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김삿갓의 고백

오토산 2022. 1. 19. 05:51

김삿갓 16 -
[김삿갓의 고백]
 
노승과의 문답에 어느덧 밤이 깊었건만
두 사람의 부르고 쫒는 시 짓기는 그침이 없었다.
 
노승이 부르면 김삿갓이 즉석에서 받고,
삿갓이 받으면 노승이 이내 불렀다.
부르는데도 막힘이 없으려니와,
쫒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노승은 김삿갓의 뛰어난 실력에 내심 크게 탄복하였다.
 이는 김삿갓도 다르지 않아 노승의 실력에 내심 찬사를 보냈다.
 
이렇듯 주거니 받거니를 계속 한다면
이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 것 같았다.
 
"어허,

내 평생 가장 뛰어난 시재(诗才)를 만났구료.

더구나 젊은 나이에 이토록 무궁한 시상(诗想)을 가지고 있다니
그저 탄복할 따름이오."
노승이 이렇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소생 금일에야 시선(诗仙)을 만나 뵈온듯 합니다.

대사님을 존경한다는 말씀밖에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

시선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외다.

내 칠십 평생에 수 많은 시객을 만났으나 진실로 탄복하기는 처음이요.

오늘 내기는 이 빈승이 진것으로 합시다."
 김삿갓은 펄쩍 뛰었다.

"대사님 솔직히 말씀드려 오늘밤 겨루기는 승패가 없는줄 압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는 판단이고 실은 불초가 굴복하였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불초 비록 용자(用字)에 능해 대사님의 부름에 쫒았다 할지라도

그건 한갖 재주에 불과할 뿐 그 속에는 심오한 뜻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사님의 시 속에는 평범함 속에 오묘한 뜻이 서려있으니

어찌 이 미천한 불초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대사님 앞에 무릅을 꿇습니다."

김삿갓은 진정 겸허한 인사말을 하였지만

이 노승을 높게 우러러 모시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누가 뭐라 한다해도 이 노승의 시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했다.
 
"허허허,

빈승이 이겼다고요?
대체 그런 예의가 어디 있습니까?
빈승은 나이를 먹었으나 결국 나잇값도 못하고

시주의 기도 꺾지 못했으니 빈승이 진것 입니다,

백중세가 되었다 할지라도 말 입니다.
늙은이 대접 하느라고 이겼다고 하지 마십시오.

시주는 정말 대성할 분입니다.
헌데 어떡한다?"
갑자기 노승은 정색을 하고 김삿갓을 바라본다.
 
"무슨 말씀 이십니까?"
김삿갓은 영문을 몰라 노승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우리 처음에 약속을 하였잖습니까?
지는 쪽이 이를 뽑혀야 한다고.

헌데 빈승은 나이를 먹어 뽑을 이가 없으니

어떻게 약속을 지켜야 할지 걱정스럽습니다."
 이 말을 듣고 김삿갓은 빙그레 웃었다.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이를 뽑힐 사람은 불초이온데

하물며 대사님의 이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은 후학을 너그럽게 보살펴 주시니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김삿갓은 정색을 하며 노승을 위로하였다.
 
"하하하, 고맙소.

오늘처럼 즐거움을 맛보기는 칠십평생 처음이오.
나무관세움보살."

노승은 합장을 하면서 김삿갓에게 일예를 보냈다.
 두 사람은 십년지기처럼 갑자기 친숙해졌다.
김삿갓은 노승을 진정 마음속 깊이 스승처럼 존경하였고,

노승은 젊은 시인을 둘도 없는 제자처럼 사랑했다.

두 사람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시를 논하고 천하의 경륜을 논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두 사람은 의기가 부합되었다.
 
결국 김삿갓은 한여름을 이 노승과 더불어 지내게 되었다.

시를 지어 주고받는 사이에 여름이 무르익어 계절이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글쎄 행색은 거지나 다름없는 젊은 과객이

입석봉 늙은 스님의 콧대를 꺾어 놓았다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노승과 김삿갓의 일은 사미승 밖엔 알수 없는 일이었건만,

금강산 일대에 산재한 절과 인가에 이러한 말이 널리 퍼졌다.

말이란 한 사람만 건너가도 커지기 마련인가?
급기야는 늙은 중이 젊은 과객 앞에서 무릅을 꿇었다느니,
젊은 과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한다는등...
별의별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렇게 김삿갓의 이름은

어느새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떠도는 말이야 어찌되었든 김삿갓은 노승을 깎듯이 섬기었다.
스승으로서의 존경의 선을 넘어 일종의 부정(父情)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노승에게 자기의 내력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는 노승을 신뢰하고 있었다.
 
"오 그렇던가?

이제야 하는 말이네만 내 자네를 가까이 두고 보면서

뼈대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네.
아무튼 비극일세."

"나무관세움보살."
 
김삿갓의 집안 내력을 듣고난 노승은

눈을 감은채 이렇게 말하고 한동안 묵상에 잠겨 있었다.
 
"대사님 !"

김삿갓은 자신의 내력을 털어놓고 나자 천만감회가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좀 해야 속이 풀릴것 같아 노승을 불렀다.
 노승은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본다.
 
"대사님 불초에게 떨어진 기구한 운명은

어떻게 생각하면 전생의 업보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같은 운명을 맞기도 참 어려울 것입니다.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맞이하여 헤쳐 나가는 길은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되어 집을 떠난 것입니다.

요즈음은 대사님 곁에서 즐거운 나날을 맞이하니

문득 불초도 불문에 입문하여 인간의 고해(苦海)를

건너가고 싶은 생각이 솟아 나는군요."

김삿갓은 솔직히 자신의 심경을 털어 놓았다.

노승이 인도만 하여 준다면 그의 제자가 되어 삭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승은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불문에 귀의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세.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자네에게는 시가 있으니까.
시는 자네의 슬픔을 위로하고, 마음의 갈등을 진정시켜 줄것 이니까.
또 시는 자네 삶이 어려울때 밝은 빛을 비쳐 줄 것이네."

노승은 김삿갓의 시를 높이 사고 있는 터라 그의 불문의 귀의를 만류하였다.
 어느덧 김삿갓이 입석암에 머문지도 달포가 넘었다.

계절은 늦은 여름, 벌써 아침 저녁으로는 가을 기운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외출했던 노승이 돌아오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 술생각이 간절하지?
늙은 중과 같이 있자니 먹고 싶은 술도 못 먹고

꾹꾹 참고 있으려니 갈등이 여간 아닐걸세."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말하는 노승의 얼굴을

김삿갓은 의아스럽게 쳐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