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51 -
[다시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 "五大天地 主人居士"]
집을 나선 김삿갓은 길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마누라의 눈에 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집에서 제법 멀찍히 떨어지자 비로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자고로 남자에게 무서운 것이 세가지 있으니
그 첫째는 외진 산길에서 호랑이와 마주치는 것이요,
그 둘째는 빚장이와 맞닦뜨렸을 때가 아니겠는가?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는 생각도 없는데 늦은 밤
마누라가 밑물을 하고 평소와 다르게 정겹게 웃으며 가까이 올 때가 아니겠나?)
마누라로부터 멀리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김삿갓은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쯤이면 아내가 자신이 집을 떠나오며 남겨둔 서찰을 보았을 것이고
크게 낙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자 미안한 마음 또한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집을 타고 앉아 지내는 것은
도무지 적성에 맞지도 않고 불편하기 이를데 없는 것을...
산꼭대기 바위에 걸터앉은 김삿갓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그곳에는 새털 구름이 송판대기처럼 깔려 있었고,
적당히 휘갈겨 쓴 글씨처럼 흐트러진 구름도 있었다.
이렇게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의 대조적인 자연미를 한동안 감상하던 김삿갓,
가족을 버리고 또 다시 방랑길에 오르는 것도
이같은 자연을 맘껏 즐기고 싶은 이유가 아니겠나 스스로 위안했다.
하늘가에 떠도는 구름을 오랫동안 즐기던 김삿갓,
문득 깨닫고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어 서쪽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부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가고 싶은 곳이 많은 김삿갓!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나 전라도 방향으로 갈 것 인가?
아니면 경기도를 거쳐 한양과 황해도, 평안도를 가볼 것인가?
어느 곳이든지 다 가보고 싶었으나,
먼저 어느 쪽이든 길머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지팡이를 공중에 던져 떨어지는 지팡이 꼬리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가자!)
이렇게 결정한 김삿갓은 짚고 있던 죽장(대지팡이)을 허공에 던져보니
둥실 떠올랐던 지팡이가 풀밭에 떨어지며 가리킨 방향은 서북쪽이었다.
(서북쪽으로 먼저 가라는 점쾌가 나왔으니
그렇다면 경기도와 한양을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를 가보리라.)
이렇게 결심한 김삿갓은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내려가니 길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마침 나무꾼이 있어 길을 물었다.
"한양으로 가려면
어느길로 가야하오?"
"왼편 길은 단양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제천으로 가는 길이니
한양을 가려면 제천, 원주를 거쳐야 할 것이오."
"고맙소이다.
헌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질 곳을 찾아야 하는데
이 부근에 그럴만한 집이 없을까요?"
"저 고개를 넘으면 초가 몇 채가 있는데
그곳에서 구해 보시구려."
"고맙소이다."
그렇게 김삿갓은 고개를 넘어 네 댓개 보이는 초가에 찾아들어
밥 한술 구걸하니 고맙게도 한 집에서 밥 한 상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저녁상을 들여오는 그 집 주인의 얼굴에 수심이 잔뜩 껴 있었다.
김삿갓은 밥을 다 먹고 상을 물리며 주인에게 물었다.
"고맙게도 저녁을 주셔서 아주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주인장께서 무슨 걱정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약간 당황한 빛을 보이며 말한다.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원님을 모시고 살아가자니
하루도 걱정이 끊일 날이 없어 그렇습니다."
"원님이 호랑이 보다 더 무섭다니요?
세상에 그런 일도 있습니까?
자고로 고을 원님은 백성을 보살피고 보호하여야 할 牧民官인데,
원님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대서야 말이 됩니까?"
"누가 아니라오?
그러나 우리 고을의 원님은 전혀 그렇지가 못해요."
주인은 이같이 말을하며 한숨까지 내 쉬었다.
"원님이 어째서 호랑이 보다 더 무섭다는 말씀인지
그 이유를 좀 들려주시죠."
김삿갓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란 생각에 주인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주인은 한숨을 길게 쉬고 말을 했다.
"우리 고을 원님은 토색질이 얼마나 심한지,
이년 전에 부임해 오자,
이방을 통해 신임사또를 환영하는 뜻에서
가가호호 무명 두 필씩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명절 때마다 세찬비, 생일 때는 수연비, 아들 딸 여읠 때는 혼수비 등 등...
서너달을 멀다하고 뇌물을 공공연히 요구해 왔다오.
그래서 백성들은 지칠대로 지쳐 버렸는데
이번에는 다른 고을로 영전을 가면서 전별금 명목으로
각 집마다 현금 스무냥씩을 내놓으라고 닥달을 하니
우리 같은 가난뱅이가 무슨 재주로 스무냥을 내놓을 수 있겠냐 말이오."
"그야말로 무서운 탐관 오리로군요.
백성들 사이에서 원성이 끊이지 않을텐데 그런 자가 영전해 간다니요?
도데체 고을 원님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성씨가 이가라는 것만 알 뿐, 이름은 잘 모르지요.
그런데 그깟 놈의 이름은 알아서 뭐하겠소?"
"내일 날이 밝는대로 동헌에 찾아가
따져보려고 하지요."
"아서요.
한양에서도 으뜸 세도가로 손꼽는
제동(齊洞) 대감의 뒷 줄을 잡고 있는 모양인데
섣불리 따졌다가는 오히려 봉변을 당할성 싶소이다."
"그렇다면
주인장께서는 전별금 스무냥을 마련해 놓으셨소이까?"
"천만에요.
그날그날 입에 풀칠 하기도 바쁜 형편인데
현금 스무냥을 무슨수로 마련 하겠소?
아직 추수도 못한 때이니 수중에 돈이 있을 수도 없지요."
"그렇다면 그 문제는 아무 걱정 마시고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 주십시오."
김삿갓은 생각이 되는 바가 있어 이렇게 말을 하자,
주인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사또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노형은 무슨 재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오?
"나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입니다.
전별금 스무냥을 내는 대신에 영전을 축하하는 현판(懸板)을
한폭 써다 주면 돈 보다도 더 좋아할 것이니, 그점은 안심 하십시오."
주인은 김삿갓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노형이 글씨를 아무리 잘 쓰기로
돈밖에 모르는 사또가 현판 따위나 받고 만족 할 것 같지 않소이다.
그건 어림도 없는 말씀이오."
그러나 김삿갓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탐관오리들은 돈도 좋아하지만,
명예 또한 돈 만큼이나 좋아 합니다.
자기를 치켜 올려 주는데 누가 싫다 할 것 입니까?
이 문제는 내게 맡기시고 주인장께서는 현판이 될 만한
적당한 널판지 한 장을 내일 아침 일찍 구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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