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오대천지 주인거사

오토산 2022. 1. 27. 05:58

김삿갓 52 -
[오대천지 주인거사五大天地 主人居士]

​다음날 아침,

김삿갓이 조반을 얻어먹고 나니

주인장이 구해 놓은 널판지를 가리키며

 

"이만 하면 되겠소이까?"하며

물었다.

​"좋습니다.

아주 훌륭한 현판 감입니다."
​그리고 김삿갓은 즉석에서 붓을 들어

 

"五大天地 主人居士" 라는

글자를 휘갈겨 썼다.

​"이게 무슨 뜻이오?"

"주인장은 모르셔도 됩니다. ​

내가 주인장을 대신하여 스무냥 대신 사또에게 이 현판을 직접 헌납할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김삿갓은 십 리가 넘는 읍내까지 현판을 몸소 메고

동헌으로 찾아가 원님 면회를 신청하였다.

​"그대가 누군데

사또 어른을 뵙자고 하는가?"
이방이 묻자 김삿갓이 대답했다.

​"사또 어른께서 이번에 영전을 가신다기에,

시생이 영전을 축하하는 뜻에서 현판 한 폭을 써왔습니다.

바라건데 사또 어른께 직접 상납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사또는 이방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기쁜 얼굴로 동헌 마루로 달려나왔다.
​김삿갓은 허리를 정중히 숙이며 현판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다.

​"이 현판은

시생이 사또 어른의 영전을 축하하는 뜻에서 직접 써 온 것입니다.
글씨가 치졸하오나, 시생의 성의를 생각하시어 받아 주시옵소서."
사또가 글씨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더니 크게 기뻐하였다.

​"자네는 왕희지보다 더 명필일쎄!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물론 나를 가르키는 말이렷다?"

​"물론 입니다.

사또 어른의 지금까지의 치적으로 보아

'오대천지 주인거사'라고 찬양하는 게 합당하다 여겨서 그렇게 써 온것 이옵니다.

다른 고을로 가시더라도 동헌 대청 마루에 이 현판을 꼭 걸어 놓도록 하옵소서."

​"음 ...

참 좋은 생각이야!

오대천지 주인거사라는 말만 들으면

내가 기상이 웅대한 인물임을 대번에 알아 볼 수 있을게야!"

​사또는 자못 만족스러운 듯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며 물었다.

​"가만 ..

五大天地란 무슨 뜻이지...?"
​김삿갓이 사또에게

 

"五大天地 主人居士"라는

현판을 써 온 뜻은

탐관오리를 골려주려는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사또는 그런 눈치를 전혀 채지 못한채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말이 마치 자신을 영웅호걸에 견주어

지칭하는 것 같이 여겼다.
​김삿갓은 속으로 웃음을 삭이며 사또에게 물었다.

"사또 어른께서는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무엇을 뜻하시는지 아시옵니까?"
​사또는 모른다고 대답하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그야 모를 것은 없지 않은가?

고금 경서를 두루 통달한 내가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말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나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찬하는 말이렸다."하고
큰소리조차 쳐보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웃음을 참아가며 물어본다.

 

"사또께서 오대천지를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글씨는 자네가 써와 설랑 설명은 나더러 하란 말인가?"

​"사또 어른께서 워낙 박학다식하시기에

가르침을 받고자 하옵니다."

​"음 ...

자네가 나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그렇다면 내가 설명을 해줌세."

​사또는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얼굴을 들며 자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하였다.

​"오대천지란 커다란 천지(天地)가  다섯개 있다는 말이렸다.

​대천지란 영원불멸의 天長地久를 뜻하는 것으로 
옛날부터 석학들은 천장지구란 말을 즐겨 써왔다네.

​노자의 도덕경에도 나오지만 백낙천의 유명한 장한가에도 천장지구란 글이 등장하고

​송지문의 시에도 또한 천장지구가 나오니 그런 것들이 바로 大天地라는 것이야.

내 말 알아 듣겠나?"

김삿갓은 놀랬다.

사또를 무지막지한 탐관오리로만 알았는데

대천지를 해석하는 경륜이 고금경서에 능통한 대학자의 면모였다

 

.(이렇게도 유식한 사람이

어째서 탐관 오리로 타락해 버렸을까?)
생각이 이렇게 미치자 김삿갓은 사또가 한층 가증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제가 현판에 써다 드린 "五大天地"란 말은

사또께서 지금 말씀하신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써다 드린것 입니다."하고

눈 딱 감고 말해 버렸다.

​"이사람아!

그렇다면 무슨뜻으로 오대천지라 썼단 말인가?"

​"이 고을 백성들이 말하는

'五大天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사또 어른이 뇌물을 잘 받아 자신다고 金天銀地요,
​둘째는 사또 어른이 색과 술을 좋아 하신다 하여 花天酒地요,
셋째는백성들이 느끼는 고을원의 인심이 암흑천지와

다름 없으니 昏天黑地요,
​넷째는 백성의 원한이 사무친다하여 怨天恨地요,
​다섯째는 탐관 오리가 천만 다행으로 이 고을을 떠나게 되어

백성들이 그야말로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을 하니

謝天謝地라는 뜻이 옵니다.

​백성들이 이상과 같은 다섯가지를

"오대천지"라 하기에 시생이 그런 뜻으로

"五大天地 主人居士"라는 현판을 써다 바치게 된것 입니다."

​사또는 삿갓의 설명을 듣자 이를 "뿌드득" 갈며

부들부들 치를 떨다가 뜰을 굽어보며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이놈을 당장 끌어 내어 능지처참을 시켜라!"

 

이렇듯 사또는 길길이 뛰며,

김삿갓을 끌어내어 죽여없애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마침, 동헌 뜰에는 사또의 분부를 거행할 군관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사또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이방! 어디 갔느냐?
이놈을 당장 끌어내지 못할까!"
​그러나 김삿갓은 사또에게 태연히 말을했다.

 

"사또 어른,

고정하시지요.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아시면,

아무리 사또라도 큰소리는 못 치실 것이오."
​사또는 이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황급히 되묻는다.

 

​"아니...

그대가 뉘길래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가?"

​"사또는 한양에 계신 재동 대감을 잘 아시겠지요?
나는 재동 대감의 생질로 지금 민정시찰을 다니는 중입니다."

김삿갓은 이 사또의 뒷배경이 재동대감 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자신을 재동 대감의 생질이라고 대포를 놓았던 것이다.

​그러자 금방 잡아 죽일 듯 길길이 뛰던 사또가

재동 대감의 생질이라는 말을 듣고, ​몸을 벌벌 떨기까지 하면서

김삿갓에게 연방 머리를 조아려 보였다.

​"옛 ...? 

선생께서 재동 대감댁 생질님이시라고요?

그러시다면 존귀하신 몸이 어떻게 이런 벽지까지...
미처 볼라뵈어 죄송스런 말씀 다할 길이 없사옵니다."하고

쩔쩔매며 말했다.

​"나는 외숙부의 특명을 받고, 민정 시찰을 나온 길이라오.

따라서 나의 신분을 함부로 밝혀서는 안 되도록 되어 있는데,

그러나 사또에 대한 이 고을 백성들의 원성이 하도 크기에

어쩔 수 없이 한마디 충고를 하기 위해 들렀소이다.

그런줄 아시고 행여 백성들 원성을 듣지 않토록 하시오. 아시겠소?
그럼 나는 이만 가겠소이다."

​김삿갓이 동헌을 나오려 하자

사또는 황급히 김삿갓의 소매를 잡는다.

​"귀하신 몸이 모처럼 오셨다가 이처럼 섭섭하게 가셔야 되겠습니까?
하룻밤 편히 쉬시면서 박주라도 한 잔 하셔야지요."

​"말씀은 고맙소만,

나는 누구에게서도 향연을 받을 입장이 아니라오.
외숙께서도 그런 것을 걱정하실 터..."

 

김삿갓은 이런 말을 내 던지고

동헌 대문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왔다.
​이 사또는 쩔쩔매며 김삿갓이 행여 무슨 말을 할까?

노심초사 하며 졸졸 뒤를 따라 나왔다.

​"그만 들어가시고,

 떠나면서까지 고을 백성의 원성을 듣지 않토록 재차 당부하는 바이오." 
이 한마디를 끝으로 김삿갓은 동헌을 벗어났다.

생각하면 통쾌하기 짝없는 연극이었다.
​고을 백성들에게 호랑이 같이 군림하고 포악한 악정을 일삼던 사또가

재동 대감의 생질이라고 큰소리 친 김삿갓을 만나자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 못하고 쩔쩔 매다니...​

이 얼마나 잘못 된 일인가?

김삿갓은 비록 악의 없는 거짓말을 했지만,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입장에서 탐관 오리를 혼내 주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제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