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55 -
[첫날밤 소박맞은 세 자매(상)]
김삿갓은 사나이가 가르킨 고개를 넘어 앞을 살펴보니 과연 집이 한 채 있었다.
산골에서는 보기드문 반기와집 이었는데 기왓골에는 드문드문 잡초가 돋아났고
활짝 열려 있는 대문은 판자가 썩을대로 썩어 제각각 바람에 너덜거렸다.
(초시 댁이라더니 초시 양반이 죽고나서
집 안팎을 수리할 사람이 없는게로구나)
김삿갓은 그 집이 초시 댁이 틀림없어 보였기에 대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다.
그러자 칠십 노파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누구냐고 묻는다.
"저는 지나가는 나그네 올시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재워 주실 수 있겠는지요?"
노파는 대청마루로 나오더니 딱한 얼굴을 하며 말한다.
"우리 집은 나혼자 사는 집이라오.
사정이 딱해 보이니 들어 오시구려."
노파는 김삿갓을 건넛방으로 인도하며 혼잣말로 걱정을 한다.
"손님이 모처럼 오셨는데
대접할 음식이 변변치 않아 어쩌지 ..."
"할머니!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행여 그런 걱정은 마시고 잠만 재워 주셔도 됩니다."
"시장하시지?
저녁을 곧 지어 올테니 그동안 방에서 편히 쉬구려."
주인 노파가 부엌으로 간뒤 방안을 둘러보니
머리맡에는 문갑이 있고 그 위에는 明心寶鑑이 놓여 있었는데
책이 오래된 탓인지 책장 곳곳이 여기저기 헤져 있었다.
(칠십 노파가 혼자 살면서도 글을 읽을 정도가 된다면
잘 교양된 집에서 자란 모양이구나.)
김삿갓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편히 누워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후 문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주인 노파가 저녁상을 들고 들어온다.
들여온 상에는 반찬이라곤 몇가지 밖에 없었으나,
음식이 깔끔하고 먹음직스러 웠다.
"저만 먹을게 아니라,
할머니도 함께 드시죠."
주인 노파가 웃으며 대답하는데,
"내가 아무리 늙었기로 남녀가 유별한데,
외방 남자와 음식을 어떻게 같이 먹누?
반찬이 입에 맞을진 모르겠으나 어서 많이 들어요."
자신을 가리켜 외방 남자라고 말을 할때
그 풍기는 노파의 수줍움이 느껴졌기에 삿갓은 더는 권하지 않고
저녁밥을 먹은 뒤 밥상을 물렸다.
밤이 이슥해서 노파가 자리끼를 들여주는데
김삿갓이 노파에게 말을 건넸다.
"할머니! 거기 좀 앉으시죠.
할머니는 이 집에 언제부터 혼자 사셨나요?"
주인 노파에겐 무슨 사연이 있어 보여 삿갓이 물어 보았다.
주인 노파는 등잔 뒤에 살며시 앉으며 말한다.
"늙은이가 혼자 사는 게 무척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모양이구료.
나는 혼자 산지가 벌써 오십 년이 넘었다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다.
"아니 그럼,
초시 어른께서 그렇게나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씀 입니까?"
김삿갓은 노파의 집을 초시 댁이라고 부른다고 들었기에
주인 노파를 초시의 미망인 인것으로 알고 그렇게 물었던 것이엇다.
그러자 주인 노파는 초시라는 말을 듣더니 약간 당황하는 빛을 보이더니
"초시 어른은 내 남편이 아니고 돌아가신 우리 집 아버님이시라오.
우리 집이 초시댁 이라는 것을 어찌 아셨소?"
"조금전에 마을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초시 어른이 부군이 아니고 선친이셨다면,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김삿갓은 자신의 짐작이 잘못된 것을 솔직하게 사과하고 나서,
"아니 그러면 부군께서
그렇게도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씀 입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주인 노파는 한참동안 망설이는 빛을 보이더니 문득 말을 꺼냈다.
"나의 남편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나는 첫날밤에 소박을 맞은 여자라오."
김삿갓은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첫날밤에 소박을 맞으셨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을 한 노파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신방을 치루는 날 밤에 신랑이 도망을 가 버렸으니
그게 바로 첫날밤 소박이 아니고 뭐겠소."
김삿갓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아 다시 물었다.
"실례의 말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처녀 때에도 용모가 수려하고 몸가짐도 단정하셨을 것 같은데
어째서 첫날 밤에 소박을 맞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얼굴이 못생겼거나 품행이 단정치 못해
소박을 맞았다면 억울하지나 않지요.
그저, 모든 게 팔자 소관이라 생각할 밖에 없어요."
"아무 까닭없이 첫날밤 소박을 맞다니,
세상에 그런 팔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게나 말이오.
그러나 나는 소박맞을 팔자를 타고난 여자인걸 어떡하우?
우리 집은 딸이 삼 형제인데 두 언니들도 한결같이 첫날밤 소박을 맞았으니
그게 팔자 소관이 아니고 뭐겠소?"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기절초풍 하게 놀랐다.
"네..엣 ?...
삼 형제가 모두 첫날밤 소박을 맞으셨다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주인 노파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
"모든 것은
아버님 산소를 잘못 쓴 탓이라고 생각해요."
조상의 산소를 잘못 쓰면 후손에게 화가 미친다는 말은 흔히 들어오는 소리다.
그러나 산소를 잘못 써서 딸 삼 형제가 모두
첫날밤 소박을 맞았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묏자리는 대개 地官들과 상의해 정하는 것이 일례이지 않습니까?
선친께서 돌아 가셨을 때는 지관과 상의하지 않으셨던 모양이죠?"
그러자 주인 노파는 손을 내저으며,
"아버님을 모시는데 풍수와 상의를 안했을리가 있나요.
어머니는 유명하다는 지관을 모셔다가 묏자리를 정했는데
그 놈의 지관이 천하의 돌팔이였지 않겠소!"
"유명한 지관이
갑자기 돌팔이로 변한 이유은 무슨 까닭인데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님을 모신 형국은 잠두(蠶頭) 형으로 누에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잠두형에 산소를 쓰면
산소에서 바라 보이는 곳에 반드시 뽕나무를 심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놈에 돌팔이 지관은 잠두형국이 명당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런 형국에는 뽕나무를 심어 놓아야 한다는 것까지는 몰랐거든요.
결국, 우리 삼 형제는 모두 첫날밤 소박을 맞는 불행을 겪게된 것이지요."
김삿갓은 풍수설을 별로 믿지는 않는다.
다만 노파의 말을 듣고 대뜸 수긍이 되는 점도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이 학문에 정진하던 시절 들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한양의 남산도 잠두 형국이 되는데
이태조는 무학대사의 고언을 듣고 한양으로 천도를 해오자
남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오늘날 蠶室, 蠶院으로 불리는 곳은 옛날에 뽕나무가 많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산소가 잠두 형국인 것을 아시게 되었다면
나중에라도 뽕나무를 심어 놓으셨더라면 괜찮았을 걸 그랬군요."
그러자 주인 노파는 씹어 뱉듯이 말을한다.
"우리 삼 형제가 모두 소박을 맞고 난 뒤에야 그런 사실을 알았으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겠소?"
"아, 참!..
안타깝습니다."
주인 노파가 이야기 하는 사연이 너무도 구구절절한 까닭에
김삿갓은 자신이 당한 일 처럼, 안타까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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