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차례상과 조율이시

오토산 2012. 6. 16. 07:29

 

 

설날 아침에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조상에게 새해의 시작을 고하고, 한 해 동안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차례를 올리는 게 우리 전통이다.
‘가가례(家家禮)’라는 말이 있듯이 차례 상에 올리는 음식이나 과일은 지역마다, 문중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조·율·시·이(棗栗柿梨) 즉 대추, 밤, 감, 배를 기본적으로 진설하는 데는 차이가 나지 않는다. 

급속한 현대화로 말미암은 전통문화와의 퇴색으로 이를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유교 전통의 합리성과 흥미롭고 교훈적인 선조의 지혜가 담겨 있어 새삼 감탄하게 된다.
많은 과일 중 이 과일들을 필수적으로 제사상에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 구길본(56) 원장의 설명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본다.

대추는 제수용 과일 중 가장 으뜸이다.
대추나무는 꽃 하나가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는 특징이 있다.
대추는 씨가 하나기 때문에 영의정을 상징한다고도 하나, 그보다는 꽃이 필 때 비바람이 쳐도 꽃으로만 지는 법이 없이 꼭 열매를 맺기 때문에, 대추를 통해서 후손들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시련을 견디어 나가라는 교훈이 있다.

“꽃이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고 떨어진다.”라는 것을 사람에 비유하여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후손을 낳고, 그것도 많이 낳아야 한다.”라는 의미로 상징된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인력에 의해 가정과 경제력이 유지되었으므로 자손의 번창이 곧 가문의 번창으로 이어졌다. 제사상에 대추가 첫 번째 자리에 놓이는 것은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고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혼례를 올린 신부가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릴 때, 시부모가 대추를 한 움큼 새 며느리의 치마폭에 던져주는 것도 대추 열리듯 자손을 많이 낳아 가문이 번창하라고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대추 다음으로 놓이는 것이 밤이다.
밤은 한 송이에 밤알 세 톨이 들어 있어 삼정승을 상징한다는 말도 있으나, 좀 더 사실적인 이유가 설득력이 있다.
밤을 심으면 땅속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터서 커다란 나무로 자라는데, 다른 나무들은 자라면서 씨앗의 형태가 썩어 사라지지만, 밤은 씨 밤이 밤나무가 크게 자라도 썩지 않고 뿌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밤나무가 아름드리가 되어도 씨 밤은 썩지 않고 그 나무뿌리 밑에 생밤인 채로 남아 있다. 이러한 특성을 선조는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밤을 자손과 조상 간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손이 수십 대를 내려가더라도 조상은 언제나 자손과 영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여겼다.

지금도 조상을 모시는 위패(位牌)나 신주(神主)는 반드시 밤나무로 깎는다. 밤나무가 특별히 결이 좋거나 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나무를 쓰는 이유는 밤이 조상과 자손 간에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제수용 과일로 세 번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감이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고 하지만, 감 심은 데는 감이 나지 않고 고욤이 난다.
즉 접을 붙이지 않으면 탐스러운 감이 열리지 않는다.
감 씨를 심어 고욤나무가 자라면 그 고욤나무 줄기에 감나무 가지를 접을 붙인다.

완전히 접합되면 비로소 감이 열리기 시작한다. 만약 줄기가 아니라 가지에 접을 붙이면, 한 나무인데도 접붙인 가지에는 감이 열리고, 그렇지 않은 다른 가지에서는 고욤이 열리는 기묘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감나무는 자식을 낳았다고 모두 자식이 아니라, 교육으로 접을 붙여야 비로소 참다운 사람이 된다는 뜻에 비유된다.
감나무에 생채기를 내서 접붙이는 것처럼, 아픔을 겪으며 선조의 예지를 이어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의 인격체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는 껍질이 밝은 황색을 띤다.
오행에서 황색은 중앙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바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민족의 긍지를 상징한다.
껍질이 황색인 것은 우리 민족의 피부색에 비유되고, 속살이 하얀 것은 백의민족임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배는 하나의 열매에 씨가 6개가 있기 때문에 6판서를 상징하기 때문에 제사에 쓴다고도 한다.

배는 많은 수분을 함유하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오직 하늘의 비만을 기대했던 선조는 물을 소중히 여겼고, 개울물을 최대한 활용하는 등 물에 대한 주의와 중요함을 이 배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배를 귀한 과실로 여겼던 의식 속에는 ‘물을 물같이 함부로 쓰지 않는다.’라는 물을 소중히 관리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구 원장은 이 과일이 함유한 영양소와 민간요법으로 전해오는 효과도 설명했다.
대추는 동의보감에 ‘오래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면서 늙지 않는다.’라고 나와 있듯이 허약한 내장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전신을 튼튼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 신경을 안정시키고 노화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밤은 모든 영양소가 골고루 균형 있게 들어 있어 천연의 영양식품이라 할 정도로 완전식품이며, 성인병과 기침 예방, 신장보호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소화가 잘되어 환자 회복식 또는 어린이 이유식 등으로 널리 이용이 가능하다. 

감은 비타민 C와 생리활성 물질 등 기능성 물질이 다른 과실보다 풍부해 다이어트는 물론 건강 유지와 질병예방을 위한 기능성 식품으로도 우수하다. 

배는 감기를 치료하고, 배의 탄닌 성분이 설사를 낫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배의 씨를 제거하고 꿀과 함께 달여서 복용하면 가래를 삭여주고 감기치료에도 도움을 준다. 또, 배는 고기를 연하게 해주는 성질이 있어 고기를 재울 때 배를 갈아 넣는 조리법은 널리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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