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이야기(360)
하늘의 뜻
모숙이는 시집간 지 반년도 안돼 청상과부가 되었다.
신랑이 급사하고 나서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자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모숙이는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이 무슨 팔자가 새로 시집도 못 가게 뱃속에 씨를 뿌려 놓았나!
애를 떼려고 온갖 독한 약을 지어 먹고,
비 오는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가서 뒹굴어도 보고,
바위에서 떨어져도 봤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마음을 바꿔 먹었다.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몇 달 후 옥동자를 낳았다.
탁발 온 스님이 이름을 ‘주용정’이라 지어주며
범상한 관상이 아니라고 귀띔했다.
모숙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미안하다 내 새끼야” 하고
잉태 중에 지우려 했던 죄과를 후회하며 꼭 껴안았다.
주용정은 무럭무럭 잘 컸다.
어미와 아들, 단 두 사람이 살아가게 되자
모숙이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신랑 주 서방이 저세상으로 떠나며
몇 뙈기 논밭은 약값으로 묻어가고 남은 것이라고는 초가삼간 집 한 채뿐이다.
모숙이는 아기를 등에 업고 팔을 걷어붙였다.
낮에는 큰일 치르는 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해주고,
밤이면 주단포목 집에서 받아 온 삯바느질을 했다.
용정이 다섯 살이 되자 서당에 들어갔다.
오가며 서당에 들르면 모숙이는 불뚝 힘이 솟았다.
모숙이 자신은 걸레 같은 옷을 입어도
용정이에게는 항상 비단옷을 입혔다.
제 새끼라서 그런지 용정이가 학동들 중에 제일 잘 생긴 데다
훈장님의 칭찬도 끝이 없었다.
공부가 일취월장, 어떤 때는 훈장님이 답할 수 없어 홍당무가 되기도 했다.
용정이는 쑥쑥 자라며 어깨가 벌어지고 얼굴은 백옥을 깎아 놓은 듯해
뭇 여자들이 용정이를 보고 탄식했다.
열다섯 살에 초시에 합격하더니
열여덟 살에는 덜컥 대과에, 그것도 장원으로 합격했다.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 혼기가 찬 공주가
문틈으로 몰래 사모관대를 차려입은 용정이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왕은 용정이를 승지에 임명해 늘 곁에 두고 일을 시켰다.
도승지가 지명한 소문난 신랑감들,
경상감사의 셋째아들, 안동부사의 맏아들 등이 지방에서 말을 타고 올라왔다.
한양에서도 장 대감 조카, 이 참판의 둘째 등
모두가 신언서판이 만만찮은 신랑감들이 입궐해
도승지가 일차 면접을 볼 때 공주는 문틈으로 그들의 면면을 자세히 봤다.
공주는 용정이를 점찍더니 그다음부터 아무도 보지 않았다.
성대하게 혼례식을 올리고 나서
궁궐 밖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부마(왕의 사위)와 공주의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용정이는 언제나 고향 강원 영월에 홀로 계신 어머니 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하루는 왕이 용정이를 옆에 앉혀두고 살아온 일을 물었다.
어머니가 유복자를 낳아 고생하며
자신을 키워 온 얘기를 했더니 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훌륭한 자당을 두셨다며 칭찬한 후 도승지를 불러 귓속말을 했다.
용정이와 도승지는 말을 타고 영월로 내려갔다.
영월관아의 현감 이하 육방관속이 모여들었다.
도승지가 용정이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고 소리쳤다.
“어명이요∼.
영월현감은 부마의 자당 열녀비를 세우고 열녀문을 지으시오.”
“네∼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현감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모숙이가 갑자기 용정이의 소매를 당겨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를 했다.
“싫다!
나는 열녀비도 싫고 열녀문도 싫다.”
용정이가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님, 이건 어명이에요.
어명!”
“어명이 아니라
염라대왕의 명이라도 나는 싫다.”
용정이가 무릎을 꿇어앉아 제 어미 두손을 잡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속 시원히 말씀 좀 해보세요.”
모숙이가 긴 한숨을 방바닥이 꺼져라 토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열여섯 살에 시집와
반년도 안 돼 청상과부가 되고 그해 말에 유복자인 너를 낳았다.
내 나이 이제 서른아홉 살, 이날 이때껏 오로지 너를 위해 살았다.”
용정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또다시 한숨을 쉰 모숙이가
“이제는 내 인생을 살련다.
열녀비로 남은 내 인생에 족쇄를 채우지 말아라” 하자
숙연해졌다.
탁발스님이 지나가다가 마당에 관속들이 웅성거리는 걸 보고
안채에 들어갔다가 용정이 손에 이끌려 안방으로 들어갔다.
스님이 자초지종 얘기를 듣고는 하늘에 물어보기로 했다.
아직도 젖은 빨래가 처마 밑에 걸려 있는 걸 보고
내일까지 마르면 용정이 뜻에 따르기로 하고,
마르지 않으면 어미 뜻에 따르기로 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은 불고 햇살은 봄볕처럼 내려쫴
어머니가 일부러 아들에게 져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게 무슨 천지조화인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바람에 빨래가 더 젖기 시작했다.
며칠 후 용정이와 도승지가 입궐해 왕에게 보고하자 다시 어명을 내렸다.
“하늘의 뜻이다.
자당의 뜻에 따르도록 하라.”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에 혼례식이 치러졌다.
족두리를 쓴 신부는 모숙이요,
사모관대 차림의 신랑은 훈장님이었다.
용정이가 훈장님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아버님,
제 절 받으세요.”
왕이 큰 서당을 지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