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이야기(359)
친구
민지와 수월이는
이웃에 사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지만 집안은 딴판이다.
민지네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수월이네는 천석꾼 부자다.
어릴 적 소꿉장난을 하며 둘이 손잡고 장날 구경 다닐 때만 해도
서로 간이라도 빼줄 듯이 친했지만
혼기가 차면서 서서히 찢어지기 시작했다.
민지는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가난에서 벗어나려 했고,
수월이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할 사위를 얻으려고 백방으로 신랑감을 찾았다.
강 건넛마을 백 진사의 아들 서범이는
작년에 초시에 합격하고 내년엔 대과에 응시할 계획이다.
수월이네 집과 강 건너 백 진사네 집을 매파가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날락거리더니
혼담이 무르익어 꽃 피고 새 우는 내년 춘삼월에 혼례를 올리기로 하고 약혼을 했다.
민지네는 아버지가 시름시름 오년을 앓다가 이승을 하직하기 전까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돈 걱정 없이 단란하게 살았다.
바깥채에서는 할아버지가 훈장노릇을 하느라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고 아버지는 머슴 둘을 데리고 중농 집안을 꾸려나갔다.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하자
화병에 술만 마시던 할아버지도 뒤따라갔다.
고난이 펼쳐졌다.
민지 어미가 수월이네 집에 가서
장리쌀을 빌린 후 가을에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많지도 않던 논밭을 야금야금 넘겨주고 나니
민지네 재산이 몽땅 수월이네 집으로 넘어갔다.
민지네 모녀는 살아갈 길이 없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어
민지와 그 어미는 삯바느질로 입에 풀질을 했다.
민지 어미의 바느질 솜씨가 워낙 빼어난 터라
포목점마다 일감이 들어와 모녀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지난 단옷날 강변에서는 고을잔치가 열렸다.
여자들은 그네 타기, 남자들은 씨름판, 그리고 남녀 구분 없이 시조 짓기 백일장도 열렸다.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백일장 장원에 민지가 뽑힌 것이다.
백 진사의 아들 서범이는 차석을 했다.
수월이가 파르르 끓었다.
약혼자 서범이 당연히 차지해야 할 장원을 친구 민지가 뺏어가다니!
수월이와 민지가 동네에서 마주칠 때면
민지가 말을 해도 수월이가 외면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민지 어미가 토사곽란으로 데굴데굴 구를 때
민지가 의원에 쫓아갔더니 민지네 사정을 잘 아는 의원이
먼저 돈을 가져오라는 말에 급한 나머지 수월이에게 찾아갔다.
차용증을 쓰라고 해서 써줬는데 갚아야 하는 날 수월이 칼같이 찾아왔다.
며칠만 기다려달랬더니
단호히 거절하며 기가 막힌 제안을 했다.
자기 집 총각머슴에게 매춘을 하라는 거였다.
민지는 수월이의 귀싸대기를 후려갈겼다.
백 진사네 상할머니 회갑연이 다가오면서
민지와 어머니는 아예 백 진사네 집으로 들어가
방 한칸을 차지하고 식구들 옷을 만들었다.
어느 날 저녁,
겨울을 재촉하는 밤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어머니가 도롱이를 쓰고 개밥을 주러 집에 간 사이
민지가 벽에 기대 깜빡 잠이 들었다.
서범이 들어와 민지를 덮쳤다.
요에 새빨간 띠 자국이 찍혔다.
동짓달 백 진사네 회갑연을 치르고
북풍한설 몰아치는 기나긴 겨울이 지나가더니 남풍이 불어왔다.
강남 갔던 제비가 희소식을 물고 왔다.
서범이 백마를 타고 사모에 어사화를 꽂고 한양에서 내려왔다.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에
온 고을이 떠들썩하게 혼례식을 치렀다.
사또와 육방관속도 예물을 들고 찾아왔다.
사물패가 상모를 돌리고 소리꾼들이 목청을 뽑으며 잔치는 삼일이나 이어졌다.
온 고을 사람들이 잔치판에 와 술과 고기를 먹고
덩실덩실 춤을 췄지만 민지와 어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요란하게 잔치를 치르고 신랑은 한양으로 올라갔지만
신부 수월이는 신랑을 따라가지 않았다.
시부모를 모시고 고향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사간원에서 두해를 근무한 서범이는
강원 영월 사또로 발령받아 영월로 내려갔다.
영월 토호들과 육방관속이 신관 사또 환영연회를 마련했다.
산해진미는 그렇게 중한 게 아니다.
정말로 중한 것은 수청 기생이다.
귓불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기생이 얼굴도 양귀비였다.
술판이 파할 때 뒷방에 금침을 깔아놓고
기생이 젊은 신관 사또의 소매를 당겼지만
사또는 정중하게 뿌리치고 관사 서헌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직 잠들지 않은 네 살 된 아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아빠 품에 안겼다.
아이 어미가 꿀물사발을 들고 나왔다.
민지였다.
민지 어미가 손자를 데리고 뒷방으로 가고
사또는 민지 허리를 감싸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사또는 민지 배에 그의 귀를 갖다 대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