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리티...
- 글 중 나오는 ‘어주자(魚舟子)’라는 사람이 작가(安東 조정래) 본인입니다. -
서울을 출발하여 두 시간 정도 달려 구름이 저만치 중턱에 걸려있는 문경새재를 넘었다.
90을 바라보는 부모님들이 아직 산골에 사시니 자연 이런저런 일로 자주 문경 새재를 넘어가게 된다.
문경에 잠시 들러서 붉은 오미자 막걸리를 서너병 사서 차에 넣고 다시 예천 읍내로 차를 몰았다.
아들이 간다고 하면 이런저런 음식장만을 하는 수고를 나이 드신 어매가 해야 하니
가능한 저녁은 먹고 집에 가는데 오랜만에 예천 읍내서 매운 면을 먹고 갈까해서다
매운 면은 전국서 유일하게 예천에서만 먹을 수 있다.
용궁을 지나면서부터 눈발이 날리더니 예천 삼거리에 도착하자
낡은 시골 중국집 간판 위로 흰 눈이 휘날리는데
간판이 잘 보이지 아니할 정도로 눈이 날렸다.
다행히 초겨울인지라 눈은 내리자 말자 녹아서 그리 빙판길은 아니다.
중국집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테이블에는 얼굴 시커먼 농부 두 분이 앉아서
매운 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계셨다.
자리에 앉아서 매운 면을 시키고 기다리는데 그때다,
허리가 굽어 키가 초등학교 오학년 정도의 작은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한눈에도 육신이 오랜 세월 다하여 기력이 많이 떨어진 그런 모습이신데...
더욱이 입으신 옷이 수년간 음지에서만 말린듯하고 등에는 빛바랜 보따리를 들고 계셨다.
요즈음 좋은 가방들이 많아서
시골 할매들도 웬만하면 등산 가방이나 혹은 신식 여성 가방을 들고 장에 오시는데
키 작은 할머니는 천으로 된 보자기를 안고 들어오셨다.
들어오시면서 한숨 한번 몰아쉬시더니 가만- 가만 메뉴판 앞으로 걸어가 한참을 보시더니
혼자서 매운 면을 주문하고 앉아 있는 어주자를 보시더니
"저-어 선상님 이중 기중 싼 게 뭐잇껴?"
물어 보신다.
기중 싼 거...
오오, 참으로 오랜 만에 들어보는 우리 토속어다.
자리에 앉지도 아니하시고 엉거주춤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고
저에게 그런 질문하시는 것은,
혹여 먹거리가 비싸면 도로 식당 문을 나가실 그런 표정이시다.
"할매요! 내가 기중 싼 거 찾아 드릴 터이니
우선 추분데 이 난로 옆에 쫌 안즈시소!"
나는 안다...
키작은 할매 표정을 보면 글을 모르시는 분이다.
할머니는 메뉴판 중에 가장 값이 싼 우동을 시키셨다.
그리고 보따리를 페인트가 벗겨진 중국집 의자 옆에 내려놓으시면서
아주 낮게 또 한숨을 쉬셨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 할머니는 마치 눈 내리는 저녁처럼
금방이라도 우실 것 같은 표정이시다.
무슨 마음에 병이라도 있으신 듯 하기도 하고
아니면 몸져누워 계시는 할아버지 일로 고달픈 여생이 아닐까,
그런 추측을 낳게 하는 표정이시다.
표정이 너무 슬프시니 달리 말을 걸지도 못하고
나는 먼저 나온 매운 면을 먹기 시작하고...
할머니는 조금 늦게 우동을 받아 드시고는
우선 두 손으로 우동 그릇을 들어 뜨거운 물을 후르륵 마시고는
식탁에 내려놓고 젓가락 드실 힘도 없으신지 드시는 것도 여릿여릿 이시다.
그 사이 옆자리 얼굴 검은 농부들은 소주 한 병을 추가 했고,
소 사료 값이 너무 올라간다며 삶의 고달픔을
텅 빈 마구간처럼 허허롭게 토해내면서
작은 소주잔을 핏줄 선 목 줄기 안으로 연거푸 털어 넣었다.
철가방을 든 배달군은 오토바이 시동을 끄지도 아니하고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매운 면 5인분,
고평 갈 꺼 다 됫니껴?"
주방 쪽을 보고 소리치고
중국집 주방에서는 방금 전화주문 들어온 짜장면 수타면 치는 소리가 탕탕 거렸다.
창 밖에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작은 똥개가 두 마리가 이리저리 신나게 뛰고 있었다.
매운 면을 다 먹고 방금 오토바이로 배달을 마치고 돌아 온 아저씨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낮은 소리로
"저 할매 우동 값도 지가 냄시더" 하자
중국집 주인은 할머니를 한번 보시고 어주자를 힐끗 쳐다보시더니
"저 할매 우동 값을 사장님이 대신 내 드릴라니껴?" 말했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할머니 우동 값까지 치르고
잔돈을 받아서 매운 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예천 읍내로 차를 몰았다
부모님에게 갖고 갈 고기를 사고 싶어서다.
휘날리던 눈발은 내성천 다리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다시 하늘로 치솟다가는 다시 강물 위로 떨어지더니 금방 물속으로 사라졌다.
읍내에 들어가서 그 유명한 예천 한우 고기를 몇 근 사서 예천 다리를 건너서
다시 삼거리로 빠져 나오는데 날이 이미 많이 어둑어둑 해졌다
다시 삼거리 중국집 앞을 지나가는데
잿빛 눈이 성성하게 날리는 도로 위에 조금 전 중국집에서
한숨을 쉬시면서 우동을 드시던 키 작은 할머니가 도로를 가로 질러 건너시고 있었다.
그냥 지나쳤다.
안동방향으로 직진하려고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데 사이드미러로 보니
길을 건너간 할머니는 다시 예천 읍내 쪽으로 자박걸음 걸이로 걸어가시는데
추우신지 잔뜩 어깨를 움츠리셨다.
신호가 바뀌고 안동 쪽으로 진행하다가 나는 갑자기 차를 돌렸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보따리를 들지 않고 걷고 계신다는 것이 그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마도 할머니도 어주자처럼 건망증이 심하시어 중국집에 보따리를 두고 나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만치 예천 다리 쪽으로 눈을 맞으면서 걸어가시는 할머니를 보고
다시 중국집에 급하게 뛰어 들어가니 주인이 할머니 보따리를 들고
"할매 보따리 찾으로 왔니껴?"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닌 주인이다.
가벼운 할매 보따리를 받아 들고 차를 몰아 할머니 옆에 세우고
차문을 내리고는
"할매요!
보따리 안 잃었닛껴?"
소리쳐도 할매는 이미 귀가 멀어진 분으로 잘 들리지 안으신지
손을 저으면서
"에이고~
언가이 고마우이더만 지는 비싼 차는 안타니더"
하셨다.
오! 이게 무슨 대답이신가?
서울말만 쓰다가 다시 3-40년 되돌아 온 세월의 대화를 듣는 것이니
나도 금방 이해를 못했지만
할머니 말씀은 자신이 두고 온 보따리를 돌려주려고 온 나를
택시 기사로 알고 비싼 택시는 안탄다고 대답을 하신 것이다.
결국 어주자가 차에서 내리고 할매 보따리를 보여주자
그제야
"에고 시상에...
이키로 고마븐 분이 다 있닛껴.
고마우이더 고마우이더.
이기 내 밥부제 맞니더, 맞니더!"하신다.
"밥부제..."
참 오랜만에 들어 본 소리다.
못살던 시절, 먼 산에 갈 때나 학교 소풍을 갈 때도
이런 보자기에 밥을 싸서 들고 다녔는데
그 당시 밥을 싼다고 하여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천 보자기를
"밥뿌제"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밥브제"라고 하기도 하는데...
아침 먹고, 점심 굶고 3-4십리 걸어서 읍내 장을 가거나
밭에서 일하는 분들이 기력이 떨어져서 발음을 여리게
혹은 연음으로 쉽게 하는 탓도 있고 반대로 배부를 때는
강한 된소리로 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기력보존법칙 발음일 것이다.
아무튼 눈발 날리는 도로에서 할매를 부여잡고 여차저차 물어보니
키 작은 할매는 예천에서 막차를 타고 학가산 아래 너리티 마을로 가실 분이셨다.
너리티... 산중에
"넓은(너리) 터(티)"를
조금 전 설명한 기력보존 법칙으로
"너리티"라고
발음된다고 보는데
아무튼 예천 너리티는 오지 중 오지 마을이다.
어주자 고향 집은 은모래가 흐르는 내성천 고평 다리를 건너서
우측에 팔현오규의 허백당 어르신의 학당이 있고,
좌측엔 조선 청백리 보백당 어르신 천년 흙집이 있는 직산 고개를 넘어가야하는데
할매가 가야하는 너리티 마실과는 방향은 물론 다르다.
그러나 어찌하랴...
눈 내리는 날 추위에 덜덜 떠시는 할머니를 쫌 태워드린들
어디 내일 아침에 태양이 아니 솟을 일도 아니니
내친김에 너리티까지 태워드리고 싶었다.
더욱이 이런 눈발이라면 산골로 가는 막차 버스는
운행을 아니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할매요 타이소.
지도 보문 지나서 너리티로 가니더!"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하고는 낡은 보따리를 차에 올리고할머니를 차에 태우시자
할머니는 어주자 차를 타시면서
"어이구 추버라!
아직 섣달 금날도 안 지냈는데 날이 이키 추부이더,
근데 선상님은 너리티 누집에 가시닛껴?"하셨다.
옷 지절이 춥고도 남을 옷이다.
덜덜 떠시는 할머니 위해 차량 히터를 강하게 해놓고
예천 공설 운동장을 돌아서 보문을 지나 굽이굽이 산길을 들어섰다.
다행히 눈발이 가늘어 지고 도로도 그리 빙판은 아니었다.
보문 산길로 들어서니
한 무리 산비둘기들이 논바닥에서 학가산 쪽으로 날아갔고
저만치 외딴 집에서는 저녁연기가 솟았다
말이 자가용 시대라지만 기름 값이 비싸니
산골에 들어서면 연기 올라가는 집들이 많아졌다.
연기는 겨울 포근한 눈 내리는 저녁하늘을 낮게 깔고
더 이상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면서
한 폭의 그림을 옆으로, 옆으로 느리게 그리고 있었다.
그동안 할머니와는 큰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본 결과
할머니는 조금 치매기운이 있었다.
너리티 이 깊은 산골에 시집와서 다들 8-9남매 낳아서 키울 때
자신은 몸이 약해서 겨우 4남매를 낳아서 키웠는데
첫째 딸은 수원서 공장 다니다가 시집가서 아파트 한 채 사서 잘 살고,
둘째 아들은 부산에서 사는데 거기도 자가용 살 정도로 잘 살고
셋째는 영주에서 연쇄점하면서 사는 데 지난 해 땅도 샀다면서
할머니는 자식들 이야기로 신이 나서 이야기 하셨는데,
문제는 넷째 막내딸을 이야기 하실 때부터다.
"막내이만 안즉 집도 절도 없니더.
얼나 때 젖배도 많이 굷었능기 돈이 없어 핵교도 못시키고
저케 못사는 신랑 만나서 오만 고생 다해도 안 되니더.
헌 차 하나 사서 대구서 아파또 앞 질바닥에서 나물 장사하는데,
사우가 노름을 하는 바람에 그 헌 차도 지난달에 팔고 저래 사능기 애물니더"
갑자기 이런 저런 막내 딸 이야기하시면서 치마로 눈물을 훔치셨다.
자신의 치마로 눈물을 닦는 모습도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지만
그런 할머니에게 뭐라 우스갯말을 던져야 기운을 차리실지 난감하였다.
"이 좋은 시상에서 글키 착한 우리 딸내미가
안즉 까정 집도 절도 없이 저카고 살고 있으이
내 가심이 새카맣케 다 타니더...
영감 죽기 전에 해준 쌍가락지도 아들 모리게 팔아 보태 줬니더만
무슨 영문인지 기중 착한 딸이 저렇케 형편이 안 피니더...
공부도 잘해서 학교 선상이 읍내 중핵교라도 보내 줘야한다 캐 싸면서
두 번이나 우리 집에 왔디더만 산골살림이 그르이
지지바들 언문만 깨우치마 고마이지 중핵교 갈 돈이 있었닛껴!
갸는 핵교만 보냈어도 엉가이 머리도 조아서 대핵 교수도 하고 남을 딸인데,
에미가 못사니 자식 앞날 다 망친니더. 내 때문에 다 망친니더
에고, 내가 지서어로 잠도 못 자니더"
할머니는 조금 전 하셨던 내용의 말을 또 하셨다.
대화를 돌려보려고
"할매 아들은 글키 잘산다하시니
며느리가 좋은 사람인 모양이씨더!"
할머니는 못 들었는지 듣고 대답을 아니 하시는지
며느리 이야기에는 아무 대꾸를 아니 하셨다.
막내 딸 이야기로 우시니 다시 며느리 이야기를 내가 묻자
할머니는 그제야
"그깐느므 며느리!
시어마이가 가면 예천까지만 돌아오는 차비도 잘 안 주는데 뭐...
그래도 괘안니더,
저만 잘 살만 내는 이제 살만큼 살았으이 개안니더.
그래도 손자 낳아주이 그저 미느리가 고마부이더"
이야기인즉 아들 집에 갔는데 돌아 올 차비를 너무 적게 주어서
예천에 내려서 너리티 마을 까지 30리를 걸어서 돌아오셨다 하셨다.
설마 하였지만 다음 날 우리 어매에게 그 할머니 이야기를 했더니
"아이고 야야!
그 할매 거짓말은 아잇다.
이 마을에도 며느리 집에 갔다가 차비도 못 얻어 오는 할마이 있다"하셨다.
아마 경북도청 이전 시 보상 받은 돈 들고
딸네 집으로 갈까, 서울 아들 집으로 갈까 하다가 아들 집으로 갔다가
결국 돈만 다 빼앗기고 다시 시골로 내려와서
집도 없어 구담 할매집 아랫방을 빌려서 사시는
종국이 어매를 보고 하시는 말 같았다.
차는 어느 덧 보문 절 입구를 지나고
시골길이라선지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다.
어주자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모래 강으로 치는 내성천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다가 산골로 접어들어 한참으로 올라가니
저만치 하늘아래 텅 빈 집들이 우울한 모습으로 멍하니 있었다.
너리티에 할머니 집에 도착하니 자꾸 할머니가 잠깐 들어오라 하신다.
텅 빈 낡은 집에 홀로 사시는,
아무래도 외롭고 산골마을 까지 자신을 태워 준 어주자에게
참지름이라도 주고 싶다며 부엌으로 가시면서 나를 방으로 떠미셨다.
할머니 방은 의외로 깔끔하였다.
아랫목은 다 낡은 이불이 깔려 있었다.
아랫목은 따뜻하였지만 외풍이 강해선지 등허리는 선듯선듯 하였다
이불이 너무 낡아 요즘 세상에 이런 이불을 사용하시다니!
하다가 금방 생각을 바꾸었다.
왜냐하면 시렁 위에 아주 좋은 이불이 두 채나
비닐을 덮어 쓴 채 올려져있었다.
보나마나 잘 산다는 아들딸들이 사드린 것이지만
당최 아까워 사용치 못하고 있는 것일 게다.
방안에 들어앉으니
“이기 지난봄에 담근 술 이씨더"하면서
할매가 내 놓으신 매실주를 방금 뒤안 장독대에서 퍼 온 듯한
얼음 성성한 물김치를 안주 삼아 마셨다.
실로 맛있는 단지 물김치다.
고향집은 이제 지름 산길로 안동 쪽으로 가면되니
이 산골길에 경찰이 나서서 술 조사 하겠나 싶어
에라, 모르겠다. 다시 몇 잔 들이키고 나서
“혹시 할매는 시집살이 한탄가
같은 노래 못 하시니껴?"
곧 잘 이런저런 자신의 신세 이야기를 잘하시니 그렇게 물어보니...
밤만 되면 너무 외롭고 잠도 잘 안 오고해서
요즈음 부쩍 혼자 넋두리 삼아 노래를 부른단다.
옳다구나!
"할매요!
할매 노래 한번 들어 보시더"
요즈음 애어른 모두가 강남 스타일 같은 노래나 춤에 빠져 있지만
못 먹고 못살던 시절엔 그렇게 신나는 노래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이 산골 마을은 육이오 때 빨치산 활동과 미군 폭격이 심해서
청상과부가 되신 분들이 많아 그런 분들이
긴긴 동지섣달 밤에 잠이 안 오면 주거니 받거니 부른
‘한탄가(恨歎歌)’ 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주자의 할머니도 어린 어주자를 앞세우고 어디 가실 적에는
이런저런 한탄가를 부르며 사셨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나는 할머니에게서
이런 고귀한 시집살이 한탄가를 녹음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구입한 갤럭시 브레이트인가 하는 핸드폰으로 녹음한 것은
대충 이러하다.
어두컴컴 저녁무렵 웬총각이 찾아와서 우리어매 보자드니
분홍치마 한감놓코 장가들러 왔다하네
부끄럽고 남사스러정지칸에 숨었는데 이참저참 어매말이
처녀공출 두려우니저총각을 따라가라 우는나를 달게는데
홑저고리 분홍치마 받고싶어 받았닛껴
우리어매 말한마디 거역못해 받았지만
시집온지 삼일만에 돌밭매로 가라카네
하루종일 밭을매고 저녁하러 돌아오니
세살아래 쪼끄만게 시누랏꼬 치받구나
정지칸에 들어서니 시어마이 닦달하니
앉도서도 못하고서디딜방아 찧어다가
아이삶아 채반담고한홉쌀을 씻어내어
씻은물에 따로담고 보리밥에 섞어삶아
시아버지 이밥푸고 시어머니 썪어푸고
신랑밥도 썪어푸고 시누이는 꽁보리밥
시동생도 꽁보리밥 가마솥이 넓다지만
남은밥은 하나없어 이내밥은 빈공기네
겸상으로 밥상담아
시아버지 시어머니 사랑방에 드리고요
신랑하고 시동생은 소반에다 담아서는
안방에다 들따밀고
시누이는 여자랏꼬 땅바닥에 채려주고
이내몸은 밥이없어 부짓깨이 두드리며
남을밥을 기다리네
시아버지 한숟가락 요만조만 남겨주면
쌀밥이라 내못먹고 시어머니 밥그릇에
깔끄랍게 남겨주면 시동생에 걸리구나
우리신랑 남겨주면 국물에다 말아먹지
한숟가락 뜨고나니 친정어매 생각나네
오일장날 들은소식 작년흉년 곡기없어
밀기울로 배채우고 허구헌날 굶기하니
사십중반 우리어매 육십할매 보다늙고
내년봄을 우째살꼬 밥숟가락 내려놓고
목이메에 가슴치네
....중략..............
백발 할매는 숨이 차시는지
홀로 노래하던 시집살이 한탄가를 중단하고는
가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셨다.
듣던 어주자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참을 서글프게 한탄가를 부르시던 할머니는
다시 치매 끼가 나타나시어
"우리 막내딸은 운제 지 집 사서 살낀고,
이 추분데 한데서 나물장사 한다꼬 오만 고생 다 할낀데,
이 추분데 우짜노 우짜노-오 "하시더니
이젠 부끄러움도 없이 꺼이꺼이 우시면서
또 치마로 눈물을 훔치셨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것 같기도 하였다.
연세가 87세라하시니
그러고도 남을 연세다.
조금 전 하셨던 말을 또 하시고 또 하셨다
그때마다.
"할매 걱정 마이소,
매앵 사람 살다보마 좋은 날이 오니더.
할매 시집살이 시절보다는 엄청 좋아진 세상 아잇껴
너무 걱정 마이소!
나도 할매처럼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괜히 그 할머니 막내 딸 넋두리에 콧등이 시큰거려서
더 앉아 있을 수 없어 일어서려고 하였지만
할머니는 한잔만 더 마시고 가라면서 자꾸 잡으신다.
그리면서 자신이 막내딸 때문에
잠을 잘 못 이루시는 밤에 지었다는 막내딸 한탄가를
마지막으로 한번 하시겠단다.
그러시더니 조금 전 한탄가를 쏟아내시던
서글픈 넋두리 소리로
딸아딸아 막내딸아 니가우면 내도운다
우짜든지 잘살아라
막내딸아 막내딸아 젖배곯은 막내딸아
니못사면 애닯구나
살아서도 잠못드고 죽어서도 잠못드고
우쨋든지 돈벌어서 죽기전에 댕기가라
니에미는 이래살다 건너산에 누버자도
천년만년 산다지만 니가울면 내도운다
옛날사람 말씀따나 막내딸의 울음소린
무덤서도 들린단다 우짜든지 잘살아라
.......중략..........
할머니 넋두리처럼 부르시는 곡조 중에
"막내딸의 울음소리는 무덤서도 들린단다"하시는
대목에서는 할매도 목이 메이고
듣던 어주자도 괜히 눈물이 솟았다.
외로움이 땅거미 보다 더 무겁게 내린
산골 마을 저녁이다.
할머니 집을 나서니 마당모롱이 큰 바위에
반달이 시리도록 창명하게 걸려 있었다.
-끝-ㅡ
<sns에서>
'시링빙야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孝不孝橋(효불효교) (0) | 2021.03.10 |
---|---|
돈 자루의 주인 (0) | 2021.03.08 |
수탉이 낳은 알을가져 오너라 (0) | 2021.03.08 |
십 년 공부 나무아미 타불 (0) | 2021.03.08 |
<영악한 마누라> (0) | 2021.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