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첫날밤 소박맞은 세 자매(상)

오토산 2022. 1. 27. 06:08

김삿갓 55 -
[첫날밤 소박맞은 세 자매(상)]

​김삿갓은 사나이가 가르킨 고개를 넘어 앞을 살펴보니 과연 집이 한 채 있었다.
산골에서는 보기드문  반기와집 이었는데 기왓골에는 드문드문 잡초가 돋아났고

활짝 열려 있는 대문은 판자가 썩을대로 썩어 제각각 바람에 너덜거렸다.

 

(초시 댁이라더니 초시 양반이 죽고나서

집 안팎을 수리할 사람이 없는게로구나)

김삿갓은 그 집이 초시 댁이 틀림없어 보였기에 대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다.
그러자 칠십 노파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누구냐고 묻는다.

​"저는 지나가는 나그네 올시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재워 주실 수 있겠는지요?"
​노파는 대청마루로 나오더니 딱한 얼굴을 하며 말한다.

​"우리 집은 나혼자 사는 집이라오.

사정이 딱해 보이니 들어 오시구려."
노파는 김삿갓을 건넛방으로 인도하며 혼잣말로 걱정을 한다.

​"손님이 모처럼 오셨는데

대접할 음식이 변변치 않아 어쩌지 ..."

​"할머니!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행여 그런 걱정은 마시고 잠만 재워 주셔도 됩니다."

​"시장하시지?

저녁을 곧 지어 올테니 그동안 방에서 편히 쉬구려."

​주인 노파가 부엌으로 간뒤 방안을 둘러보니

머리맡에는 문갑이 있고 그 위에는 明心寶鑑이 놓여 있었는데
책이 오래된 탓인지 책장 곳곳이 여기저기 헤져 있었다.

 

(칠십 노파가 혼자 살면서도 글을 읽을 정도가 된다면

잘 교양된 집에서 자란 모양이구나.)

김삿갓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편히 누워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후 문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주인 노파가 저녁상을 들고 들어온다.

들여온 상에는 반찬이라곤 몇가지 밖에 없었으나,

음식이 깔끔하고 먹음직스러 웠다.

​"저만 먹을게 아니라,

할머니도 함께 드시죠."
​주인 노파가 웃으며 대답하는데,

 

"내가 아무리 늙었기로 남녀가 유별한데,

외방 남자와 음식을 어떻게 같이 먹누?
반찬이 입에 맞을진 모르겠으나 어서 많이 들어요."

​자신을 가리켜 외방 남자라고 말을 할때 

그 풍기는 노파의 수줍움이 느껴졌기에 삿갓은 더는 권하지 않고

저녁밥을 먹은 뒤 밥상을 물렸다.

​밤이 이슥해서 노파가 자리끼를 들여주는데

김삿갓이 노파에게 말을 건넸다.

"할머니! 거기 좀 앉으시죠.

할머니는 이 집에 언제부터 혼자 사셨나요?"
주인 노파에겐 무슨 사연이 있어 보여 삿갓이 물어 보았다.
주인 노파는 등잔 뒤에 살며시 앉으며 말한다.

 

"늙은이가 혼자 사는 게 무척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모양이구료.
나는 혼자 산지가 벌써 오십 년이 넘었다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다.

 

"아니 그럼,

초시 어른께서 그렇게나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씀 입니까?"

​김삿갓은 노파의 집을 초시 댁이라고 부른다고 들었기에

주인 노파를 초시의 미망인 인것으로 알고 그렇게 물었던 것이엇다.
​그러자 주인 노파는 초시라는 말을 듣더니 약간 당황하는 빛을 보이더니

 

"초시 어른은 내 남편이 아니고 돌아가신 우리 집 아버님이시라오.

우리 집이 초시댁 이라는 것을 어찌 아셨소?"

​"조금전에 마을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초시 어른이 부군이 아니고 선친이셨다면,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김삿갓은 자신의 짐작이 잘못된 것을 솔직하게 사과하고 나서,

 

"아니 그러면 부군께서

그렇게도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씀 입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주인 노파는 한참동안 망설이는 빛을 보이더니 문득 말을 꺼냈다.

​"나의 남편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나는 첫날밤에 소박을 맞은 여자라오."
​김삿갓은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첫날밤에 소박을 맞으셨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을 한 노파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신방을 치루는 날 밤에 신랑이 도망을 가 버렸으니

그게 바로 첫날밤 소박이 아니고 뭐겠소."
​김삿갓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아 다시 물었다.

"실례의 말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처녀 때에도 용모가 수려하고 몸가짐도 단정하셨을 것 같은데
어째서 첫날 밤에 소박을 맞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얼굴이 못생겼거나 품행이 단정치 못해

소박을 맞았다면 억울하지나 않지요.
그저, 모든 게 팔자 소관이라 생각할 밖에 없어요."

​"아무 까닭없이 첫날밤 소박을 맞다니,

세상에 그런 팔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게나 말이오.

그러나 나는 소박맞을 팔자를 타고난 여자인걸 어떡하우?
우리 집은 딸이 삼 형제인데 두 언니들도 한결같이 첫날밤 소박을 맞았으니

그게 팔자 소관이 아니고 뭐겠소?"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기절초풍 하게 놀랐다.

"네..엣 ?...

삼 형제가 모두 첫날밤 소박을 맞으셨다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주인 노파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

 

"모든 것은

아버님 산소를 잘못 쓴 탓이라고 생각해요."

조상의 산소를 잘못 쓰면 후손에게 화가 미친다는 말은 흔히 들어오는 소리다.
그러나 산소를 잘못 써서 딸 삼 형제가 모두

첫날밤 소박을 맞았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묏자리는 대개 地官들과 상의해 정하는 것이 일례이지 않습니까?
선친께서 돌아 가셨을 때는 지관과 상의하지 않으셨던 모양이죠?"
​그러자 주인 노파는 손을 내저으며,

 

"아버님을 모시는데 풍수와 상의를 안했을리가 있나요.

어머니는 유명하다는 지관을 모셔다가 묏자리를 정했는데

그 놈의 지관이 천하의 돌팔이였지 않겠소!"

​"유명한 지관이

갑자기 돌팔이로 변한 이유은 무슨 까닭인데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님을 모신 형국은 잠두(蠶頭) 형으로 누에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잠두형에 산소를 쓰면

산소에서 바라 보이는 곳에 반드시 뽕나무를 심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놈에 돌팔이 지관은 잠두형국이 명당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런 형국에는 뽕나무를 심어 놓아야 한다는 것까지는 몰랐거든요.

결국, 우리 삼 형제는 모두 첫날밤 소박을 맞는 불행을 겪게된 것이지요."

​김삿갓은 풍수설을 별로 믿지는 않는다.
다만 노파의 말을 듣고 대뜸 수긍이 되는 점도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이 학문에 정진하던 시절 들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한양의 남산도 잠두 형국이 되는데

이태조는 무학대사의 고언을 듣고 한양으로 천도를 해오자

남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오늘날 蠶室, 蠶院으로 불리는 곳은 옛날에 뽕나무가 많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산소가 잠두 형국인 것을 아시게 되었다면

나중에라도 뽕나무를 심어 놓으셨더라면 괜찮았을 걸 그랬군요."
​그러자 주인 노파는 씹어 뱉듯이 말을한다.

"우리 삼 형제가 모두 소박을 맞고 난 뒤에야 그런 사실을 알았으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겠소?"

​"아, 참!..

안타깝습니다."

주인 노파가 이야기 하는 사연이 너무도 구구절절한 까닭에

김삿갓은 자신이 당한 일 처럼, 안타까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