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감춰진 비밀

오토산 2022. 2. 3. 06:26

김삿갓 89 -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감춰진 비밀]

​"요새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겠지만,

실상인즉 수안댁은 3대째 내려오는 무당의 딸이었다네.

수안댁이 하필이면 산신당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 할머니가 모두 산신령을 추앙하며 모셨던 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야."

​수안댁이 3대 무당의 딸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에 제제도, 김삿갓도 놀랐다.

모두가 처음 들어 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수안댁이 무당의 딸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조조가 놀라면서 노인에게 물었다.

​"이 사람아!

내가 죽은 사람에 대해 왜 거짓말을 하겠나?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려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틀림없이 할머니도 어머니도 무당이었다네."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내심 크게 한탄하였다.

 

(아, 그래서 그 사람이 무당에 대해 각별한 숭앙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게다가 그 무당의 말이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씀이었으니,

어찌 각별히 받들지 않았으랴!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이 철썩같이 의존하고 있었던

무당의 예언을 혹세무민으로 몰아 세우지 않았던가!

아! 진작에 이런 사실을 알았던들...

이제는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나 저러나 수안댁이

무당의 딸이었든 누구의 딸이었든 간에 마누라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김삿갓으로서는 그녀를 장사 지내 줄 의무가 있었다.

​수안댁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이 도와 주어 장사는 어였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장사를 잘 치러 주었다고 마누라를 잃은 슬픔이 가셔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삿갓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파 마누라를 땅속에 묻으며,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망인에게 들려 주었다.

​"여보게 마누라! 나를 두고 죽다니,

자네는 너무도 무심하네 그려. 부부가 되려면

三生之緣이 있어야 한다는데 나만 남기고 자네는 죽었으니

우리 두 사람에게는 본시부터 삼생지연이 없었더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前生과 來生의 인연은 없었는지 몰라도

이승에서는 잠시나마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 왔으니,

금생지연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삼생지연이 없으면서도 이승에서나마

부부 관계로 살아온 우리들의 만남은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가?

자네는 진실로 마음이 곱고 인정이 많은 여인이었네.

자고로 浮沈(부침)은 천고의 常事고, 꽃이 필 때면 풍우가 많고,

인생에는 이별이 다반사 이거늘,
오늘날 자네와의 별리에는 가슴이 너무도 아프이

때마침 가을인지라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의 슬픔만은 참을 수 있어도
당신이 마당가에 심어 놓은 국화꽃을 이제는 누구와 더불어 즐기라는 말인가?

그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네그려.

당신의 얼굴은 모란꽃처럼 아름다웠고,
또 웃음은 꽃이 피어나는 듯이 화평하였고,

그대의 목소리는 옥쟁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아름다웠나니,
이제와서 눈물을 흘려 본들 지난날의 즐거움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다만 두 손 모아 자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비노니

희노애락이 없는 극락 세계에서 부디 편히 쉬어 주기를 바랄 뿐이네."

​김삿갓의 고별사가 얼마나 애절했던지,

조문객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수안댁이 저승에서 저 소리를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조문객들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누라 없는 집안은 무덤처럼 쓸쓸했다.
김삿갓은 마누라가 죽은 뒤로는 방안엔 들어가기도 싫어

날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茫然自失한 상태로 보내고 있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마누라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줄 것만 같아서였다.

사람은 이미 갔건만

그녀가 가꾸어 놓은 국화꽃은 아직도 싱싱하게 피고 있어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였다.

이렇게 마음이 쓸쓸하다 보니 어느 하나 쓸쓸해 보이지 않는 게 없었다.

김삿갓은 뜰에 무성히 자란 잡초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옛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가을 풀을 쓸쓸하게 바라보려니

슬픈 바람이 천 리를 불어온다.

​슬프다 가을 바람에 낙엽만 휘날리고
메마른 버들가지엔 부엉새만 살고있네

​오늘도 그대 생각으로 눈물만 자꾸 흐르는데
국화꽃은 해마다 피어도 그 누가 알아 줄 것인가]

​김삿갓은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그러나 길을 떠나기에 앞서,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수안댁의 재산 정리 문제였다. 사후에 알고 보니,

수안댁은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살던 집을 비롯하여 밭은 3천여 평, 임야는 1만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재물들은 응당 남편에게 귀속될 재산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남편의 권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수안댁이 남기고 간 그 어떤 재물도

자신이 차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은 상조계원을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나는 마누라가 죽은 것을 계기로 천동 마을을 떠나 갈 생각이라네.

수안댁이 남겨 놓은 재산이 적지 않은데

자네들은 그 재산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 것 같은가?"
​계원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어리둥절하였다.

"이 사람아 !

마누라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 마을을 떠날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힘을 모아서 새장가를 들여 줄 테니, 행여 떠날 생각은 하지 말게!"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안 될 말이야."

​김삿갓이 계원들과 함께 유산 문제를 상의하고 있을 때,

계장인 제제는 무슨 이유인지 일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자네가 우리 마을을 떠나려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네.

그러나 우리들의 우정을 생각해서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가?"

​"아니야!

나는 처음부터 한 해 겨울만 지내고 떠나갈 예정이었어.

자네들의 권고에 못 이겨 마누라를 얻는 바람에 이태 동안이나 더 살아왔는걸.

나는 본디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팔자를 타고난 놈이라는 것을

자네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김삿갓의 결심은 확고부동 하였다.

그러자 제제가 조용히 말한다.

"그럼 이렇게 하세.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데도 돈은 필요할 게 아닌가?
수안댁이 남긴 유산은 모두 자네의 것이니까,

집이랑 밭이랑 산이랑 모두 팔아 가지고 떠나게."

김삿갓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럴 생각은 없네.

수안댁의 유산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재산이지 내 것은 아니거든."

​"수안댁은 자네 마누라가 아닌가?"

​"나는 사람하고 결혼했을 뿐이지 돈하고 결혼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나는 횡재를 바라는 놈도 아니고 올 때에도 빈손으로 왔으니까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겠나?

수안댁의 유산은 자네가 적당히 처분해 주었으면 좋겠네."

​"이 사람아!

남의 재산을 내가 어떻게 처분한단 말인가?"

​김삿갓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힘차게 들며 말했다.

​"자네가 독단으로 처분하기 어렵거든 내가 말하는 대로 처분해 주기 바라네.
지금 자네들이 쓰고 있는 "모임방"은 너무 협소해,

따라서 수안댁과 내가 살았던 집을 마을의 公廳으로 쓰도록 하고,

3천 평짜리 밭은 계원들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거기서 나오는 소득은 마을의 공동 재정으로 쓰도록 하고,

또 1만여 평의 산은 공동으로 造林을 한다면 좋을걸세."

​유산의 처리 방법을 그렇게도 소상하게 말해 주는 바람에

계원들은 더 할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김삿갓은

기어이 전과 다름없는 죽장망해로 천동 마을을 떠났다.

마을 친구들은 멀리까지 배웅을 나오며 약간의 전별금도 모아 주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친구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몇 푼만 받아 넣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주었다.

​"이 사람아!

아무리 방랑생활을 하기로 돈 없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는가?"
​김삿갓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수안댁의 경우를 보게나.

인생이란 空手來空手去하는 것이야.
나는 이미 돈 한푼 없이 40여 년 동안이나 살아온 놈일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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