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32 -
['가련'과의 영원한 이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김삿갓은 항상 안변을 떠나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가련과의 사랑에 얽매어 좀체,
다시 길을 떠날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련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항상 걱정이 되는 것은
혹시라도 가련의 몸에 아기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가련과 일생을 같이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김삿갓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처없는 방랑길에,
한순간 불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저지르고 있는 일 인데,
만일 아기가 생긴다면 자신보다 가련의 불행이요,
아이의 불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 때문에 김삿갓의 마음이
이곳 안변에 더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날 사또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더니 사또가 펄쩍 뛰었다.
"이왕 방랑길에 나섰음에 무엇이 그리 바쁘단 말이오.
우리집 아이가 급제하는 것이나 보고 떠나도록 하시오.
누가 가르친 아이인데 결말을 아니보고 떠난단 말이오?"
사또는 김삿갓을 극구 만류하였다.
사람과의 일로,
거만이나 아니꼬운 사태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만,
인정과 도리에는 약한 김삿갓,
인정에 얽매어 마냥 속절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사또의 자제가
알성시에 응시하여 장원은 아니었으나 급제를 하여 한양으로 떠났다.
그러자 안변 일대에 돈 깨나 있는 집안에서는
김삿갓을 독선생으로 모셔가려고 난리가 났다.
그들은 사또에게 별의별 청을 하는등 한동안 야단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사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김삿갓을 편하게 하고 곁에 두고 싶어했다.
그해 가을이 가고, 겨울도 가고,
봄이오자 김삿갓은 이제는 기필코 떠나리라 결심을 했다.
지난 일년여 처럼 편히 먹고 계집과 잠자리를 즐기려고,
고생하는 아내와 어린자식을 두고 가출한 그가 아니었다.
이곳 저곳을 정처없이 떠돌면서
후한 대접보다는 박대를 받는 것이 오히려 편했고,
또 글로써 그들을 매도하여 질타하는 것을 보람과
즐거움으로 여기는 김삿갓이 아니던가?
어느덧 사월이 되어 푸른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산야는 진달래의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새봄 바람에 얹혀 삿갓을 쓰고
훠이훠이 도포자락을 날리며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삿갓은 가련이와 술상을 마주한 자리에서 슬며시 말을 꺼냈다.
"임자,
내가 그동안 너무 바깥세상을 외면하고 지냈네.
사또의 은혜와 자네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세월가는 줄 모르고 있었지.
이제 봄도 되었으니 북쪽으로 두만강까지 두루 유람을 하였으면 하네."
김삿갓이 말을 마치자 가련의 두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제 곁을 떠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잠깐 외지 바람을 쏘이겠다는 것이지.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 올것이니 걱정말게나."
"그렇게나 늦게요?"
김삿갓의 방랑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련은
겨울이 오기전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모양이다.
"자고로 시인 묵객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법이네.
그러면서 자기의 시를 살찌울 기회를 갖게되는 것이지.
내, 일정 전이라도 자네 품이 그리우면 그대로 돌아 올 것이니
너무 염려는 말게나."
김삿갓은 되도록 가련이를 안심시켜 주려고 이렇게 말을 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가련이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서방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꼭 돌아 오시는거죠?"
몇 번이라도 그녀는 다짐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틀림 없대두.
함흥, 북청으로 해서 두만강까지 갖다 오려면 빨라야 늦가을 쯤 되겠지...!"
"꼭 돌아 오셔야 해요.
만약 동짓달까지 서방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가련이는 죽고 말거예요..!
"죽어 ?"
김삿갓은 가슴이 뜨끔했다.
"네,
저를 살리려면 꼭 그때까지 돌아오세요...!"
"돌아오지"
허나 자신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이별을 앞둔 그날 밤,
여늬날 보다 더 두 사람의 사랑은 불보다 뜨거웠다.
다음날 아침 밥상을 물린 김삿갓은 시를 한 수 지었다.
"막상 길을 떠나려니 나도 왠지 서글프구나.
붓을 주게...!"
그의 심정은 매우 착잡했다.
오가다 만난 인연이었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의 거미줄에
서로의 깊은 정을 얽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먹물을 찍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다.
"가련문전 별가련 가련행객 우가련"
(可憐門前 別可憐 可憐行客 尤可憐)
"가련막석 가련거 가련가망 귀가련"
(可憐莫惜 可憐去 可憐不忘 歸可憐)
(가련이 문전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행객이 더욱 가련 하구나,
가련아! 가련하게 떠남을 슬퍼 말아라...!
내 너를 잊지 않고 떠난 듯이 다시 오리라)
가련이 시를 읽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의 절저한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에 슬픔은 더욱 북받쳤다.
가련이는 노자돈을 후하게 내 놓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임자,
돈을 쓰면서 유람하는 것은 내 분수에 맞지 않네.
그냥 두어두게. 나는 빈 몸이 좋아."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에서 눈물을 흘리는 가련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김삿갓이 관아로 돌아와서 사또에게 불문곡직,
하직을 고하니 사또가 매우 섭섭해 만류하였으나
삿갓의 결심이 너무도 굳건한 것을 알게된, 사또는 체념을 하였다.
그 역시 후하게 돈을 내어 놓았으나 삿갓이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자,
"그래 가련이와는
이야기를 잘 나누었소?"
가련이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또가 물었다.
"예,
돌아 다니다가 고달프면 돌아 오겠다고 했습니다.
하오나 기약없는 약속이지요...!
"관북을 모두 돌아 보려면 이 삼년은 족히 걸릴 것이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려주시오...!"
내 그때까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자리가 바뀌더라도 일러놓고 가리다.
그리고 아들놈 가르친 수고는 권해도 받지 않으려 하니,
대신 가련에게 보내도록 하겠소...!
"보살펴 주신 은혜도 백골난망 이온데,
더 없는 배려를 하심을 어찌 잊겠습니까....?"
김삿갓은 큰 절로써 사또와 작별을 하였다.
이렇게해서 김삿갓은 일년이 넘도록 정이 들었던
안변을 떠나 다시 정처없는 방랑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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