과 정을 통하고 교제를 하였든 것이지요
황진이와 가깝게 교제한 사람은 많으나 대표적인 인물이 벽계수(碧溪水)와
지족암에서 30년을 수도한 지족선사(知足禪師)였어요
그리고 화담 서경덕(徐敬德)이었지요
황진이는 벽계수를 넘어트린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지족선사를 찾아갔어요

황진이가 지족선사에게 넙죽 절하며 제자로서 수도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사는 여자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지요
황진이는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허지만 그냥 물러설 황진이가 아니지요
두 번째 찾을 때는 꾀를 내어 변복을 하였지요
황진이는 소복단장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을 다시 찾아갔어요.
그리고는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 불공을 드리러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지요
황진이는 지족선사가 있는 바로 옆방에 거처를 정하고
매일 밤 축원문을 지어서 아주 청아한 목청으로 천사와 같이 불공 축원을 하였어요
처음에는 아랑곳 아니하던 선사는 매일 낮이면 농익은 여인의 소복한 아름다운 자태에 눈이 어두워지고
밤이면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지요.
은은한 불빛에 비추이는 농익은 여인의 실루엣과
밤만 되면 님 그리워 잠 못 이루는 애끓는 여인의 몸부림에
지족선사는 어찌할 수 없이 욕망이 솟구쳐 무너지고 말았어요
황진이의 능란한 그 수법에 결국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말았지요
20년을 수도하고 10년을 공부한 지족선사 ...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의 속담에
“십 년 공부 나무아미 타불”이란 말이나오게 되었다 하지요
"십 년 공부 나무아미 타블..."

세상 남자들은 황진이가 앞에 나타나면 모두가 넋을 잃을 정도로
그 아름다운 자태와 미모에 반해서 오금을 못 폈는데
오직 한 사람 서경덕만은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한밤중 단둘이 동침을 하면서도 사나이 지조를 지켰다 하지요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은 대학자였어요.
그는 당시 과거에 급제하고도 부패한 조정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마다하고
일생을 학문 정진에만 힘썼던 은둔 거사이자 대학자였지요
집은 극히 가난하여 며칠 동안 굶주려도 태연자약하였으며
오로지 도학에만 전념하며 제자들의 학문이 일취월장 하는 것을 볼 때면 매우 기뻐했다고 하는군요
평생을 산속에 은거하며 살았으며 세상에 대한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지만
정치가 도를 넘게 타락하거나 정도에 어긋나면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곤 하였지요
이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지요.
자연히 그의 인물됨이 인근 개성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었어요
벽계수를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황진이는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래서 기생으로서 많은 선비들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서경덕에게도 쓰기로 했어요

어느 날 하루 종일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이었어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하얀 속치마 저고리만 입고
우산도 없이 장맛비를 흠뻑 맞은 상태로 서경덕을 찾았어요.
비에 젖은 하얀 비단 속옷은 알몸에 밀착되어
가뜩이나 요염한 기녀의 몸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지요.
그런 차림으로 계속 비를 맞으며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던 초당으로 들어갔어요.
물론 서경덕이 혼자 기거하는 집이었지요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뜻밖의 절세미인을 보자 반갑게 맞으면서
'뉘신지는 모르나 어찌 이 비를 다 맞았노!!! ...' 하며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홀딱 벗겨 버렸지요.
알몸이 되다 싶게 옷을 벗기고 직접 물기를 닦아주는 서경덕을 보고 오히려 쾌재를 불렀어요
황진이는 아름다운 전나의 몸을 요염한 자세로 요리조리 취하며 서경덕을 유혹했지요.
그러면서 황진이는 "저도 x 달린 사내인 것을" 하며 은근히 접근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황진이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서경덕은 마른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렇지... '
황진이는 알몸의 몸으로 이부자리에 누우면서 더욱더 요염한 자세로 교태를 부렸지요.
남은 한 장의 속곳마져 벗어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으로
몸을 뒤채는 듯 전라(全裸)의 농익은 육체를 보여주어도 서경덕은 눈도 깜짝 안 하며
오히려 이불을 덮어주며 몸을 말리라고 하면서
그리고는 다시 꼿꼿한 자세로 앉아 글 읽기를 계속했지요

시간이 지나 날은 어두워지고 이윽고 밤은 깊었지요.
그런데도 서경덕은 책만 읽고 있었어요.
황진이는 화도 났지만 오기가 발동했지요
그래서 이불을 걷어 치우고 벌거벗은 몸으로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아양을 떨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삼경쯤 되자 이윽고 서경덕이 옷을 벗고 황진이 옆에 누웠어요
'옳지~ 이제사 사내의 본색을 드러내는구먼 ...' 하면서 좋아했지요.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옆에 눕자마자
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면서 편안하게 꿈나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서경덕은 벌써 일어나 아침밥까지 차려 놓고 있었어요
허허 ~ 아뿔싸 ~ 듣던대로 정말 대단한 위인이구나 ~~
황진이는 대충 말린 옷을 입고는 부끄러워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지요.
그리고 며칠 후 황진이는 성거산을 다시 찾았어요
그때와는 달리 요조숙녀처럼 정장을 제대로 차려입고
음식을 장만하여 서경덕을 찾았지요.
역시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이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고
방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 달라는 뜻을 밝혔어요
빙그레 웃는 서경덕.
그 뒤엔 사제지간으로 황진이가 평생을 흠모하며 지냈다 하는군요
여자치고는 뜻이 크고 기개가 높아 사내대장부에 못지않았던 황진이.
황진이는 서경덕의 큰 기개 앞에서 두 손을 들고 말았지요
그리고 서경덕에게
“선생님은 개성의 3절이십니다.”하고 찬탄을 하니
서경덕은
“무엇이 삼절인고?”하고 되물었어요
그 첫째가 서경덕,
둘째는 황진이,
그리고 셋째는 개성의 박연폭포”라고 하였다 하네요.
서경덕이 죽고 난 후 황진이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녔으며
황진이가 죽을 때까지 그를 흠모했다 하는군요.
오늘도좋은하루되세요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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