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집착

오토산 2022. 2. 3. 06:24

김삿갓 86 -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집착]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김삿갓이 눈을 떠보니 날은 어느새 환히 밝아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수안댁이 보이지 않았다.

"응...?

이 사람이 어딜 갔을까?"

​김삿갓은 방안을 두루 살폈으나 마누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짓문 너머 윗방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심상치 않아,

문틈으로 윗방을 옅보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하였다.

수안댁이 바람벽에 산신 탱화를 걸어 놓고 그 앞에 단정히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반위에 정안수와 촛불까지 밣혀 놓고

두 손을 허공에 벌렸다가 합장하며 큰 절을 올리며

입으로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괴상한 광경을 보는 순간,

김삿갓은 가슴이 철렁해 왔다.

물어 보나 마나 마누라는 지금

"남편을 죽지 않게 해달라"고 무언가에게 축원을 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내가 죽을까 봐 저렇게도 겁이 나는 것일까?)

다리가 부러진 정도로 죽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저렇게까지 겁을 내는 것은

"재혼을 하면 남편이 죽는다"고 말한 무당의 예언이 강박 관념이 되어,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성싶었다.

 

(사람이 미신에 빠지면 저렇게도 어리석게 되는 것일까?)

김삿갓은 그런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언제 흉악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뭐라고 말하면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기도 하여,

못 본 것 처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수안댁은 축원을 연방 올려대며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는데,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 보니 그 가운데는 이런 말도 있었다.

 

​"己巳生 김삿갓은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사람이오니,

전지전능하신 天帝 께서는 특별히 헤아리시와,

그 사람을 대신하여 죄 많은 이 사람을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 몸은 본디 청상살을 타고난 죄 많은 몸이 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분수를 넘어

선량한 남자를 유혹한 것은 오로지 이 몸의 죄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제님께서는 이 몸을 처벌 하시고,

김삿갓으로 하여금 환생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김삿갓은 그와 같은 주문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 왔다.

 

(혹시 마누라가  정신이 돌아 버린 것은 아닌가?)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소중하다고 한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겠나?
그럼에도 수안댁은 지금 

"남편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는 축원을 올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

김삿갓은 가슴이 메어져 오는 고뇌감을 느꼈다.

 

(저 여인과는 오다가다 만난 부부이건만,

이렇게 까지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더란 말인가?)

​김삿갓은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무당이 함부로 지껄인 허튼수작이

수안댁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도 크게 파급된 것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리고 수안댁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뿌리 깊이 자라온 망상을

일조일석에 불식시켜 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한 일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그렇다!

이런 일이란 시급히 바로잡으려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쉬운 법이니,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고쳐 주기로 하자!)

 

김삿갓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만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수안댁은 오랫동안 축원을 올리다가 시치미를 떼고 아랫방으로 내려왔다.

"어떻세요?

간밤에는 상처가 아프셔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죠?"
​김삿갓은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간간이 아프기는 했지만 잠을 자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당신은 새벽부터 어딜 다녀오는 길인가?"

​"옆집에 잠시 다녀오는 길이에요.

아침을 곧 지어 올테니 그동안 한잠 더 주무시도록 하세요."

​수안댁은 제단을 모아 놓고 축원한 일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은밀한 일이 알려지면 효과가 없어지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김삿갓 역시 그 일에는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며

 

"하룻밤 자고 나니까,

아프기가 훨씬 덜 하군.

이대로 가면 의원의 말대로 석달 안에 틀림없이 완쾌할 거야"

​일부러 수안댁이 듣기 좋아할 소리만 했다.

그러나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수안댁은

김삿갓이 매일 잠든 때마다 비밀리에 정안수를 떠 놓고

축원을 올리는 일은 한 번도 빠트리지 않았다.

매일 남편이 잠든 오밤중부터 축원을 올리다가

새벽닭이 울면 부랴부랴 아랫방으로 내려오곤 하였다.

​이러기를 두어 달 지나는 동안에 김삿갓의 부러진 다리는 거의 붙어,

스스로 변소 출입을 비롯해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자,

어느날 마누라에게 이런 농담을 하였다.

​"그동안 자네는 내가 죽을까 봐 무척 겁을 냈던 모양인데,

이것 보라구, 내가 죽기는 왜 죽는가?"

​김삿갓이 입빠른 농담을 지껄인 것은

마누라를 기쁘게 해 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수안댁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말한다.

​"에그머니나!

천제께서 들으시면 어쩌려고 그런 방정맞은 말씀을 하고 계세요?

상처가 아무리 좋아졌기로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천제께서 노여움을 타시면 무슨 앙화를 받게 될지 모르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지금 그 말씀은 당장 취소하세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우리나라 풍속으로는 병자가 자기 입으로

"병이 좋아졌다"는 말은 하지 않도록 되어있다.

 

왜냐하면 천제께서 그 말을 듣고 노여움을 타

병을 또다시 나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신이나 다름없는 민속신앙인지 모른다.

김삿갓도 그런 풍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뱉어 놓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왕 말이 난 김에 마누라의 미신적인 망상을

조금이라도 시정해 주고 싶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은 모두가 미신에 불과한 것이야
한번 좋아진 상처가 그런 말을 했다고 다시 나빠질 리는 없지 않은가.

당신은 무당의 말을 과신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은 게 좋아요.
세상에 무당처럼 무식한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무당의 허튼수작을 신주처럼 떠 받드냐 말이야."

 

김삿갓은 마누라의 생각을 고쳐 주려고 무당을 의식적으로 깎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수안댁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벌벌 떨기까지 하면서 남편을 나무라는데,

​"당신은 어쩌려고 오늘따라 그런 무서운 말씀만 함부로 하세요.

무당처럼 무식한 사람이 없다지만, 무당은 학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유식하더라도 천제께서 신神을 내려 주지 않으시면

무당이 절대로 될 수 없어요.

무당은 학식이 없더라도 전지전능하신 천제로 부터 특별히 점지 받고
인간세계와 하늘을 연결하는 "하느님의 使者"라는 걸 아셔야 해요.
당신은 그런 것도 모르시면서 어쩌면 무당을 그렇게도 업신여기세요."

​김삿갓은 무심중에 반발심이 솟구쳐 올라

대번에 마누라를 공박했다.

"뭐? 무당이 하느님의 사자라고...?
자네가 무당을 그렇게까지 신봉하고 있는 줄 정말 몰랐는걸.

무당은 어디까지나 혹세무민하는 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무당 따위가 무슨 빌어먹을 "하느님의 사자"란 말인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깨끗이 청산해 버려요."

​김삿갓은 정면으로 공격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고 참아 오던 불만이 무심중에 폭발한 것이었다.

이런 저변에는 마누라인 수안댁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질책으로 무서운 결과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수안댁은 책망을 받고 나자 두려움으로 몸을 벌벌 떨더니

"다 당신은 천 천제님한테 무슨 앙화를 못 받으셔서

그 그런 저주의 말씀을 하 함부로..."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푹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원인 불명의 공포감에 질려 졸도를 한 것이었다.

"여보게!

자네, 왜 이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