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68 -
[개성 사람들의 두문동 정신. 선죽교 참배(상)]
김삿갓은 진봉산으로 철쭉꽃을 찾아 떠났다.
과연, 진봉산 철쭉은 변계량이 읊은 시 처럼 천하에 절경이었다.
제법 험한 산 전체에 철쭉꽃이 얼마나 많이 피어 있는지,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산 전체가 훨훨 불타오르는 듯 했는데
가까이 와 볼수록 더욱 놀라왔다.
철쭉꽃은 진달래꽃과 비슷하면서도 취향은 크게 달랐다.
진달래 꽃의 빛깔은 청초한 연보랏 빛이어서 순결 무구한 숫처녀를 연상하게 하지만,
철쭉꽃은 꽃송이 자체도 풍만하려니와 빛깔도 농염하기 짝이 없어
진달래 꽃과 견주어 보건데,
한창 무르익은 삼십대 여성의 육체가 연상된다.
진봉산에 피어 있는 꽃은 오직 진달래와 철쭉 뿐이었다.
진달래 꽃이 한물 가자,
철쭉꽃이 때를 만난 듯이 황홀하게 피어 있었다.
김삿갓은 마치 옷을 벗고 잠자리에 누워 있는 여체를 어루만지듯
철쭉 꽃송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시 한 수가 읊조려졌다.
"지난 밤 봄바람이 동방에 불어 들어,
비단 이부자리 곱게 깔아 놓았소,
이 꽃이 피는 곳에 새들도 울고 있어,
그윽한 그 자태가 더욱 애를 끊노니"
진봉산 철쭉에 넋이 나간 김삿갓,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한 발길을 옮기다 보니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이 멀리 바라보였다.
그러자 김삿갓은
'5백년 옛 도읍지를 이제야 보게 되었구나!'하며 감개가 무량해진다.
송악산 기슭에는 수목이 무성하였다.
저물어 가는 산길을 걸어가며 송악산 높은 봉우리를 올려보다
문득 고려조 충신이었던 야은 吉再의 옛 시조가 머리에 떠올랐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 길재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이성계는 고려를 망하게 하고 조선왕조를 창업하자 백성의 추앙을 받던
정신적 지도자인 세 사람을 회유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조의 지조를 지켜왔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쪽같은 절개는
지금도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태조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후일 조선조 3대 태종)이 酒席에서
포은 정몽주의 심경을 아래와 같은 詩로 떠봤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다."
그러자 정몽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안군의 교묘한 회유를
일도 양단(一刀 兩斷)의 절개로 응수한 것이었다.
이러한 대쪽같은 정몽주의 일편 단심의 표현은
야망을 꿈꾸고 있는 정안군과 그의 추종 세력에게는 전혀 받아 들일수 없는 것이었다.
주석이 파한 뒤,
포은 정몽주는 죽음을 예감하고 말 안장에 거꾸로 앉아 집으로 돌아갔다 한다.
그리고 선죽교에 이르러 마주친 조영규(趙英珪)의 철퇴에 맞아 숨을 거두었으니,
세상에 그런 충신이 어디 있으랴 생각되었다.
杜門不出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어원은 개성 사람들,
아니 고려조에 충성해 오던 文臣 72명과 武臣 48명이
이성계가 고려를 거꾸러뜨리고 새나라 인 조선 왕조를 창건하자,
그날로 만수산 두문동 골자기로 들어가 풀뿌리를 캐어 먹으면서도
새나라(조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성계는 그들의 항거에 크게 당황하여
온갖 회유책을 써보았지만 그들 누구도 새로운 왕 이성계에게 회유되지 않았다.
이에 크게 진노한 이성계는 만수산 사방에 불을 질러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을 질러 버리면 불길에 견디지 못하고
두문동에서 뛰쳐 나오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문동에 숨어 든 고려조의 망국 지사들은
만수산 전체가 큰 불덩이가 되었음에도
불에 쫒겨 나오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杜門不出)
이 때문에 개성에는 두문동 정신 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고
이런 정신적 영향으로 개성 사람들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사는 사람들은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는 人材를 등용할 때 西北사람을 배척하게 되는 전통이 만들어지게 됐다.
이와 함께 개성 사람들은 호구지책으로 장삿길에 나서게 되었으니
흔히 "개성상인"이라고 하면 이익을 취하는데 영악함이 남달라서
지금까지도 개성 사람들을 흔히, "깍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익에 영악한 개성 사람들이지만
신용이 알뜰하고 셈이 바르기론 개성 상인을 따를 사람이 없는 것이다.]
죽음의 도시와 다름없는 개성의 거리를 거닐다 보니 김삿갓은 문득
정몽주가 살해된 善竹橋를 찾아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선죽교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보세요 말씀 좀 묻겠습니다.
선죽교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김삿갓이 지나가는 선비를 붙잡고 물어 보니,
사십쯤 되어 보이는 선비는 얼굴에 근엄한 빚을 띄며,
"포은 선생님이 운명하신 선죽교를 가시려고요?
이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라서 말만 듣고 찾으시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내가 앞장 설 터이니 따라 오시오."하며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길잡이로 나서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이렇듯 외지에서 온 선죽교 참배객을 앞장서 인도하는 개성 사람들을 보건데
이곳 사람들이 정몽주 선생을 얼마나 흠모하고 사랑하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윽고 선죽교에 닿자마자 선비는 다리 앞에서 머리를 숙여
잠시 묵념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
"포은 선생께서는
이 다리 위에서 이방원의 하수인 조영규라는 놈의 철퇴에 맞아 무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포은 선생께서 흘리신 성스러운 피는 이 다리 돌 속에 깊숙이 물들어
3백년이 지난 지금도 돌이 이렇게 붉습니다.
보십시요,
이게 포은 선생께서 흘리신 핏자국 입니다."
선비의 말을 듣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선죽교 돌에는 군데군데 핏자국이 남아 있는 듯이 보였다.
김삿갓은 붉은 핏자국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무심한 돌도 충신의 피를 알아 보는 모양 입니다.
그러나 이 다리에는 충신을 기리는 비각(碑閣) 하나 없는 건 왜입니까?"
그러자 선비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한다.
"나라에서는 포은 선생의 지조 굳은 충성심이 두려워
간신히 비석 하나만이 있을 뿐 비각조차 세우지 못하게 하였기에
누가 목숨을 걸고 비각을 세우려고 하겠소이까?"
선비는 선죽교에 비각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조선 왕조가 되고 난 뒤에는
포은 선생님의 충성심을 누구도 찬양하지 못한답니다.
포은 선생님의 충성심을 모르는게 아니라
섣불리 찬양했다가는 목숨이 달아날까 무섭기 때문이지요.
내가 알기로는 석희박이라는 무명시인의 시가 한 수 있을 뿐입니다."
(꼭 오늘의 세태를 보는 듯한 생각에 가슴 저며지고 이 역천혼돈의 시대,
그 한가운데를 살아가면서도 권력자들의 눈치나 보며
아닥하고 죽은 듯 살아가고 있는 비겁한 지식인들이 떠올려지는 대목)
"그 시는 어떤 시옵니까?"
그러자 선비는 아래와 같은 시를 한 수 읊어 보였다.
"산천은 옛 대로되 거리는 비어 있고,
저녁놀 잠긴 곳에 물소리만 처량하구나.
홀로히 말 세우고 옛 자취를 찾아 보니,
한 조각 비석에는 '정충문'만 남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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