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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탁선생

오토산 2011. 8. 8. 10:48

 

 

사인암과 우탁선생
   
▲ 상선암

우탁 선생은 고려시대 대학자로 금수산 자락 아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에서 태어났는데, 인근에서는 새원이라고도 부른다. 금수산의 정기를 받은 적성 땅에는 ‘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세 곳 있는데 새원이·새터·새말 등이다. 이곳이 이른바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품달촌으로 새원이에서는 우탁 선생이, 새터에서는 조선시대의 명필이며 대학자인 지수제와 유척기 선생이 태어났다.

우탁 선생은 고려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로 충렬왕 4년에 향공진사가 되면서 관직에 나섰는데, 선생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1308년 충선왕 즉위년, 우탁 선생이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일이다. 왕에 오른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한 일이 생겼다.

   
▲ 역동선생기적비

우탁 선생은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는데, 왕의 곁에 있던 신하가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를 못하였다. 이에 우탁 선생이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경이 근신이 되어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그 죄를 아느냐?”고 꾸짖으니 좌우의 신하들이 어쩔 줄 모르고, 왕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예안현 지삼리에 은거하며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롭게 유입되던 정주학을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 주었다. 특히 정이가 주석한 「역경」의 정전이 처음으로 들어왔으나 이를 아는 사람이 없자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여 달포만에 이를 터득하고 후진에게 가르치니 비로소 성리학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역(易)이 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여 선생을 역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탁 선생은 경서와 사기를 통달하였고, 더욱이 역학에 정통하니 점괘가 맞지 않은 적이 없다고 「고려사」열전에 전하고 있다. 후세에 전하는 역동 선생의 시조로는 청구영언에 「춘산에 눈 녹인 바람」과 늙음을 한탄한 「탄로갯가 있다.

   
▲ 중선암

사인암은 우탁 선생이 사인벼슬을 지내며 이곳에서 청유하였다는 유래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인암 밑을 흐르는 운계천의 옥같이 맑은 물, 첩첩이 쌓아 올려져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절벽, 어우러진 노송 등이 일품이다. 사인암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우탁 선생의 친필각자를 보기 위해 발길을 옮기니 물가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사찰에서 친 울타리와 자물쇠가 걸려진 쪽문이 시절의 각박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쪽문 앞을 맴돌다 보니 바로 옆에 서 있는 비가 바로 역동선생의 시비였다. 한손에 막대 집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白髮이 제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역동선생이 말년에 늙음을 한탄하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탄로갗이다. 사인암 주변에 널려있는 너럭바위에 더위를 피해온 피서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름이면 늘 있는 모습이다.

   
▲ 하선암

사인암 밑으로 다가서니 연마라도 한 것처럼 판판한 암벽에는 오랜 옛날부터 이곳을 탐승했던 유명·무명인들의 이름과 글귀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어 그간 세월의 더깨와 풍류를 보여주는 듯 했다. 사인암 위쪽 물 한가운데는 1977년 이 지방의 유림에서 건립한 역동선생의 기적비가 섬처럼 떠 있다. 아름드리 노송의 솔내가 진동하는 그 밑에서 역동 선생의 친필각자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선생의 친필은 아니었지만 선생의 뜻이 담긴 글을 대하니 아쉬움이 한층 덜어졌다.

   
▲ 사안암 앞의 바둑판

탁이불군(卓爾弗群)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것이 아니며 확호불발(確乎不拔)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독립불구(獨立不懼) 홀로 서도 두려울 것이 없고 둔세무민(遯世無憫) 세상에 은둔하여도 두려울 것이 없다 유유자적하는 역동선생의 모습이 그대로 글에 담겨져 있으니 사인암에서 금방이라도 선생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우탁 선생이 청유하며 장기와 바둑을 두었다는 널다란 반석 위에는 실제 장기판과 바둑판이 새겨져 있었다. 그 옆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세상시름이 씻기듯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 사인암 전경

1. 단양팔경과 단양 2팔경 :
단양지역의 명승지 중 선암계곡의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과 사인암, 남한강가의 구담봉과 옥순봉, 도담삼봉과 석문을 단양팔경이라 부르고, 다리안계곡, 죽령폭포, 칠성암, 구봉팔문, 북벽, 온달성, 금수산, 일광굴을 단양2팔경이라 부른다..


2. 정주학 :
중국 송나라 때 정명도, 정이천과 주자의 성리학을 말하는 것으로 이·기·심·정·욕의 상호관계를 연구하여 우주의 본체와 인성에 관하여 설명하는 철학. 중국 송나라 때 주희가 집대성하였으며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유입되어 정몽주가 종조가 되었고, 조선시대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등의 대유학자가 나왔다.


3. 역경 :
주역을 삼경의 하나로 일컫는 말로 중국 상고시대에 복희씨가 그린 팔괘에 대하여 주나라 문왕은 쾌사를 짓고 주공이 이의 육효를 풀이하고 효사라 했는데, 공자가 여기에 심오한 원리를 붙여 이뤄진 고대 중국의 철학책.


4. 고려사 :
조선 세종의 명을 받아 정인지·김종서 등이 문종원년(1451)에 지은 고려의 역사책.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모두 139권 10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5. 사인암 :
구단양에서 동으로 약6㎞, 신단양에서는 18㎞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푸른물과 기암절벽이 하늘 높이 치솟아 단양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명승지. 고려말 유학자 역동우탁선생이 사인(정4품)벼슬에 있을 때 이곳에서 청유하였다는 유래에 따라 조선 성종때 단양군수 임제광이 사인암이라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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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紀行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의 발자취  
  - 예안 지삼리 묘소와  사인암(탄로가 시조비)  -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정정재 

 

우리나라 역대 인물 중 퇴계선생,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은 모르는 국민이 없지만,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필자도 역동선생하면 탄로가(嘆老歌)를 지은 고려시대 성리 학자 정도이다.
그런데, 사진 여행을 하면서 안동과 단양 지방 곳곳에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의 흔적들을 접하면서 예사스런 인물이 아님을 실감 하였다.

안동 예안면(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의 묘와 재사), 안동대학교(역동서원(易東書院)), 영남대학교(구계서원(龜溪書院), 단양 적성면 하리.
대강면 사인암리에 유허비와 시조비, 애곡리에는 사당 등이다.

오늘은 역동우탁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과, 정4품인 사인 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 양상에 힘쓴 곳이라 현재도 마을 이름이 사인암리인 사인암을 둘러 보았다.

우탁 선생은 1263(원종 4)년 단산현(丹山縣) 금수산 칠성봉 아래(지금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 천규(天珪)의 아들로 태어나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 감찰규정(監察糾正), 성균좨주(成均祭酒)을 역임후,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다가 1343년(충혜왕 복위 3년)에 예안에서 81세에 사망하여 그의 묘소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지삼리에 있다.

예안(禮安)에 은거시 당시 원나라에서 새롭게 유입된 「역경」의 정전을 아는 사람이 없자 역동선생은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하여 후진에게 가르치니 비로소 성리학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易역이 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여 '易東역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인 동시에 시조문학(時調文學)의 효시(嚆矢)로 탄로가(嘆老歌)를 남긴 분이다.

  "한손에 막대 집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白髮이 제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嘆老歌 탄로가)

말년의 역동 선생이 늙음을 한탄하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탄로가」는 그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예안면 지삼리 '鼎井齋 정정재' 재실 정원과 충북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 암벽에 새겨 전한다.

그리고 역동선생은 어릴 적부터 성격이 곧아서 자기 주장을 분명히 폈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당사자가 어른일지라도 꼭 짚고 넘어가는 올곧음이 있었다. 1308년 충선왕원년 易東역동 선생이 감찰규정(監察糾正) 벼슬을 지낼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 원비와 통간하자 역동은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왕의 곁에 있던 신하가 격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를 못하자 역동 선생이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경이 근신이 되어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그 죄를 아느냐?"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이에 늘어서 있던 좌우 신하들이 어쩔 줄 모르고, 왕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 극간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고려사'에는 다음같은 우탁설화(禹倬說話)가 전하여진다.

어릴 적부터 성격이 곧아서 자기 주장을 분명히 폈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당사자가 어른일지라도 꼭 짚고 넘어가는 올곧음이 있었다.
어린 소년의 학문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고 거기서 우러난 행동 거지가 어떻게나 밝았던지 이미 학자의 학식과 군자의 품성을 갖췄다고 하여 과거에나 합격해야 주어지는 진사라는 벼슬 칭호를 15세 난 어린 소년에게 붙여 주었다.
처음에 그는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1290년(충렬왕 16) 그의 나이 27세로 과거 에 합격하였는데 처음 벼슬로 사록이라는 관직을 받고 지금의 경북 영덕군에 있던 영해 라는 곳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부임해 보니 이곳에 팔령이라고 이름하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어 주민들이 이 영험을 믿고 팔령신을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팔령신이란 이름 그대로 여덟의 방울신을 일컫는데 이들에게 재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화를 입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에 얽매여 힘겹게 재물 을 바쳐야 하는 주민들의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학에서는 민간신앙인 이러한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철저한 유학자인 우탁이 이를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는 이 팔령신을 타파하는 데 아주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한다.
그 하나가 여덟개의 방울을 만들어 그것을 부수어서 바다에 빠뜨림으로써 팔령신을 현지에서 구전되는 것으로, 여덟신 중 일곱을 없애고 나머지 하나마저 없애려 하자 살려 달라고 싹싹 비는데 보아하니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호호한 백발의 가련한 할미라 이를 살려 주었더니 이 신이 지금의 당고개 서낭이 됐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우탁에 관한 인물전설이 '우탁설화'라고 하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전해 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철저한 유학자로서 폐해가 컷던 미신 타파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우탁은 주역의 이치에 능한 사람이었다. 주역은 일명 「역경」이라 하는데 약칭으로 그냥 '역'이라고도 한다.

'역'은 괘를 따져 의미를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에 능하면 길흉을 점칠 수 있다.
주역의 이치를 깊이 공부한 우탁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역학자였으며, 또 이를 넘어서 도술까지 부렸다고 한다.

어느 여름날 개구리 울음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우탁이  "네 이놈들 계속 그렇게 기승을 부리면 멸종을 시킬 것이니라." 하고  글을 써서 개구리들에게 보내니 동헌으로 개구리들이 떼로 몰려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 했다는 이야기와   호랑이가 사람과 가축에 해를 끼치는 것을 보았을 때도 이런 방법을 써서 퇴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007.8.28 글.사진 정해유 영남일보사외편집위원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정정재 정면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영묘실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묘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비각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전경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제단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근경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시조비가 있는 풍경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탄로가 시조비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 시비

 ▲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역동우탁(易東禹倬)선생 재실 삼의문 三宜門

 ▲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리 소재  사인암.  역동선생이 정4품인 사인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양상에 힘쓴곳이라 현재도 마을 이름이 사인암리이다. 이곳 사인암에는 "한손에 막대 집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白髮이 제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는 嘆老歌 탄로가가 새겨져 있다.

 ▲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리 소재  사인암.  역동선생이 정4품인 사인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양성에 힘쓴 사인암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