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14 -
[立石峰 仙僧]
입석봉은 글자가 말해주듯 깎아지른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들은 짐승의 형상을 한것도 있지만
발돋움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상도 있었다.
"가히 만물상이로군"
김삿갓의 입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헌데 선승은 어디에 살고 있단 말인가?"
그는 바위 천지인 봉우리 아래쪽을 훑어 보았다.
시선이 머무르는 한 곳이 있었는데,
둥그스런 큰 바위 아래로 노송 가지가 휘늘어진 밑에
초막같은 암자가 빼꼼히 보이는 것이다.
김삿갓은 지체없이 그쪽으로 바삐 걸었다.
길은 바위사이로 나 있는 사람이 발로 밟은 자국이 있는 구불구불 바위 사이 길로,
자칫 발을 잘못 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면 송곳같은 바위끝에 뼈가 으스러질 판으로 보였다.
"자기가 무슨 은둔거사라고 이런 곳에 암자를 지었담"
김삿갓은 저절로 불평이 나왔다.
그러면서 아슬아슬 훠이훠이 땀 흘려가며 바위사이 비탈길을 내려와,
암자밑에 다다르자 신기하게도 딴판으로 평지가 나타났다.
"허, 집터 한번 잘 잡았다."
이번에는 감탄이 나왔다.
뉘라서 이 높은 바위산 중턱에 평지가 있으리라 짐작인들 하겠나?
그러고보니 저 암자 속에서 시나 읊고 있을 노승이 신비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서 부터 암자까지는 싸리나무가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길이 통로 구실을 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소로를 따라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법당이 있었는데 법당 가운데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중이 보였다.
김삿갓은 저 중이 바로 그 글 잘하는 선승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조심 그쪽으로 다가갔다.
늙은 중은 조용히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김삿갓은 한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그를 불렀다.
"스님 ..!"
불경소리가 멋었다.
"뉘시오?"
우렁우렁한 목소리였다.
고개는 여전히 숙인채였다.
"스님의 공부를 방해 한것 같아 대단히 죄송 합니다.
불초는 입석봉 밑을 지나는 과객 입니다."
"그럼 어찌 여기는 왔소?"
중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은채 대꾸를 하였다.
"바위의 형상이 가히 만물상이라
절경에 심취하여 발길을 옮기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허허,
그럴리가 있나"
김삿갓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자기의 말이 꾸며낸 것임을 이 늙은 중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이 다시 말했다.
"혹시 딴 생각을 하고 오시지 않았소?"
"딴 생각 이라뇨?"
김삿갓은 자기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는 이 늙은 중을
다시금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 보았다.
"방금 시주가 과객이라고 하지않았소?
적어도 자신을 과객이라 칭하려면 诗文에 능해야 할것이니
과객은 시문에 통달하였다는 말씀이 아니오?"
" ... "
김삿갓은 대답에 머뭇 거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후 입을 열었다.
"둔재의 몸으로 어찌 시문에 통달 하였다 말씀드리겠습니까,
다만 면무식은 했다 여깁니다."
"겸손의 말씀이군"
"아니올시다.
실은 스님께서 시에 능하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가르침을 받을까 하여 찾아 왔습니다."
"하하하하,
그럼 그렇지!"
늙은 중은 자기의 생각이 적중하여 기쁘다는 듯이
비로소 너털 웃음을 웃으며 김삿갓을 향해 돌아 앉았다."
김삿갓은 그의 얼굴을 보고 순간 다시금 감탄했다.
짧은 머리는 그대로 백발이었고 눈썹 역시 하얗게 세었는데
그 아래 자리잡은 두 눈은 가을 호수처럼 맑으면서도 형형한 빛을 내쏘고 있었으니,
늙은 중은 가히 仙风道骨의 풍채를 하고 있었다.
"그래 이 빈승에게 가르침을 받겠다고?
보시오 . 젊은 시주, 왜 시를 한번 겨루어 보겠다고
솔직히 말 못하고 어물쩡하는게요,
그야 이 늙은이를 대접하느라 그렇게 말 했으리라 알고는 있소만."
"외람되게 견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도해 주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헌데, 빈승은 한 가지 괴퍅한 성질이 있습니다.
그 말도 시주께서는 들으셨소?"
올커니, 이 뽑는 이야기구나.
김삿갓은 그의 말뜻을 알아 차렸으나 내색을 하지않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럼 아직도 모르고 계신가?
우리 시를 주고 받는 내기를 함에 있어 한가지 약속을 하고 싶은데,
그것은 어느 편이든 막히는 쪽은 진것으로 하되
진 죄로 이를 하나 뽑기로 합시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 옛날 이백(李白)도 춘강(春江) 도리지원 (桃李之园)에서 시회를 베풀며
시불성(诗不成)이면 주삼배(酒三杯)라 하여 벌주 세잔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응당 벌을 받음이 옳을 것 입니다."
"하하하...
과연 시주는 빈승과 좋은 상대가 될 것 같소.
그럼 어서 이리로 올라오시오."
김삿갓은 법당 위로 올라가 늙은 중과 맞대고 정좌했다.
"빈승이 먼저 읊어갈 터이니 시주는 뒷글을 맞춰 주시오.
빈승이 더이상 부르지 못하거나
시주가 댓귀를 짓지 못하면 지는 것으로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시작 합시다."
늙은 중은 법당의 천정을 바라보며 이윽고 읊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